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죽음의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제2화

작성자봄편지|작성시간24.04.18|조회수15 목록 댓글 0

죽음의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제2화 탈북민 수기 지 한 나 전도사 24, 2

드르르 드르륵... 육중한 크기의 무시무시한 전거리 교화소의 커다란 철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북한 공민 자격을 박탈당하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교화소에서 들어가자마자 나의 머리를 빡빡 깎였고 누더기를 기어 붙인 짝짝이 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수감 생활 3년 내내 이름이 아닌 죄수 번호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성과 존중을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화소 생활은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나 일을 할 때 나 총구가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하루는 교화소 길옆에 산이 세 개나 있는 것을 보고 여기는 눈도 안 오는데 무슨 산이 저렇게 있는지 궁금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것이 ‘뼈 산’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죽어서 뼈가 쌓여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믿어지기가 않아서 가까이 가보니 정말 사람의 굵은 뼈들이 쌓여 있었다. 어떤 사람들의 뼈인지 물으니 이곳 교화소에서 죽으면 이렇게 된다고, 너도 죽으면 여기에 오게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무섭고 낙심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땅에도 묻히지 못하고 여기 이 산이 되겠구나. 태어나서 이리 살다 죽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숨이 나왔다.

교화소 생활은 참으로 열악했다. 돌이 섞여 있는 강냉이밥 한 주먹과 썩은 양배춧국 같은 것이 우리의 한 끼 식사였다. 음식은 소금 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는데, 소금을 먹으면 다리에 힘이 생겨서 도망을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수감자들은 일하러 갔다가 산에서 솔잎을 뜯어오기 시작했다. 그 솔잎을 손에 비비고 돌에 찌어서 가루로 만들어서 밥에 넣어서 먹었다. 조금이라도 먹는 양을 늘리려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소화가 잘 안되다 보니 변비에 시달렸다. 교화소 수감자들 너도나도 변비가 와서 제대로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고통스러워하는 서로를 위해 서로의 대변을 나무 꼬챙이로 파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또 치질로 고생깨나 하기도 했다.

먹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의료 조치를 기대할 수 없다 보니 몸이 아파도 약을 쓰지 못하고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날 씨 탓에 열사병이 창궐해도 그것에 맞설 방법이나 약이 없었다. 다들 열병으로 고생하고 허약 (영양실조 -북한 교화소에서는 허약도를 측정하는데, 바지를 벗겨 놓고 엉덩이 사이의 넓이를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엉덩이가 약간 벌어지면 허약 1도, 엉덩이 넓이가 주먹을 세운 것이 들어갈 정도이면 허약 2도, 눕힌 주먹이 들어갈 정도이면 허약 3도이다. 허약 3도의 경우 생존 확률이 희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와서 고생하는데 나는 걸리지 않아 악종 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출소 만 기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나는 그만 건강이 악화하여 허약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몸무게가 27kg까지 줄어들었다. 몸에 힘이 없어서 걷지도 못 하고 기어다녀야 했다. 허약자 옷을 털고 소독한다고 벗으라고 해서 옷을 터는데 옷에서 쌀알만 한 이가 툭툭 떨어져 나왔다. 옷에서뿐 아니라 몸에서도 살이 곰보처럼 울퉁불퉁 해지고 쌀알만 한 이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 몸에서 벌레가 나온다고 하던데 내 몸에서도 그런 것들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 같이 수감생활을 하던 한 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한나야 너 살고 싶니?” “언니, 살고 싶어. 내일모레가 출소인데 살고 싶어.”라고 했더니 언니가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가 보니 그 곳은 죽은 사람들을 두는 사체실이었다. 사체실 앞에는 나처럼 허약에 걸린 사람 7명이 앉아있었다. 저기 앉아서 무얼 하나 봤더니 사체실에서 나오는 구더기를 잡아서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니는 내게 살고 싶으면 구더기를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먹지 못했다.

그런데 구더기를 먹은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허약이 퇴치되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는 교화소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고단백 음식물이 바로 구더기였던 것이다. 내가 도저히 그 구더기를 먹지 못하고 여전히 허약으로 힘들어하자, 다음 날 보안원이 나를 산으로 끌고 가서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내어서 구어 먹이기도 했다. 아무리 인간 취급 못 받는 죄수라도 교화소 안에서 죽으면 이를 처리하는 일이 번거로운 모양이었다. 뱀 고기도 먹었지만 몸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고, 나는 감방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렸다.

감방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참으로 고생스럽고 한스러운 인생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왜 이 세상에 낳았는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곳에 놔둘 바에는 차라리 낳지를 말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저 배가 고파서 중국에 갔다 왔을 뿐인데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나는 모든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환기를 시키기 위해 문을 살짝 열었는데 날이 매우 좋았다.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맑은 하늘에 신이 있다던데,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까?” 그리고 신이 정말 있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드디어 출소 날이 왔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서 출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3년의 감옥생활 동안 나를 면회 온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던 터라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 우리 고향에서 교화소에 수감될 죄수를 호송해 왔던 간부가 있어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인솔해 갔다. 고향에 도착한 나는 먼저 남편과 딸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미 남편은 새장가를 가고 집도 이사한 상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3년간 배우자가 부재하면 자동 이혼 처리가 되었다.

 

갈 곳이 없어진 나는 하는 수 없이 언니의 남편인 형부의 집을 찾아갔다. 당시 언니는 이미 탈북해서 한국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방에서 쉬고 있으려니 저녁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빠끔히 열고 보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사돈께서 내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영양실조로 며칠 못 가 죽을 것 같으니, 쌀을 모으고 관을 짜고 장례식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내 상태가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장례식을 준비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나중에는 산 사람을 묻으려 하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 집을 몰래 빠져나와 엄마 집을 찾아갔다. 힘들게 엄마를 찾아가면서 생각했다. 엄마와 형제들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만큼 오랜 교화소 수감 기간 동안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가족이 섭섭하고 분하고 속상했다. 어머니는 처음에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너무 삐쩍 발라내 몰골이 말이 아닌 탓이었다. 나는 엄마와 오빠들에게 내가 감옥에서 죽기를 바랐냐며 서러움을 토해냈는데 가족들은 내가 교화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시며 “나는 너를 이리 아이 낳았는데 어찌 이 몰골을 하고 나타났냐”며 한탄하시고 슬퍼하셨다. 짧은 가족들과 만남에 위로를 받았지만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한 20일을 그 집에 머물렀지만, 식량이 부족한 집안 사정이 눈에 빤히 보였다.

나는 집을 떠나 아는 친구 집을 전전했지만,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3개월 만에 다시 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2011년 2월, 친구에게 두부 한 모와 계란을 하나 사달라고 부탁하고 소금과 농약을 챙겨 두만강 어귀로 갔다. 우리는 여행길을 떠날 때 계란 하나와 두부를 먹는 풍습이 있는데 두부모와 계란처럼 매끈하고 안전하게 길을 지나가라는 일종의 미신이다.

 

농약은 혹시라도 잡히면 먹고 죽기 위해 챙겼다. 다행히 겨울이라 강물은 얼어 있어 전과 같이 빠져 죽을 위험은 없어 보였다. 조심조심 얼음을 타고 강을 넘어가는데 인근 화력발전소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 때문에 얼음 한쪽이 녹아 있어 물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고 끙끙대며 올라올 수 있었지만, 흠뻑 젖은 온몸이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추위와 싸우며 중국 쪽으로 넘어와 고향을 바라보니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곳…. 남편과 딸 얼굴도 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 가슴 아프고 고향을 아주 떠난다는 것이 가슴이 아팠지만 침을 세 번 뱉고 가지고 온 소금을 뿌리면서 죽어도 다시는 여길 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길로 나는 중국의 가족을 찾아갔다. 그런데 남편은 딸과 함께 산둥성으로 이사를 간 상태였다. 나는 이틀에 걸쳐 기차를 타고 산둥으로 넘어가 마침 내 남편과 딸을 만났다. 2살 때 떠난 딸이 이제는 6살이 되어 있었다. 몸이 상할 데로 상해있던 나를 딸은 알아보지 못하고 무서워 피하려 했다.

 

우리 엄마 가 아니라고 피하는 딸을 보니 내 인생이 너무나 고달프게 느껴져 딸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 왜 이렇게 인생이 고단하고 힘들기만 한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나는 다시 딸을 만난 기쁨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 가 있던 언니와 연락이 닿았다. 내가 북송 당한 것을 알고 맘속 깊이 나의 안위를 걱정했던 언니는 그 험한 북송길에서 살아왔구나 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나에게 한국에 오라고 권유했다.

탈북자로서의 처지도 그렇고 내가 한국에 오길 바라는 언니의 마음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나는 언니의 권유에 알겠다고, 가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자기를 버리고 간다며 우는 딸을 보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산둥에서 3년을 더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평안히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국에서 공산당의 큰 행사가 있다면서 집집마다 조선 사람을 잡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저히 떠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언니가 나를 도와줄 사람을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에서 인간의 탈을 쓴 승냥이라고 배웠던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아무리 조국을 떠났고 체제의 모순을 피부로 경험했다고 하지만,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 온 주체사상은 여전히 내 속에 가득했기에 “하나님을 믿는 곳”의 도움이라면 안 받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급박해졌고, 결국 자존심을 무르고 그들을 통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http://www.opendoors.or.kr/
전 세계 이슬람권, 공산권 교회, 성도 국제선교단체, 순교자, 중보기도, 세계기독교뉴스 제공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