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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 묵상 시리즈 제10강] 카인과 아벨 이야기 4/4

작성자용각산|작성시간24.06.25|조회수13 목록 댓글 0
아담과 이브가 아벨의 시체를 발견하다 (윌리엄 블레이크, 1825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요즘 참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습니다.
어제 비 많이 왔죠? 하루 종일. 여기도 비가 많이 왔습니다.
어떤 지방에는 그 비가 눈으로 바뀌어서 눈이 많이 온 지역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이 포근해져
겨울이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날이 포근해서 그런지 이곳 힐링 피스 가든에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도 꽤 여러분이 있었던 것을
창밖으로 보고 또 멀리서나마 강복을 드렸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오늘 네 번째면서 또 종결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시면서 카인의 후예처럼 사실 때가 많으셨습니까?
아니면 아벨의 후손처럼 사신 적이 많았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믿는 자들이기에 아벨의 후손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두 개가 다 뒤범벅되어 살 때가 많았겠죠,
카인의 후예처럼, 카인처럼 어둠 속에서 영적으로 살인죄를 짓고,
또 내가 내 동생 책임질 사람이냐고 하느님에게 따지고 드는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았던 적도 있을 겁니다.
또한 아벨처럼 회개하여 다시 주님의 자비에 내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산 적도 있을 겁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어저께 제가 물었죠.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우리 가족들도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얘기를 드렸습니다.
 
많은 작가가 ‘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제목으로 소설이라든지 책을 낸 것은 있지만
‘아벨의 후손’이라고 하는 책 제목은 들어본 것이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아벨의 후예 쪽보다는 카인의 후예 쪽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 ‘카인의 그 후의 일’에 유달리 관심을 많이 갖게 됩니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리라는 하느님의 선고를 받은 살인자 카인에게 어떠한 생애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성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 13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카인에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리라 하니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하는 얘기가 나오죠?
뭐라고 그럽니까?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뭐라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인이 아내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불렀다.
 
구약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을 무렵에 저는 사실 이 부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카인에게 특별한 표시를 주셨을까,
또 이마에 동그란 표시를 해주신 건가, 도대체 어떤 표시를 해주었는지가 너무너무 궁금했으나 알 재간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 표식을 카인에게 하여 카인을 보호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못돼먹은 카인을 표시까지 하셔서 보호하셨을까?
아벨같이 믿음 깊은 좋은 동생을 죽인 카인을 타인이 죽인다면 왜 7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을까?
이상스러웠습니다.
사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이상스럽다기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여러분 비슷한 마음이 안 드십니까?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선인 선과 악인 악과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또 권선징악의 이야기도 듣고 가르침으로 배우고 자랐습니다.
가톨릭의 4대 교리 가운데 하나가 ‘상선벌악(賞善罰惡)’ 교리죠.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면 죽어서 상을 받을 것이고, 못되게 굴면 벌을 받을 것이다.
권선징악이나 다 비슷한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카인의 이야기는 상황이 아주 다릅니다.
카인에게 하신 하느님의 처사는 답답하게 합니다.
속이 시원하지 못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해집니다.
하느님이 지나치게 악인의 역성을 드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악인을 달게 봐주시면 결말이 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날 지경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시고 공정하십니다.
그렇기에 요지부동하지 않는 정의의 편이라고 단순하게 결정짓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나 자신도 정의의 편에 세워놓고 한 생각이었죠.
그렇지만 성서의 가르치심은 ‘공정한 존재는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시라는 겁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얘기죠.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배반한 아담과 하와의 시대로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저도 곰곰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카인의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피해자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 타입이고,
또 카인 계열에 드는 인간임을 알게 되면 카인에게 주신 표식의 참뜻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의인 쪽에 속해 있다고 착각할 때는 왜 카인 그 못된 놈에게 표식을 주어 보호했고,
카인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7배의 벌을 내리겠다는 하느님의 처사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이 되지만,
나 자신이 똑같은 카인과 같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 표식이 얼마나 고맙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동생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면서 하느님에게 대들면서 건방을 떨었던 카인이
13절에 나오듯이 내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힘없이 말합니다.
바로 이때부터 카인의 회개가 시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카인의 회개를 보시고 카인을 보호하겠다는 표식을 주시고 해코지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신 것이었죠.
이렇게 깊은 죄 중에 빠졌던 카인도 비로소 하느님 앞에 죄를 고백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내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는 울부짖으며 참회하다 지친 카인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고, 또 괴로워하는 음성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의 낯을 뵙지 못합니다.’
여기에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독한 카인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우리도 죄 중에 빠져서 헤매고 있을 때 카인이 했던 이런 말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내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디기가 힘듭니다.
내가 이제는 주님의 낯을 뵙지 못할 정도가 됐습니다.
나 자신이 카인과 같은 죄인임을 자각했을 때 우리는 이때 카인의 심정을 가슴이 저리도록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의 죄는 너무 중해서 견딜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자신이 질 수 없기에 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비로소 해방되는 것입니다.
카인이 자기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다고 뉘우쳤을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은 특별한 표시를 하셔서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시는 것이지요.
이 표시가 십자가와 같은 은혜일 겁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때 사제가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가를 발라 드리죠.
인호(印號)가 박힌다고 하죠.
이 십자가 표시는 지옥 불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고, 마귀들은 천주교 신자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십자가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냉담을 하거나 죄에 빠졌을 때는 세례 때 이마에 새겨진 십자가의 빛이 어두워지고 어두워진 것을
마귀는 너무나 용케 알아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덤벼듭니다.
그러나 이쁘게 살고 거룩하게 살수록 내 이마에 있는 십자가는 빛을 내기 때문에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귀도 섣불리 덤비질 못한다고 합니다.
카인에게 새겨 주었던 표시는 바로 십자가의 표시였던 겁니다.
우리들이 세례받을 때 우리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가를 도유하듯 하느님은 카인의 이마에다 십자표를 해줬던 겁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은 사랑할 값어치가 없는 것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카인은 이전에는 하느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주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됐다고 하는 괴로움의 호소, 이 말이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두려움과 공포는 뭐겠습니까?
하느님을 다시 뵙지 못한다고 하는 공포일 겁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지 못하고 살아가는 생활은 살아있어도 그것은 시체와 같은 삶입니다.
아무런 기쁨의 삶이 아닙니다.
카인은 가까스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카인은 표를 받았습니다.
그 표를 몸에 지니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외로운 방랑이었겠습니까?
하느님은 너는 땅에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리라 말씀하셨지만, 그의 일생을 방랑자로서 끝맺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눈치채셨습니까? 그는 아내를 얻고 마을을 세웠습니다.
그의 참회하는 마음을 측은하게 여기신 하느님은 절대로 그가 방랑자로인생의 패배자로
일생을 마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었던 겁니다아멘
 
떠돌아다닌다는 그 말은 머물 곳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주소 부정의 나그네’ 그 뜻일 겁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은 주소가 있고 집이 정해져 있어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어쩌면 방랑자 같은 허무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돈을 쫓아다니고, 명예를 찾으려고 애쓰고, 지위를 다투고, 또는 육욕에 빠지고,
구하는 것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방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카인이 워낙 못되게 살았기 때문에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사실 카인이 회개했다고 하는 것에 지속성이 있었을까,
항구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카인이 정말 진실하게 하느님 전에 부복하는 생활로 인생을 끝마쳤을까, 회개하고 난 다음에
특은의 표시로 하느님께 표를 받았지만, 다시 하느님을 망각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성경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살펴보면, ‘카인이 아내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여러분들, ‘카인의 아내’라는 말에 저항감을 안 느끼십니까?
분명히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과 아벨이 있었는데, 카인이 아벨을 죽였으니,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장남 쫓겨난 카인만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 여자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동침해서 에녹을 낳았다.’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 말고 다른 사람이 더 많았단 말인가?
당연히 의문이 생깁니다.
갑자기 나타난 그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낙원에 살아본 일이 없었던 인간들인가?
의문이 자꾸 쌓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교류가 없었던 인간들은 또 따로 살았던 곳이 있었단 말인가?
사실 성경에서는 그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여러 가지 억측을 해 보기는 하지만 결국에 억측으로 끝나고 맙니다.
많은 사람이 성서는 소위 과학 서적이 아니고 인간의 영에 관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아내가 어디서 나타났을까?’에 자꾸 우리들이 관심을 집중하면 그다음이 진행되질 않습니다.
창세기는 근동 지방에 떠돌고 있던 하나의 전설을 끄집어 와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한 책이지 과학 서적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나타나느냐, 이 아내가’ 여기에 너무 집중하지 마십시오.
 
25절을 읽어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셋이라고 지어주었다.’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생긴 겁니다.
 
26절에 보면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줄을 쫙 끄십시오.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실로 크고 귀중한 구절입니다.
이 한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 세계는 하느님으로의 신앙을, 하느님과의 교류를 새로이 맺게 된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세 번째 아들인 셋, 그리고 그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서 예배한 겁니다.
깨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진 겁니다.
큰 사건이고, 성경에서는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구절이지만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어찌 보면 대를 이어 내려오던 하느님과의 그 불편한 관계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손주인 에노스에 의해 다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리고 이 에노스 이후 창세기에는 유명한 대홍수가 오기까지 9대 사이는 큰 사건도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그저 누가 누구를 낳아서 몇 년을 살았다는 얘기들이 쭉 나옵니다.
 
다만 우리들이 눈여겨서 봐야 할 것이 있다면 창세기 5장 21절에 보면 ‘에녹’이 나옵니다.
이 에녹은 카인의 아들 에녹과는 별개의 사람이죠.
아담으로부터 7대 후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에녹은 성경에 뭐라고 나옵니까? ‘죽었더라’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후에 선조들은 몇 년을 살다 죽었다 했지만, 에녹만큼은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죠.
이 에녹의 생애에 대해서는 단 한 절밖에 나오질 않지만, 애녹은 위대한 생애를 가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해 죽지 않고 하느님과 같이 승천하였을 것이다. 하느님과 동행했을 것이다.’
 
그러면 만일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의 생애를 누군가 한 줄로 기록해 준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기록해 줄 수 있을까?
‘그는 당대의 재물을 이루고 75세에 죽었다.’
아니면 ‘그는 누구누구와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고 95세에 죽었다.’
이렇게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스탕달과 같이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이렇게 적을 것인가?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우리들의 묘비에 쓰여야 할 말은 바로 이 말인 겁니다.
‘김웅열 신부는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
‘하느님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고 죽었다.’
나나 여러분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쓰여야 할 겁니다.
‘아무개는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
저도 언젠가는 죽겠죠. 그리고 성직자 묘지에 묻힐 겁니다.
저는 그렇게 해달라고 그럴 겁니다.
‘김웅열 신부는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
아니면 ‘김웅열 신부는 하느님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쓰이게끔 우리들의 생애는 아름다워야 할 겁니다.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 에녹으로부터 4대째인 노아의 시대에 하느님에게 슬픈 일이 생깁니다.
하느님은 이미 아담과 하와 때도 슬픈 일을 겪으셨죠.
그런데 노아 때는 아예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면서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작정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승천한 에녹의 신앙을 배운 사람은 노아 이외에는 거의 없는 어둠의 인간 세계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들, 네 번에 걸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오늘 이 네 번째 강의는 아마 여러 번을 들으셔야만 이해되실 겁니다.
그리고 에녹의 이야기 나왔죠.
다음번부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만큼 여러분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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