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女 한영이 막달레나(1783-1839), 부인, 참수형(56세로 1839년 12월 29일 형)
한 영희 막달레나는 일찍부터 성교의 진리를 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는 그에게 신앙의 길을 안내하였으니, 이는 결혼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 막달레나는 1840년 1월에 순교한 권진이(아가다)의 어머니로서, 일찌기 글과 글씨로 유명한 학자 권영좌의 후처로 들었다. 그 남편은 중년에 천주교에 뜻을 두고 아내에게도 권하다가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 가족들에게 천주교인답게 살라는 간절한 부탁을 남겼다. 막달레나는 이 권고에 따라 신자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며 살았다. 그는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서 어떤 신자 집에 몸을 의지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그 가난을 잘 견디어 나갔다. 훗날 순교하여 성인의 잘에 오른 그녀의 딸 성녀 권진이(아기다)는 나이가 어렸을 때 일찍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예절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너무나 가난하여 그녀를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그동안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바오로)의 집에 머무러 있었다. 어머니 막달레나로부터 교훈을 배워 왔던 아가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장점을 갖추었으며, 마음 속으로 수정(守貞)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신부에게 자신의 결혼을 파기(破棄)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신부로부터 이 파기를 허락을 받는 그녀는 그 후 신부의 집에 있으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는데 열심이었다. 그러나 유방제 신부는 이 어린 소녀를 범하여 당시 조선교회를 비탄에 잠기게 한 추문(醜聞)의 주범이 되었다. 후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이 사실을 알고 유 신부를 중국으로 축출한 후, 아가다를 열심으로 권면하여 다시 신앙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였다. 몇 해 후에 딸 권 아가다가 그의 친구 이 아가다와 함께 자기에게 피신하여 왔음으로 셋이 함께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북돋우고 신심을 닦으며 극기를 하였다. 한 막달레나는 그의 딸 권 아가타 또 이 경이 아가타는 배교자의 밀고로 7월 17일에 체포되었다. 포장은 그들의 성명만 물은 다음 막달레나 혼자만 옥에 가두게 하고 젊은 여자 3명(아가타의 친구와 여종 포함)은 이웃 집에 가두고지키게 하였다. 막달레나가 이를 수상히 여기고 있을 때, 배교자 김 여상이 그들을 따로 따로 찾아가 감언이설로 꾀어보기도 하고 엄포도 놓았으나 막달레나는 물론 아가다도 그를 꾸짖어 내쫓았다. 포장은 한 막달레나와 두 아가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특히 주리와 곤장의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들은 불굴의 인내로 그것을 참아 받고, 형조로 이송되어 새로운 신문과 고문을 당했으나, 첫 결심을 꾸준히 지켜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6명의 증거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한 막달레나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황석영 백서(帛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황사영은 경사동 청원 황씨로써 주문모 신부로부터 알렉산델이란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소문났고 1791년(17세 때)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다. 1898년부터 서울에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교리서를 복 사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그는 상복 차림으로 서울을 떠나 충청도 제천 부근에 있는 배론 신자촌의 옹기굴에 몸을 숨겼다. 그가 당시 교회의 한 중심인물임을 알게 된 김 대왕대비는 1801년 2월 29일에 교서를 내려 그를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주 신부가 순교를 하였고, 조선교회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태에 빠졌음을 보고 황사영은 그를 찾아온 황심 토마와 상의하여 조선교회 구제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이 상의하여 조선교회 박해의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교회를 위기에서 구해 낼 방법을 서술한 백서를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길이 62cm, 넓이 38cm되는 새하얀 명주에 한 줄에 11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 글자를 먹으로 쓴 긴 편지이다. 편지를 쓴 날짜는 양력으로 1801년 10월 29일이다. 이렇게 귀중한 밀서를 만들어 가지고 북경으로 가려고 하던 중, 불행히도 10월 22일에는 편지를 가지고 갈 예정이던 옥천희(요한)가 잡히고, 11월 2일에는 밀서의 책임자인 황심(토마)가 잡히게 되고 5일에는 황 사영 본인이 체포되었다. 황사영이 옷 속에 감추고 있던 백서가 관헌의 손에 넘어가서 여러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29세이던 황사영은 매우 흉악하고 극악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역적이라는 최명으로 그 시체를 여섯 토막으로 잘리는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그의 집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으며 모친과 처자는 멀리 귀양가게 되엇다. 백서의 내용은 1) 그때의 교세와 주 문모 신부의 활동 및 신유 대교난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가 씌어 있고. 2) 주 신부의 자수(自首)와 형벌에 관한 것. 3)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의 근본 건의책 등이다. 이 백서는 교회사와 한국에 귀중한 사료이다. 백서의 몇 줄을 소개하면, ".... 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둘 곳이 없이 길에서 헤매면서 소리도 체대도 내지 못하고 흐느껴 웁니다. 마음이 쓰리고 뼈가 아파,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주님의 전능하심과 ..."
<교훈> 이 뼈 아픈 난세에서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선조들을 본받아 우리도 교회 발전에 일역을 담당할 것을 다짐하고 스스로 역군이 되어 일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