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끄심 1~3화 - Ἀρχή 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1)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 이끄심 1화 - Ἀρχή 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1)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 나는 함경남도의 한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 다. 부모님은 출신 성분이 좋으셨고 당원이 셨고 흔히 말하는 충성분자였다. 아버지는 DMZ 군사분계선 최전방에서 특수부대원으 로 10년간 군 복무를 하셨고, 제대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동약관리소에서 간부로 일 하셨다. 어머니도 8년간 성실하게 군 복무를 하셨고, 제대 후 친지들의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나는 양가의 관심 속에서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대를 이을 남아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집살이를 많이 하셨다. 어 린 기억에 친할머니 댁은 큰 기와집이었고 할 머니께서도 항상 고풍스럽게 한복을 차려입고 지내셨다. 소위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이 었다. 그러다보니 대를 이을 손주의 존재가 중요했고, 아들을 낳지 못했던 어머니를 향한 타박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결국 아들을 입양했다. 그 친구가 우리 집 셋째 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셋째의 생김새가 우리 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서로 차별하지 않고 한 가족으로 잘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을 출산하셨다. 내가 9살 쯤 되었 을 때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갑자기 여러 명의 장정들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집안을 헤집어놓았다. 어머니는 바깥 볼일을 보시다가 길에서 붙잡히셨다고 했다. 너무나도 순식 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 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시 어머니는 출산 후 몸조리를 막 끝내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였다. 나는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 몹시도 궁금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 또 친척들 모두 어머니 에 대한 언급을 쉬쉬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한 어머니의 행방이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아 버지도 침묵하시고 가족 분위기가 싸해졌다. 어떤 친척들은 뒤에서 우리 어머니는 끝장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새 부턴가 나의 하루 일과는 “엄마 기다리기”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엄마가 오실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잠자리에 들 면서도 작은 문소리에도 혹시 어머니께서 돌 아오신 것인가 하고 벌떡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기근과 마주하게 되 었다. 그 무시무시한 굶주림은 우리 가족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꼬박꼬박 일터로 출근하셨지만, 제대로 된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집에 남아있는 우리는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가장 딱한 것은 아직은 너무 어린, 젖을 먹어 야 할 시기에 엄마를 빼앗긴 막둥이였다. 먹일 젖도 없고, 젖을 담아 먹일 젖병도 없었다. 아버지는 강냉이 국수를 푹 삶아서 죽으로 만들어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보기도 했 지만 너무 투박하고 거친 그 음식을 아이는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울었다. 일주일을 굶으니 문자 그대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기운이 없어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데 막둥이가 배고프다고 막 울면서 나한테 칭얼댔다. 그래도 어머니 없는 동안에는 장녀로서 동생들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업어서 달래기도 하고 물이라도 먹여보기도 하고 했지만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막내가 보채는데 내가 줄수 있는것이 없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칭얼대는 동생을 안아주기는 커녕 외면했다. 그리고 울다 지친 아이는 쓰려져 잠들었다. 그렇게 쓰러진 아이가 잠들었다고 착각하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따라 막내는 한번 울고난 이후로는 쭉 잠을 잤다. 밤이 되어 퇴근하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오늘 하루도 잘 버텼는지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막내가 너무 오래 자는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시면서 막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으셨다. 그리고는 아이의 상태를 이리 저리 확인하시더니 이내 한 숨을 푹 쉬셨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는 담요째로 아이를 둘둘 싸시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동생이 죽었다는 생각은 못하고 당연히 병원에 데려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 늦게 들어오신 아버지의 손에는 아이가 들려있지 않았다. 그렇게 막내는 이 세상 공기를 얼마 맛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고생하다가 깊은 땅 속에 묻힌 것이다. 그날따라 나에게 웬일로 크게 울며 칭얼대던 것이 막내에게는 마지막 안간힘이였을까? 나는 그렇게 남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꽤 오랜시간 동안 괴로워하고 힘들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나는 그저 죄인이 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의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우리를 보살필 마땅한 수가 없으 셨던 아버지는 우리를 외가댁으로 보내셨다. 같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에게 맡겨서 아이들만 기차를 태워 보냈는데 다행히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외가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외가댁에 도착한 우리를 보고 외할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미리 연락도 드리지 않고 아이들만 덩그러니 보내졌으니 누군들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나라 전체가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외가댁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노부부만 사시는 집인지라 적은 식량이나마 조금씩 아껴가며 그래도 살아 가고 계셨다. 그런데 뱃속에 거지가 사는 것 같은 손주 셋이 찾아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네 식량은 거덜나버렸다. 그래도 외할머니께서는 손주들 먹이시겠다고 산에 서 아직 설 여문 감자를 캐다가 먹이시는 등 갖은 애를 다 쓰셨다. 그렇게 여름을 그 집에 서 보냈다. 이런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점점 커져갔다. 어떻게 우리를 내버려두고 사라질 수 있는지? 어머니만 계셨다면 막내도 죽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혹독하게 벌을 주시는 걸까?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내버려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께서 혹시 돌아가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루 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고 밤마다 달님에게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 어머니께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신 것 이다. 오랫동안 바래왔던 어머니와의 상봉이 었지만 아쉽게도 그 순간은 기쁨과 반가움보다 씁쓸하고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오시자마자 막내를 찾으셨고, 막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으시고는 큰 충격 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오열하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반갑게 달려가 안기지도 못하고 어리 둥절한 가운데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 당시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잡혀가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외삼촌이 건네준 성경책 때문이었다. 외삼촌은 중국을 왕래하시면서 선교사 또는 기독교인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 이다. 외삼촌은 그분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달 러를 지원받고 성경책도 받아오셨다. 그렇게 받은 지원금과 성경책을 어머니에게도 건넨 것이다. 사실 고난의 행군은 어머니가 잡혀가 시기 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잘 몰랐지만 주변에는 이미 굶는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 께서 지원 받으신 달러가 있었기에 우리 집은 먹는 걱정 없이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외삼촌은 외숙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날도 외삼촌과 크게 다투 던 외숙모는 외삼촌이 수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당국에 고발해버리고 말았다. 외삼촌은 붙잡혀 심문을 받았고 가택 수색을 당했 다. 그리고 결국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발각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수상한 책이 우리 어머니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서 어머니도 붙잡혀 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어머니는 성경책을 돌돌 싸매어서 외진 곳 벽 귀퉁이 틈 사이에 꼭꼭 숨겨 놓으셨는데 그 덕분인지 철저한 가택수색에도 발각당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보위부의 수사와 고문은 지독했다. 성경책의 실물이 발견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혐의를 인정하라고 거의 2년에 가까운 기간을 괴롭히고 고문했다. 만약 어머니께서 숨겨놓으셨던 그 책이 발견되 었었더라면 본인 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온 가족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아니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죄라도 억 지로 자백했다면, 혹은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이라도 알고 있어서 유도 질문에 걸려들었다면 어머니는 꼼짝없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시거나 사형당하셨을 것이고 우리 가족도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문 속에서도 어머니가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셨던 이유는 본인의 목숨 보다는 남아있는 우리들에게는 그 피해가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 문이셨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성경책이라는 것에 대해 보거나 들어볼 일이 없었다. 다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사상 교육은 철저하 게 이루어졌다. 학교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군과 합세해 주민들을 죽이고 빼앗았다고 배웠다. 교회는 사람 잡아먹는 집단이고 교회와 관련된 어떤 것이든 나쁜 것이라고 배웠다. 그만큼 북한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은상상을 초월한다. 그 책을 전달받았다는 혐의가 씌워진 순간 어머니의 그간의 모든 충성과 헌신은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말았다. 죄를 자백하라는 보위부의 압박은 상상 이상이었다. 원래 당원이었고 성분이 좋았던 어머니였지만 그 혐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셨다. 고문이 동반된 심문은 물론이고 제대로 누워서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좁은 독방 에 수감되어 있으셨다. 이렇게 오랜 기간 심문을 진행했지만 어머니로부터 더 이상의 혐의점은 찾지 못했고, 원래 성분도 괜찮은 편 이셨던 데다가 외갓집에서 온갖 방면으로 손을 쓰셔서 어머니는 겨우 살아서 출소하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몸 상태가 너무나 악화되어 매우 허약한 상태였기에 친척 집에 서 한 달 가량 요양을 하시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막내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시면서 우셨던 어 머니는 한참 후에 정신을 추스르시고 우리를 앞에 앉히셨다. 그러고는 “그 동안 너희들이 너무 고생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고생시키지 않겠다. 엄마가 꼭 고생한 만큼 갚아주겠다” 고 비장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의 퀭한 얼굴이 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곁을 지키지 못했는지, 무슨 사정이 있 어서 우리를 버려두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 다. 그래도 어머니가 돌아오시고 우리 가정 이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면 좋았었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어머니는 당원에 충성분자 였던 아버지와 뼈대 있는 집안의 시댁이 겨우 어린 아기 하나 돌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넘어 큰 분노를 느끼 셨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버리시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내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로 치닫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 가족은 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몇 년 사이에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 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방황했지만, 여러 세 월의 질곡을 겪고 그 당시 부모님의 나이가 된 지금은 그 아픔이 어머니나 아버지의 탓이 아님을 안다. 바로 우리 부모님께서 충성하 셨던 북한과 그 체제가 우리 가족을 덮친 절망의 주요 원인이었다. 성경책 한 권 때문에, 그것도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빌미로 아무런 정당한 절차 없이 어 머니를 체포하고 고문했던 그 악랄한 인권 유린과 박해, 그리고 가장들을 직장에 매어놓고 통제하는 시스템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지 못하시고 제대로 배급도 나오지 않는 직 장에 꼬박꼬박 출근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아버지... 막내의 죽음과 가족의 깨어짐은 그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그렇게 충성분자로 살아온 우리 부모님의 믿음을 철저 하게 배신하였다. 사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은 모든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어왔던 지도자와 당에게 배신을 당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외삼촌이 왜 우리 어머니에게 그 성경책을 건 네주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외삼촌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신자가 되었고, 어머니에게도 그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 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 위험한 책을 굳이 어머니에게 건네진 않았을 것 같다. 돌이 켜보면 이후에도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왔고 그 속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도 있었지만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하나님 의 자녀로 살게 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어릴적 어머니에게 건네진 성경책도 단순한 비극와 고통의 원인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의 표지였을지도 모른다. 선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은 그렇게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를 찾아오셨다. (계속) ------------------------------------------------------------------------------------------------------------------------ 이끄심 2화 - Ἀρχή 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2)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2 고난의 행군이 시작이 된지도 어느덧 수 년이 지난 그 해, 부모님 두 분은 결국 이혼을 하셨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어머니가 책임지셨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 팔베개를 하고 책을 읽어주시기도 하며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아버지를 향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다. 나는 동생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일주일에 한번씩만 동생들을 보러 갔다. 하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살아오셨던 아버지는 제대로 된 배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고지식 하게 배정된 직장에서 일하셔야했고, 그러다 보니 나 하나도 부양하기 힘드실 정도로 형편이 어려우셨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 하시며 나를 어머니에게로 보내셨다. 출소하고 돌아오시면서 우리에게 “고생한 만 큼 갚아주겠다.” 약속하셨던 어머니는 그 약속을 기어이 지켜내셨다. 사업수완이 좋으셨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 후 우리를 데리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동해에서 나오는 특산품(명태, 털게, 낙지 등)을 중국으로 판매하고 중국의 밀가루와 옥수수를 사 오는 중개업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셨다. 나라 전체가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이 굶어죽는 시기였지만 우리집 창고는 늘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도 밥을 배부르게 먹을 뿐 아니라 당시 살던 귀국자 아파트에서 이 웃과 함께 농마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잘 만드시던 깨송편이나 생태나 오징어로 요리한 순대등 여러 별미도 종종 해먹었 다. 남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평안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집 밖의 상황은 심각했다. 우리 학교는 지역 명문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친구가 밥을 먹지 못해서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그나마 싸온 아이들도 누가 훔쳐 먹을까 몰래몰래 음식을 먹었다. 당시 어머니는 내 도시락을 쌀 때 항상 선생님의 도시락도 싸주셨는데, 선생님은 집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 그 도시락을 드시지 않고 늘 집에 가져 가시곤 했다. 나중에는 결국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이 완전히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나도 분위기상 도시락을 챙겨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점심시간에는 집에 달려가서 밥을 먹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밥 먹었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기에 나는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밥 대신 강냉이 국수를 먹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이 반장인 나에게 며칠째 학교에나오지 않는 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반장과 둘이서 그 친구네 집으로 갔다. 학급 동무네 집은 언뜻 봐도 새까맣게 불에 타 있고 그 친구는 없었다. 그 집 앞에서 하염 없이 기다리던 중 드디어 친구를 봤는데 그 사이에 친구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변해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놀라 뒷걸음질 을 치는가 싶더니 애써 태연한 척 다가왔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같이 학교에 가자고 했다. 그 친구는 나더러 뭘 알겠냐는 표정으로 “학교는 배부른 애들이나 가는 곳이지”라며 자신은 학교에 가지 않을 것이니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친구도 없이 돌아가면 선생님께 혼날 것 같아 그 자리를 쉽게 뜰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그 친구를 몇 번을 더 찾아갔는데 그 친구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게 되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질병으로 약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굶주림에 허약으로 돌아가셨고 친구는 어느새 부턴가 꽃제비가 되어 기차역에서 다른 꽃제비들과 함께 승객들에게 물을 떠다 팔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안계시면 이렇게 되겠구나 생각 하며 전에 어머니가 붙잡히셨던 그 때를 떠올렸다. 성경책 소지 혐의로 어머니께서 끌려가셨던 2여년 동안 나도 살기위해 안 먹어 본 것이 없었다. 방학에 외할머니댁 밭에서 엊그제 막 심어 놓은 감자알갱이까지 다 캐서 먹었고, 한 여름에는 먹을만한 풀뿌리도 없어서 외할머니와 함께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오기도 했다. 그렇게 벗긴 소나무 껍질을 뜨거운 물에 삶고 또 절구에 찧어서 옥수수 가루 한 줌과 함께 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먹고나서 한동안 변비로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배에 가스가 차올라 외할머니가 나무꼬챙이를 들고 나를 따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성공으로 풍족하게 지내고 있지만 어머니께서 안계셨다면 나도 친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의 풍요와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막내 외삼촌은 어머니가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다고 한다. 이사 후 오랫동안 다른 가족과 교류가 없었는데, 어머니와 남달리 우애가 좋으셨던 그 막내 외삼촌께서 수소문 끝에 우리 가족을 찾아오셨다. 두 분은 얼싸안고 기뻐하며 우셨다. 그동안 제대로 된 끼니조차 못했을 남동생을 위해 어머니는 한상 부러지게 솜씨를 발휘하셨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후에 외삼촌은 한참을 뜸들이더니 어머니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출소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도 그 충격으로 쓰려져 큰집이 모시고 있다 는 것이다. 게다가 외할머니 상태가 점점 더 악화하여 치매 증상이 나타나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하셨다. 삼촌은 이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려 수없이 보낸 전보와 편지를 부치셨지만 어머니에게 닿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시던 아버 지께서 돌아가신 소식조차 모르고,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큰 죄책감에 빠지셨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차마 믿을 수 없으셨던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해 달라고 외삼촌에게 부탁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본래 늘 단정한 몸가짐을 유 지하셨고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신 분이셨다. 그렇지만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움은 노인들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다가 왔고, 연세 많은 두 노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식들이 가져다주는 식량과 물품을 아껴 써가며 삶을 연명하는 것 뿐이었다. 그마저도 며느리들이 계속된 눈치 속에서 외할아버지는 늙은이가 짐짝이 되기 싫으시다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냐는 말씀을 외할머니께 자주 하셨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열심히, 남부끄럽지 않게, 올곧게 살아오셨기에 기나긴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고 추한 모습을 보이길 원치 않으셨던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거두셨다. 이 사건으로 외할머니께서도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셨고 치매를 앓게 되셨다. 외삼촌이 찾아와서야 이런저런 소식을 듣게 된 어머니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무고한 심문과 고문, 수감생활을 딛고 이제는 당과 조국에 의지하지 않겠노라며 오직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 성공을 위해 이제껏 달려왔건만 결국 부모조차 챙기지 못한 처지가 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나 몰라라 하는 이 나라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일어났다. 그렇게 남동생을 붙잡고 한참을 목 놓아 우셨다. 부모 의 비통한 소식에 제 정신이 아니셨던 어머니는 끼니도 못 드시고 잠도 못 주셨다. 어머니의 마음은 온통 어둠과 같은 슬픔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마도 그런 슬픔 속에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당과 조국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왔었는지,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로부터 당과 조국을 비방했다는 명목으로 고발을 당하여 보위부로 끌려가셨다. 어머니는 철저하게 혐의를 부인하셨다. 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 온 것이냐, 나라에 충성 한 죄밖에 없다고 잡아떼셨다. 그러자 심문관은 당과 수령을 비판했다는 내용이 적힌 밀고서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24시간 재우지 않고 물고문을 자행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에 차 있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누군가가 거짓 증언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일방적으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고문하느냐고 항변하며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내 앞으로 직접 데리고 와보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어머니가 잡혀가신 줄도 모르고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보위부 위원이 아파트 입구에서 인민반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보위원이 내게 어머니가 갖고 있어 야 할 집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한동안 사정이 있어서 못 오시니 맏이가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며 격려하고 떠났다.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듯이 말하는 그였지만 사실 그는 우리가 없는 사이에 어머니의 혐의점을 찾기 위해 이미 집을 한바탕 수색한 뒤였다. 이미 한 차례 어머니가 안 계셨던 경험이 있었기에,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씩씩하게 동생들을 보살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살림을 잘했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밥을 지을 때 입쌀보다는 강냉이 쌀을 더 많이 섞고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며 알뜰하게 살림을 지켰다. 그러다가도 한 밤 두 밤 지나갈 때마 다 혹시나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가슴 졸였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두려움과 무서움에 토끼눈을 하고 나만 바라보는 동생들 몰래 눈물 을 훔치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불면증이 그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다행히 일주일 만에 어머니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혐의의 입증이 어렵고 어머니께서 사업을 하시면서 평소에 관계를 잘 만들어 놓으신 것이 도움이 되셨던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온갖 멍으로 말할 수 없이 엉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머니는 확고하게 깨달으셨다. 아무리 돈을 벌고 성공해도 자유가 없는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맘 놓고 울지도 못하는 나라, 인간에 대한 어떠한 존엄과 존중도 없는 나라,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나라, 그래서 최악의 끝에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 나라 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확신하게 되셨다. 이러한 확신은 지난번 성경책을 소지했다는 의혹으로 2년이 가까이 심문과 고문으로 고통 받았던 일과 함께 어머니의 나라 에 대한 충성심을 모조리 꺾어버렸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오늘부터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말씀하셨다. 그중 첫 번째는 아무리 친한 친구도 집에 데리고 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어딜 가더라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꼭 집에 와야 한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집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의심하지도 말고 밖에서 어른들이 어머니에 관해 묻거든 잘 모르겠다고만 하라고 우리들의 입을 주의시키셨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 있던 식기류들부터 시작하여 식기장, 옷장, 텔레비전까지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다가오는 겨울 방학에는 우리들은 뵌 적 없는 친척집으로 여행을 갈 것인데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의 단짝 친구인 영희한테도 말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매번 방학이면 단짝 친구인 나와 영희 는 방학 숙제도 함께 했었고, 일기와 두 달 치 방학 숙제를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끝내고 서로가 점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에는 수영하러 다녔고, 산천어와 메뚜기 잡 으러 다녔고, 이번 겨울에는 목도리랑 손 장갑 을 뜨개질해서 만들어 서로에게 선물하기로 했고, 그 장갑을 끼고 눈썰매 타러 가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이미 방학 동안 알차게 보낼 시간표를 마쳤던 나는 참 속상했고 영희에게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영희에게 혹여나 잠시 어디 다녀오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주면 꼭 영희가 갖고 싶어 했던 머리 핀을 선물로 주기로 하고 친구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렇게 결전의 날이 밝았다. 달님도 깊이 잠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우리를 깨우셨다. 그리고는 아직 눈을 비비고 있는 우리에게 여려 겹으로 옷을 단단하게 입히셨다. 어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내복을 입는데 내복이 좀 무거웠다.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미리 나의 내복 옷깃에 자그마한 금덩어리들을 넣고 꿰매 놓으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떤 의중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상황의 엄중함과 중압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겹겹이 옷을 껴입은 우리 삼남매에게 어머니는 각자 책가방과 보자기로 묶인 짐을 챙겨주시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준비성은 철저했다. 미리 준비하신 여행증과 통행 등 많은 뇌물이 들어갔을 절차를 미리 완료해 놓으셨다. 심지어 방학 기간에 선생님의 허락 을 받아 여행 학습을 하러 간다는 증명서까지 챙겨놓으셨다. 우리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계속) --------------------------------------------------------------------------------------------------- 이끄심 3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1)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3 나는 그 긴 여정에서 많은 것을 듣고 보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역전에서 온 가족이 쭈그려 앉아 잠을 청했다. 씻기 위해 돈을 주고 물을 사면서 참으로 세상이 삭막해졌구나 하고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메고 있는 가방 속 내용물이 전부 간부들에게 먹일 뇌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담배 몇 보루를 들이밀고 간신히 열차에 올라탔지만 기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전기 사정은 너무나 열악하여 기차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다. 출발하지 않는 기차에서 출발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던 것이 여러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먹고살기 위해 장사 길에 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 머리 위를 밟고 기차에 올라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에서 기차는 그야말로 아우성과 구타가 난무하는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그렇게 더는 사람을 태울 수 없을 즈음에야 기차는 비로소 출발하였다. 미처 열차표를 구하지 못하고 뇌물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차 지붕으로, 기차 밖에 계단으로, 혹은 간신히 창문에 매달리기도 했 다. 그러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들, 추워서 얼어 죽는 사람, 허리를 펴다가 전기선에 치여서 죽는 사람 등 너무도 많은 사고가 발생 했다. 기차안 민심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어둠 속에서 구타와 쌍욕이 오갔다. 우리는 열차가 큰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내려야 했다. 여관에 들러서 씻고 식사 한끼 사먹으려고 장마당으로 갔다. 기차에서 배고픔에 시달린 동생과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두부밥이 너무나 먹고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삼켰고,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기꺼이 그 밥을 사주셨다. 너무나 기쁜 그때, 두부밥을 파시는 아주머니께서 하신 "소매치기한테 조심하세요"라는 말에 "네?" 라고 되묻는 사이, 그만 뒤에서 다가온 꽃제비 소년이 두부밥을 낚아채서 도망갔다. 신기할 정도로 뼈만 앙 상하게 남은 그 아이들은 도망가면서도 훔친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며 달렸다. 두부밥 맛을 보기도 전에 꽃제비 소년에게 빼앗겼을 땐 너무 놀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소매치기가 도망간다는 소리를 들은 어떤 아저씨가 여동생의 두부밥을 낚아챈 꽃 제비 소년의 뒷목을 잡고는 때려 주었다. 그 아이가 장사꾼 사람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우리는 울면서 때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 장마당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렇게 맞는 와중에도 그 아이는 손에 묻은 밥알이 하나라도 더있나 살피며 손을 핥았다. 그렇게 우리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기차와 함께 길바닥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질 무렵에야 드디어 양강도 혜산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외지인으로서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어머니는 친척을 찾고 있다고 여관 주인에게 둘러대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말 친척 집에 가는 줄로만 알았다. 낮에 어머니를 따라 압록강 강변에 나가보니 아주머니들이 압록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강가 주변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 전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강가로 내려갈 수 있 다고 했다. 나는 어렸기에 얼음길을 왔다 갔다 하며 놀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더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소상히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쪽과 저쪽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며 빨래 사이에 몰래 무언가를 서로 건네주고 받는 것을 관찰했다. 중국 쪽에서는 대야에 비닐에 싼 돈뭉치와 설탕, 하얀 비누 등을 넣고 빨래로 덮어서 보내면 북한 쪽에서는 슬 쩍 대야를 끌어다가 미리 준비한 구리, 사금 그리고 알수 없는 물건을 싼 봉투 같은 것을 넣어서 자연스럽게 실수로 물에 떠밀려 간 것처럼 보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며 마치 나를 원래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였다. 그러고는 대충 빨래를 마무리하고 군인 아저씨들에게 그만 간다고 하면서 주머니에 돈과 담배 한 보루를 찔러 주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떴다. 나는 이 재밌는 광경을 어머니에게 신나서 조잘조잘 설명을 해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사뭇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셨다. 우리는 매일 밤 압록강으로 나갔다. 어머니께서는 곤히 자는 우리를 깨워서 조용히 옷을 입혀주셨고, 우리는 아무 소리 않고 옷을 입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강가에서 우리는 숨죽이며 도강할 기회를 엿보았다. 영하 30도가 넘는 기온과 두 볼과 귀를 째는 듯한 칼바람이 우리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그렇게 눈 속에 몸을 쭈그린 채로 밖을 살피고 북한 군인들이 지나가면 숨기를 반복하다 돌아오기가 여러 날이었다.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와서 친척 집에 간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머물러 있으니 여관 주인이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친척이 이사했는지 집 주소가 잘못되어서 알아보고 있다고 둘러대셨다. 우리도 정말 친척집 주소가 잘못 되어서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왜 매일 밤 강변에서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강 건 너편을 바라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께서 뭔가 큰일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우리는 강변에 잠복하였다. 총을 맨 군인들이 2인 1조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그 밤, 남동생은 춥고 졸린다며 칭얼거렸고 어머니는 그런 남동생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탕탕" 총소리가 났다. "도강자다!!" 라는 외침과 함께 총을 쏴대는 소리가 들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총 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눈을 크게 뜨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총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어떤 젊은 한 여성이 얼어붙은 압록 강을 가로지르며 헐레벌떡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고 있었다. 한동안 총소리가 이어지고는 군인들이 화를 내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놓친 것이었다.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날의 총격을 목격하시고 좌절하셨다. 혼자 강을 건너는 것도 이렇게나 위험한데 애들 셋을 데리고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는 아침 일찍 짐을 싸 서 여관을 나와 북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 삼남매는 드디어 친척을 찾았나보다 하고 들뜬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어머니는 압록강 강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셨고, 보천군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셨다. 어머니께서는 혜산에서의 도강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시고 압록강 상류로, 더 깊은 산악지역으로 이동하셨던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그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로 마을 주민들도 얼마 없고 먹을것도 넉넉지 않았다. 혜산에서는 장마 당에 나가면 먹을 것이 많았고,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걸 사먹을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몇날 며칠을 하루 두 알 감자만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그러는 가운데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해가 바뀔 즈음이 되었다. 여전히 밤마다 강변을 살피기를 반복한 우리 가족에게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도 아침부터 온종 일 끼니를 거르고 허기진 상태였지만 밤하늘 에 뜬 달은 밝고 환하게 빛났다. 이곳은 시골이라 그런지 혜산만큼 군인들이 많지 않았고 보 초를 서는 군인들도 경계가 조금은 느슨한 편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붙잡고 비장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서윤이는 지금부 터 엄마 말을 명심해 들어라. 지금부터 네가 먼 저 강둑 밑으로 내려가서 짐을 받고 그다음 동생들을 받으렴. 마지막으로 내가 내려갈게."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나를 강둑 밑으로 보냈다. 순간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졌다. 아파할 사이도 없이 동생들이 후드득 내려 오는 걸 받아야 했고 짐도 연달아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내려오셨다. 어머니는 몸을 낮추어 주변을 살피시고는 조용히 우리에게 "하나, 둘, 셋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저기 보이는 산까지 뛰는 것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라고 하셨다. 우 리 남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구령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길 을 헤치며 달렸다. 뒤에서 누가 내 목덜미를 잡을 것 같은 오싹함에 걸음아 나살려라 하는 마음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무릎까지 쌓여 있는 눈을 가로지르다 보니 달린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우리는 네 발로 기어가는 꼴이 되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발견하면 우리 가족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 추운 밤 그렇게 매서운 바람이 부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마에서 땀이 후드득 떨어졌고 몇 겹씩 껴입은 옷이 젖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어가다 누가 볼세라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침내 강을 건넌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우리들의 눈썹에는 눈꽃이 새하얗게 피어있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우리의 신분을 들킬만한 모든 증거물을 즉시 태우셨다. 불타는 증서들을 보며 나는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다시는 내 단 짝 친구 영희도, 그리운 아버지도 만날 수 없겠구나.' 차가운 눈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었지만 내 볼 위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중국으로 넘어온 그날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쉴 새 없이 터지던 폭죽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중국에서는 풍습에 따라 춘절(음력설)을 기념하여 폭죽을 밤새 터트렸다. 어느새 집 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 해가 바뀌고 음력설을 맞은 것이다. 사방에서 들리는 폭죽소리는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더 괴로운 것은 폭 죽이 터지고 난 뒤의 화약 냄새였다. 그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하루 종일 굶은 빈속이었는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폭죽 터지는 소리와 구역질나는 냄새, 여기저기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우리는 중국 땅에 입성하였다. 엉겁결에 중국 땅에 왔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막막했다. 땀으로 범벅되었던 몸은 영하 30도가 넘는 날씨에 금세 동태처럼 얼어붙었고, 피곤함과 배고픔이 더해지면서 생각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나마 배고픔은 참는다고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피곤은 이길 수 없었던 우리는 마침 인적이 없는 한 초막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라고는 없는 그 초막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스르르 달콤한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자고 있는 우리 가족을 보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이 싹 달아났다. 멀리서 봐도 좋은 의도로 우리를 쫓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우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도망갔다. 한참을 달렸지만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끝까지 따라 왔다. 우리를 잡으려고 쫓는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치고 나서야 우리를 쫓던 인기척이 잦아들었다. 숨차고 놀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언제라도 다시 잡혀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함을 동물적으로 알게 되었다. 낮에는 산 속에 몸을 숨겼다가 밤에만 걸었다. 그렇게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줄지어 걷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길옆 비탈로 나뭇가지를 붙들고 몸을 피했다. 그리고 모든 소리와 불빛이 사라지면 그제야 다시 길가로 기어 올라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산을 하나 넘고 또 마을을 지나고 다시 산을 넘었다. 우리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먹을 것을 구하기도 마땅치 않았고 추위도 큰 난관이었다. 눈밭을 해치며 걷는 동안 발은 꽁꽁 얼어붙었고 매서운 칼바람까지 휘몰아쳤다. 하필 그 날은 눈이 억수로 내렸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쳐 왔다. 눈이 거의 1미터 가량 쌓 였는데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는지 주변에 마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발은 꽁꽁 얼어 붙어 동상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고, 눈보라 때문에 눈이 떠지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던 찰나에 건너편 산 중턱에서 조그마한 불빛이 반짝였다. 그 희미한 불빛은 우리 가족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고,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죽게 생긴 일가족을 살려주신 구원의 불빛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그 불빛을 향해 갔다. 오두막 안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차마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 한 참을 문 하나를 두고 우왕좌왕하면서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던 찰나, 문이 열리면서 러시아식 털옷과 털모자를 쓴 할아버지 세 분이 사람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사냥총과 횃불을 들고 나오셨다. 그 모습을 본 우리도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횃불로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신 그분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밭을 해매는 엄마와 어린 아이 3명이었다. 오밤중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오도 가도 못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본 그분들은 우리를 딱하게 여기시고 오두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 오두막은 산에서 참숯을 만들기 위해 일꾼 들이 쉬는 공간이었다. 자그마한 오두막은 참 포근해서 하룻밤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덜덜 떨고 있는 우리에게 그분들은 자신들이 쓰시던 담요를 덮어주셨다. 우리 가족은 그 담요를 덮고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우리에게 할아버지들은 중국식 배추절임과 돼지고기를 잘게 다져 넣고 끓인 입쌀죽을 한 그릇씩 퍼 주셨다.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음식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 뜨거운 죽을 게눈 감추듯 후루룩 마셨다. 아직도 그때 먹었던 그 죽을 잊을 수 없다. 다시 찾아보라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그 오두막집, 그리고 우리에게 하룻밤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친절을 베푸셨던 할아버지들... 얼마나 감사한지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그 곳에서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얼어죽었을 것이다. 여정이 길어지니 점점 요령이 생겼다. 이제는 낮에도 인적이 없으면 길을 따라 걷다가 오토바이나 차 소리가 들리면 다시 눈속이나 비탈로 몸을 숨겼다. 우리에게 숙소는 산 전체였고, 우리의 침대는 눈덮인 산속이었으며, 목이 말라 마시는 물은 하얀 눈이었다. 그러다 얼어죽을 지경에 놓였다 싶은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 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몸을 녹여줄 비어있는 초막집을 만났고 잠깐씩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그 중 한 과수원의 초막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초막집의 천장에는 주렁주렁 씨앗이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 씨앗이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의 것을 함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건드 리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그 씨앗들은 봄이 되면 밭에 뿌릴 씨앗으로 약을 쳐놓은 상태들이 었다. 그 때 배고픔에 못 이겨 그 씨앗에 손을 대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한참을 앉아 쉬고있는 그 때 문이 열리며 그 과수원 주인과 그 아들이 초막집에 들어왔다. 그 부자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집주인은 끝까지 중국말로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지만 옆에 선 이제 막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은 더듬더듬 조선말을 써가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기도 하고 아버지를 설득해 우리를 도와주자고 했다. 우리가 허기진 모습을 본 그 집 아들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우리에게 내 주자고 보챘다. 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내어주며 빨리 먹고 가라고 손짓하셨다. 우리는 고마워하며 받은 도시락으로 요기를 하고 그들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 아저씨는 우리가 행여나 그곳을 떠나지 않고 다시 올까봐 불안했던지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종종 마주하는 따뜻한 도움의 손길 덕분에 우 리의 여정은 계속될 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 픔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혔다. 어느 날은 우리 가족 모두 배가 너무 고프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잠깐 누우면 눈 속에 파묻히게 되고 그 상태로 깊이 잠들면 동상으로 얼어죽는다며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깨우셨다. 여동생과 나는 그래도 이 악물고 걸었지만, 이제 갓 6 살인 남동생은 잘 걷지도 못했다. 춥고 배고프고 발도 아프고 안 아픈 곳이 없다며 남동생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칭얼거렸다. 이대로는 그 누구도 한 걸음조차 움직일 수 없음을 아셨던 어머니는 뭐라도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고 결심하셨는지 어린 나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 가셨다. 그리고 대문이 열려있는 한 집을 기웃 거리셨다. 마침 개 짖는 소리에 집주인 아저씨가 나오셨다. 아저씨는 깜짝 놀라 중국말로 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와 나는 손짓 발짓 다 해 가며 배고픈 시늉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는 숨겨놓으셨던 100위안을 꺼내서 아저씨에 게 주시고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의사표시를 하였다. 한참 돈을 빛에 비춰보다가 우리의 몰 골을 쳐다보시던 아저씨는 곧 부엌에 들어가시더니 만두 두 개를 가지고 오셨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마도 본인의 식사를 위 해 준비한 음식인 듯 했다. 아저씨는 그 만두를 우리에게 건네시고는 돈은 받지 않으시고 어서가라고 손을 내저으며 우리를 내보냈다. 처음 보는 만두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나는 배가 불러왔다. 동생들이 있는 산속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만두를 4등분해서 나누어 주셨다. 나는 한 조각은 입에 넣고 다른 한 조각은 아껴 먹으려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그 만두 한 조각의 힘을 빌어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남조선으로 정해져 있었다. 중국에서 정착해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남조선에 가기위해 길림성 길림시에 있다고 하는 대한민국 영사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떠난 것이 전부였다. 요즘에야 내비게 이션이나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으며 자동차로 이동한다면 하루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24년 전의 우리는 길이 보이면 무 작정 그 길을 따라 걸었고, 그렇게 수많은 밤 을 헤매고 또 헤맸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들 왼편에는 압록강과 북한이 계속 보였다. 언제든지 북한의 군인들이 강을 건너와 우리를 붙잡아 갈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함부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잠을자곤 했다. 어머니와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특히 이제 여섯 살 정도 된 어린 막내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더 이상 지쳐서 못 걷겠다는 남동생을 어머니께서 등에 업고 발길을 재 촉하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어머니도 힘드시기는 마찬가지였고 설상가상으로 험한 길을 걸으며 신발도 다 해어졌다. 어머니 발바닥은 찢어져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고 갈라진 밭고랑 마냥 속살이 보였지만 챙겨온 실과 바늘로 찢어진 발바닥을 꾀매는 것이 어머니가 할수있는 조치의 전부였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남동생은 이제 자기를 그냥 산에 버리고 가라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엄동설한에 변변한 신발 하나 없이 앙상하고 조그마한 발로 험한 길을 걸어온 동생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이해가 되었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키는 어머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어머니는 남동생더러 알아서 오라며 내버려 둔 채 저만치 앞으로 가버리셨다. 나는 진짜 엄마가 남동생을 두고 가시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남동생이랑 울었다. 그리고 조금만 힘내보자며 남동생을 달랬다. 그렇게 한 참을 울던 남동생은 나의 다독임에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가신 엄마를 따라 가려고 부지런히 걸어갔다. 한참을 걸으니 저 앞에 어머니께서 그렇게 멀리가지 못하시고 나무 옆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피곤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오고 갔지만 어찌 그것이 진심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다시는 모진 말 하지 않고 버리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에게 사과하셨다. 그리고 다시 재정비를 하고 힘을 내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아... 아까 먹었던 만두를 하나만 더 먹었으면 힘이 날 텐데...” 하며 중얼거리셨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배가 고파와 침을 꼴깍 삼 켰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껴놓은 만두 조각이 손에 잡혔다. 손에 잡힌 그 만두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만 두!" 하며 꺼내드렸다. 어머니는 내 손에 든 그 만두를 보자마자 누가 뺏어먹을새라 순식간에 삼키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그렇게 빨리 드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신도 어찌그리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는지 상상도 못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어머니는 한참을 나의 빈 손을 보시다가 아껴놓은 만두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에 놀라 눈물이 글썽하게 고인 나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셨고, 무안하게 들고 있는 내 손을 쏙 잡으시고 고마워 하셨다. 여전히 어머니는 그때 그 만두를 이야기하시며 나에게 미안 하고 고마웠다고 이야기하신다. 그 만두 한 조각이 어머니를 걷게 하는 힘이었으며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끝까지 지키며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돕는 큰 격려였다고 한 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금 서로를 격려하며 꼭꼭 뭉쳐 한 마음 한 뜻으로 걸을 수 있었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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