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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7~9화 -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 탈북민 수기

작성자봄편지|작성시간26.06.15|조회수4 목록 댓글 0

이끄심 7~9화 -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 탈북민 수기

 

이끄심 7화 -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7

북한 보위부 수감시설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제대로 된 식사가 공급되지 않는데다, 탈북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좁은 공간에 모두가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자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낮에는 벌을 서듯이 서있어야 했고, 그로 인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하루를 만들었다. 또한 긴 침묵 속에서 조사실로 불려나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몇 차례의 모진 조사를 견디고 다행히 단련대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여동생은 어릴때 부터 몸이 약한 탓에 북한까지 끌려오면서 식사를 거의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몸무게가 30킬로에 불과한 여동생은 장티푸스로 인해 상태가 급격히 쇠약해졌고 약 하나 처방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매우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보위부 조사를 끝마치고 온성에 있는 노동단련대로 이동해야 했다. 여동생은 나와 어머니에게 시체처럼 이끌려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그곳을 나왔다. 단련대에서는 정신교육과 육체노동이 함께 시작되었다.

외워야 하는 규칙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40가지가 넘는 조항을 다 외우고 조별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조에서 한 사람도 틀린 사람이 없어야지만 방에 들어가서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나갔다. 옥수수나 벼를 추수하기도 하고 벽돌을 나르거나 미장을 돕는 등 건설 현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가운데 어머니께서 그 곳에서 여성 수감자 총 책임자가 되셨다.

책임자가 되면 단련대 안에서 여성 수감자들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외부로 동원되어 일하는 날에는 이탈자나 도망자가 있으면 그 책임도 져야 하는 부담이 막중한 자리었다. 그럼에도 어머니께서 총 책임자가 되신 것은 여군 출신이셨던 배경과,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딸 둘을 버리지 않고 잘 키웠고, 단련대 안에서 혹시나 도망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딸들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 같다. 웬일로 그들이 사람을 잘 보았다. 어머니는 항상 모범적이셔서 단련대에서도 인정을 받으셨다.

특히 가을을 맞아 두만강 주변에 밭으로 나가 일하는 날이 많은데 책임자였던 어머니의 임무는 더욱 막중했다. 아침마다 건강상태가 그나마 좋아 보이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출해서 외부로 동원되는데, 일꾼들과 함께 책임자로 나섯던 어머니는 항상 인기가 좋으셨고 모두가 어머니와 함께 가길 바랬다. 이유인즉슨 어머니는 힘겹게 일하면서 옥수수 몇 알로 끼니를 때우는 아저씨들이 항상 담배 한 개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주셨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제발 담배 하나만 피우면 소원이 없겠다는 간청을 했고, 어머니는 농장주 간부들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풋 배를 받으시면 직접 담배를 말아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있는 노동자들에게 몰래 챙겨주곤 하셨다. 그렇게 해소가 되는 날이면 일의 능률은 오르고 어머니가 책임자로 나가는 날에는 일터에서 도망자가 생기지도 않았고 농장에서도 만족도가 높았다. 옛날에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위해 담배를 말곤 하셨는데, 그때의 실력을 발휘해서 아저씨들에게 작은 일탈을 선물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신뢰를 쌓으셨고 평판도 좋으셔서 농장주들은 어머니의 작은 요청도 그나마 잘 들어주셨다. 나와 동생은 건강 상태는 나날이 안 좋아져 갔다. 특히 여동생은 단련대에 와서는 정신적으로는 그나마 회복이 되는 듯 싶었으나 하루 한 끼, 그것도 시커먼 고무 그릇에 옥수수 속을 갈아서 넣고 이름 모를 풀과 섞어 주는 음식은 식사가 아닌 소여물 같았기에 우리 둘은 도저히 씹을 수 도 넘길 수도 없어서 늘 굶기가 일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일터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시면 늘 무언가를 갖고 오셔서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거나 혹은 사람들이 안 볼 때 나와 동생 입에 먹을 것들을 넣어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두부를 몰래 숨겨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불에 구운 옥수수도 몰래 품어서 갖고 오신 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비굴하게 자존심 같은 것은 버려둔 채 모진 모독과 비참함 가운데도 열심을 다 하셨던 것은 나와 동생을 살리고자 했던 어머니의 헌신 이셨다.

그러니 낮에는 비록 어머니가 안 계시지만 저녁에 돌아오는 어머니가 무언가를 갖고 오진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명절에도 먹기 힘든 귀하디 귀한 삶은 계란을 먹었던 사건이었다. 그날도 배고픔에 배꼽을 잡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머니가 자고 있는 나와 여동생 입에 무언가를 쑤셔 넣으시는 것이었다.

잠결에 놀라기도 잠깐 너무나 달콤하고 말랑하여 목이 콱 메는 삶은 계란에 너무나 반가워서 숨도 안 쉬고 먹었던 거 같았다. 어머니는 소리 내지 말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하셨다. 일터에서 웬일로 나눠준 삶은 계란을 몰래 숨겨서 오셔서는, 다들 잘 때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계란 껍질을 까서 우리 입에 넣어주셨던 것이다.

당신이 받는 식사도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의 음식이 었을 텐데... 부실한 감옥 식사를 생각하면 그 계란 한 쪽이 어머니께도 얼마나 귀하셨을까... 또 외부에서 단련대로 복귀하면 몸수색을 하는데 그것을 몰래 들여온다고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셨을까... 퍽퍽한 노른자가 목에 걸리지 않게 꼭꼭 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꿀꺽 삼켰던 그 계란은, 쇠약해진 우리 생명을 연장시키는 어머니의 사랑이요 희생이었다.

고난은 부족한 음식과 배고픔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여름에 잡혀왔기 때문에 여름옷을 입은 채로 북송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별도의 죄수복을 지급하지 않았고, 심문 과정을 거쳐 단련대 로 옮겨질 때에도 북송 당시의 여름 복장 그대로였다. 북한의 가을 날씨는 아침저녁으로 정말 추웠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북한의 단련대 수용소 는 정말 추웠다. 시간이 더 지나가면 갈수록 반바지와 반팔티만 입고 있던 나와 동생은 얼어 죽게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이모 분이 보위부를 거치지 않은 채 몇 차례의 조사만 거친 후 단련대로 들어왔다. 그 이모는 중국에 친척들이 있어 몇 년 동안 몰래 그곳에 나가 도움을 받곤 했었다고 한다. 그날도 중국 도문으로 넘어가 친척들에게 도움을 받고, 온성으로 돌아와 늘 묵던 브로커 집에 있었는데 누군가의 신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처음 단련대에 도착한 이모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뒤편에 홀로앉아 서럽게 눈물을 훔치던 이모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모가 유난이라며 혼자 불쌍한 척한다며 눈총을 주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모를 위로해 주시며 강인하게 살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이끌어 주셨고, 그 덕분에 이모는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과 이모는 서로 의지하며 그곳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 가족을 본 이모는, 자신이 갖고 온 보따리 속에 옷이 많다며 몰래 숨겨온 돈으로 간부를 매수해 옷 보따리를 찾아내셨다. 그리하여 우리 세 모녀는 이모 덕분에 따뜻한 옷을 받아 입게 되었다. 우리는 꼭 이모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이모는 나중에 보따리를 찾아 고향에 가더라도 도중에 누군가에게 다 뺏겼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주는 것이 더 좋다 하시고 뿌듯해 하셨다.

이모가 준 옷 덕분에 우리는 얼어죽지 않고 나중에 중국으로 다시 넘어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모는 보따리에 있던 생필품 등을 빼내어 단련대 안에서 물물교환을 하면서 우리 가족도 함께 챙겨주셨다. 지금 생각하 면, 그 험난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도움의 손길이라고 생각한다.

단련대에서 약 한 달 이상을 머문 우리는 다시 청진에 있는 함경남도 도집결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단련대에서 노동을 하다가 노동교화 시간이 다 되면 풀려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2002년에는 중국 에서 끊임없이 탈북자들을 색출하여 북한으로 내보내던 시기였기에 북송된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보위부 조사와 단련대를 거쳐 각 주소지에 따라 도집결소로 호송되었다.

우리의 고향은 함경남도이기에 도집결소인 함경남도 청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각 시나 도로 옮겨져야 하는데, 우리를 데리러 담당 간부가 와야 만 이동할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새벽부터 기차의 몇 개의 칸에 탈북자 죄수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과 안전원들이 탔다. 훌쩍 다가온 초겨울 북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새벽부터 우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청진 도집결소에서는 노동을 하며 고향 지역의 담당 간부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당시 각 지역 간부들은 죄수들을 데리러 제때 오지 않고 오래도록 방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죄수를 방치하는 이유는 출장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간부 개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죄수 중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조금 더 일찍 그 죄수를 데리러 왔다. 우리 세모녀 역시 언제 올지 모르는 고향지역 간부를 기다리며 집결소에서 생활을 보냈다. 이곳도 집결소에서 도착해서는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집결소 규모가 작아서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모두 한 곳에 있다가는 모두가 극심한 영양실조로 다 죽을게 뻔해 보였다.

앞으로 더 수용할 장소도 지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했기에,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들을 분리해서 수용했다. 건장한 성인들은 산속에서 숙식하며 노동을 했고, 집결소에는 노인들, 아픈사람들, 그리고 아이들과 장기수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동생도 예외 없이 엄마와 떨어져야만 했다. 도집결소 남은 사람들은 주로 노약자들과 미 년자들이었는데, 새벽 4시면 기상해야 했고, 운동장 한 바퀴를 구호를 외치며 뺑뺑이를 돌고, 아침에 간단한 정신교육 후에 집결소가 위성사진에 찍히지 않도록 마당에 유리구슬 같은 것을 뿌리고 거두는 일에 동원됐다. 그리고 낮에는 논밭에 나가 벼를 추수하는 일, 볏짚을 나르는 일, 돌멩이 나르는 일 등 노동단련대와는 또 다른 강도 높은 일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엄청난 양의 조항들과 다시는 도강하지 않겠다는 선서문을 또박또박 외워야 했고, 매일 밤마다 감옥 안에 인원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만 했다. 만약 불침번 근무 중에 졸거나 불성실한 태도가 발각되면 심한 벌을 받아야 했다. 나는 몸이 약하고 아픈 여동생을 대신해 매일 2시간씩 불침번을 더 섰다. 깊은 자정이 되면 손바닥 만한 창문 사이로 보이는 달님이나 별들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밤이면 그것들을 반복해서 세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혹은 내가 만약 저 별 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멍하니 보다 보면 날이 밝아오곤 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누릴 수 없는 자유, 보고 싶은 엄마...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사방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픔 없이 이 자리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어머니는 도 집결소에서도 여성책임자를 맡으셨다. 감옥에 피 같은 애들을 두고 온 어머니는 절대 혼자 도망갈 수 있는 분이 아니셨다. 그나마 1~2주에 한 번 간부들의 농작물이나 필수품을 가지러 집결소에 내려올 때, 어머니도 간부들과 함께 일꾼으로 파견되어 내려오곤 하셨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보였고, 성실히 일했고, 아픈 두 딸이 항상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는 것을 감옥에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 집결소에 갈지 모르니 배급된 음식의 절반을 안 먹고 따로 싸 놓으시곤 하셨다.

그렇게 컴컴한 밤 우리 모녀는 잠시 생사를 확인하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어머니는 자신이 배급받았던 음식을 아껴서 가져와 우리 옷속에 넣어주셨다. 그리고는 꼭 정신 차려서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동생을 잘 보살피라고 나에게 당부하시곤 하셨다. 우리는 울면서 엄마와 헤어져야 했고, 훌쩍이며 화장실에 들어가 어머니가 주신 옥수수 한번 베어 물고 또 울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께서 주신 음식은 대부분 쉬어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음식이었다. 다 쉬어버린 옥수수를 먹으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리를 위해 먹지 않고 아껴서 건네주신 어머니의 사랑과 그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쉬어버린 옥수수, 그리고 그것마저 먹지 못해 배를 곪고 있는 감옥 안의 사람들... 만감이 교차하는 비참하고 슬픈 현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독하게 그 옥수수를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억지로든 그 음식을 다 먹이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나날이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하던 어느 날 우리 거주 지역에서 간부가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 모녀를 데리러 온 담당자는 은퇴를 앞두신 할아버지 보위지도원 동지였다. 이분도 원래는 우리를 데리러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평양으로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가 연착이 되어 딱 우리가 있는 청진에 멈춰섰다고 한다. 북한에서 기차는 한번 멈추면 언제 다시 출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집결소에 있다는 모녀들을 확인만 하고 데리고 가는 것은 나중에 결정하고자 생각하시고 이곳을 방문하셨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간부는 감사하게도 우리의 이야기나 사정이 하도 안타까우셨는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비록 넉넉한 차비도 없이 온 길이지만 마음을 돌이켜 우리 세모녀가 다 여기 있는지 물으셨다. 그런데 늘 저녁에나 물건을 부리고 싣고 가던 일정이 그날은 점심시간이 안 되어서 어머니도 함께 내려오셨다. 기적같은 일이다. 평소에는 한번도 낮에 내려오신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집결소에 세모녀가 다 모여 있었던 덕분에, 타이밍이 너무나 알맞게 우리 세모녀는 얼떨결에 할아버지 간부를 따라 너무나 순조롭게 드디어 집결소 커다란 철문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고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들떴고 간만에 만난 엄마도 너무 반가웠다. 여동생도 그날따라 기운을 차리고 희망이 가득찬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우리 세 모녀는 할아버지 간부가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나왔고, 우리끼리 속닥속닥 했다. 그러자 보위지도원 할아버지는 말하지 말고 일렬로 걸으라고 혼을 내셨다. 순간 얼어붙었지만 당당하지 못한 우리의 신분에 그저 아무 말 못하고 앞만 보고 따라갔다.

그 간부는 엄마의 손목을 채우기 위한 녹슨 수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봐서 지금 채우지 않고 시에 도착하면 수갑을 채우겠다고 배려해주었다. 중국에서부터 머리를 길러 긴 머리를 하고 있었던 나와 동생의 모습이 북한의 보통 여자아이들이 하는 단발머리와 달리 우리는 등장만으로도 모든 이목에 띄었고 인솔간부 입장에서는 수갑까지 채워서 더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던 듯 싶다. 덕분에 어머니는 수갑을 차지 않고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언제나 처럼 북한열차는 계속해서 연착이 되었다. 여행이 길어지자 간부가 휴대한 여비도 부족 해졌다. 다행히 이 간부는 우리에게 나쁘지 않게 대해주고 부족한 여비에도 우리를 굶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열차가 단천에 멈추게 되었다. 단천에는 나의 큰아버지, 즉 어머니의 오빠가 살고 있었다. 탈북을 하기 전, 어머니는 큰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단천에서 열차가 연착이 되자 어머니 는 외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으셔서 인솔 간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큰오빠네 집에 가면 잘 곳도 있을 것이고 먹을 것도 있을 것이니 하룻밤 쉬어 가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여비도 부족한 터라 인솔 간부는 못 이기는 척 어머니를 따라 큰아버지 집으로 방문했다. 마침 큰아버지는 출장 가셨는지 집에 계시지 않았고 사촌오빠도 군대에 가 있어 집에는 큰어머니와 사촌언니만 있었다. 큰 어머니는 우리들을 보자 반가워하기는커녕, 어떻게 우리 가문에 도강자가 나올 수 있냐며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하고 모진 말들을 뱉어댔다.

어머니는 오직 외할머니의 생사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너무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큰어머니께 예의를 갖춰 외할머니의 생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참고 견뎌내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이미 몇 년 전 돌아가셨고 큰어머니는 할머니의 살아생전이 본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며 오히려 분을 내셨다. 그립고 보고 싶은 외할머니를 볼 수 있겠다 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우리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계속 물었다. 큰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떻게 죽긴 어떻게 죽어. 노망났으면 곱게 날 것이지. 벽에 똥칠하고 맨날 밖에 나가 길래 묶어뒀지.”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그럼 당신이 우리 엄마를 묶어두고 밥 안줘서 굶어 죽였다는 거야?”라고 추궁하셨고, 그 말에 큰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무 기가차서 말문이 막히셨다. 자신에게 도강자라고 타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은 어머니를 분노와 충격으 로 뒤덮었다. 못난 딸 때문에 어머니께서 그런 처우를 받고 돌아가셨다며, 내가 잘 돼서 어머니를 모셨어야 했는데 하며 죄책감을 가지셨다. 지금도 어머니는 외할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출해 왔을 것이라며 후회와 자책으로 사신다.

큰어머니는 그 외에도 한끼 밥과 하룻밤의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에도 심하게 꺼려하며 눈치를 주었고, 우리는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일찍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마음으로 우리 모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지역 안전부(경찰)의 조사가 이어진다. 원래라면 안전부 수감시설에 갇혀서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당시에 고향에서는 우리  모녀가 첫 송환자였기 때문에, 지역 안전부에서는 도강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장군님의 은혜로 조국에 돌아와서 더 잘살고 행복해 한다고 우리를 이용해 선전을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배반당했으니 여기서 잘 살아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들의 의도를 눈치챈 어머니는 다신 중국에 가지 않겠다고 그들 앞에서 다짐을 했다. 덕분에 우리는 감옥에 가지 않고 집에서 왕래하며 안전부로 조사를 받으러 갈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집이 없었다. 벌써 도강을 한지가 오래됐기 때문에 우리 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안전부 사람들이 어디 지낼 곳이 있느냐고 어머니께 물었을 때, 어머니는 과거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친하게 지냈던 인민반장네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안전부 사람들도 아무래도 인민반장의 집이라면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겠다 생각했는지 우리를 인민 반장네로 보내주었다.

우리를 본 인민반장은 너무 놀라했다. 조용히 이사를 간 줄로 알고 있던 우리가 외국인이 다 돼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며 귀한 이팝에 계란후라이도 주고 그랬다. 그렇지만 딱 3일이 지나니 우리를 대하는 얼굴 표정이 싹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우리 집에서 신세질 것이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재탈북을 생각하고 계셨다.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 준다고 해도 북조선은 북조선이다. 어머니는 인민반장네서 계속 지내게 되면 탈북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계셨다. 인민반장의 불편한 심기를 확인하신 어머니는 이때다 싶어서 인민반장에게 우리가 살 곳을 다른 이웃집으로 옮기겠다고, 그곳에 인민 반장이 왔다 갔다 하며 우리가 잘 있는 지를 확인하면 되지 않겠냐며 제안하셨다. 그 얘기를 들은 인민반장은 환한 얼굴로 갈 곳이 있냐며,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우리 가족은 꺽다리 이모네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마르고 키가 커서 우리가 꺽다리 이모라고 불렀던 그 이모는, 과거 고난의 행군 때 우리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당시 성실하기로 유명했던 꺽다리 이모는 당원으로서 누구보다 국가와 당에 충성하던 분이셨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꺽다리 이모의 가정은 큰 풍파를 겪었다. 이모의 남편은 굶주림과 병으로 인해 많이 아프셨고, 이모는 오랫동안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배급도 주지 않고 아픈 남편도 진료를 받거나 약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이모의 남편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모가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어머니께서 식량이나 의복을 건네주고 격려하며 도움을 주셨었다. 꺽다리 이모가 홀몸이라는 것을 기억한 어머니는 꺽다리 이모네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셨다. 우리를 본 이모는 그 동안 어디 있었냐며 여느 사람들처럼 너무나 놀래셨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반겨주셨다. 이모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과거 당이 죽으라면 껌뻑 죽을 것만 같 았던 충성분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또 어머니께서 걱정을 할 정도로 순박하신 분 이었는데 지금은 돈버는 일에 혈안이 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듣고 보니 남편 뿐 아니라 군대에 있었던 이모의 아들도 영양실조에 걸려 집에 돌아왔고, 한 달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로 꺽다리 이모는 국가와 당에 철저하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쫓아 살아오셨던 것이다. 이모의 집은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곳이었지만, 식사만큼은 누구보다 잘하고 계셨다. 집안 부엌에 가보니 발 디딜 틈도 없이 나무가 쌓여있었다. 나무 장사를 하고 있었던 이모가 누가 훔쳐 갈 새라 판매할 나무를 부엌에 쌓아두고 열쇠로 잠가두고 다니신다고 했다.

장사라는 것은 자본주의를 뜻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의 살길을 스스로 찾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북한의 모순된 실상이었다. 꺽다리 이모 댁은 맘이 편했다. 혼자 살고 계셨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 적적한 삶에 오히려 힘이 되셨던 듯 싶다. 이모는 중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시며 호기심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의 자초지종을 다 들으신 이모는 우리 손을 꼭 맞잡고 너희만은 이 나라를 떠나서 살아남으라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한편, 인민반장은 이사 후 처음 얼마간은 우리가 잘 있는지 점검하러 종종 찾아왔지만, 그 횟수가 점점 줄어 들었고 나중에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안전부로 출석하며 성실하게 조사를 받으러 다녔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사에서는 다시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시면서도, 뒤로는 다시 탈북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가기 위해 또 다시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은 쉬지도 않으시고 모든 곳에서, 특히 북한에서도 계속 역사하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북한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만 같았던 과정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비록 이 짧은 글에 그 모든 사건들과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우리 가족은 분명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체험들을 했고, 그것이 앞으로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중국 정부는 코로나기간 동안 수감한 탈북자 2000여명을 곧 강제 북송한다고 한다. 글을 쓰는 내내 우리가 이송되어 북한으로 나갔 던 때가 떠올라 수감된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중국 정부가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만약 우리도 탈북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구출이 되었다면,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감히 이야기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그래서 그 뜻대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천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지금 할수있는 일은 오직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길 기도할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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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8화 - 2차 탈북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8


2002년 12월, 북송된지 약 6개월 만에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넘어갈 결심을 했다. 처음 북송이 될 때에 우리는 다시 중국에 갈 수 있게 되더라도 신분이 없는 상태로 다시 나라 없는 서러움과 온갖 수모를 겪게 될 바에는 내 고향인 이곳, 북한에서 살아보자고 마음도 먹어봤다. 하지만 우리의 다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장마당에서 마주한 수많은 꽃제비들이었다.

 

우리가 탈북하기 전에도 꽃제비는 있었만, 2002년 장마당에 있는 어린아이들과 병들고 뼈밖에 없는 노숙자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다시 중국에 간다고 해도 방 한 칸도, 떳떳한 신분도 하나 없고 누구 하나 우리를 반겨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생사를 기다리고 있을 옥이 이모가 떠올랐다. 그러니 더욱 중국에 가서 이모를 만나 죽다가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감옥에서 생긴 봉와직염으로 우리 세 모녀의 발목은 고름이 흐르고 퉁퉁 부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수개 월을 굶으면서 제대로 된 음식 하나 먹지 못해 소화기관도 다 망가졌다. 우리는 오직 정신력 하나로 움직였다. 꺽다리 이모는 나와 동생을 보며 너희들은 꼭 살아야 한다며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그렇게 모든 일은 순적하게 빠르게 진행되었고 꺽다리 이모의 도움으로 다시 중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99년에 처음 도강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막막하여 생고생을 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투먼)으로 가기로 하고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향했다. 그렇게 온성에 도착했지만 두만강을 건너가기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얼지 않은 두만강이 문제였다. 강물이 얼어야 우리가 그 위로 건너갈 수 있는데 강기슭만 얼어있고 중간은 얼지 않은 상태였다. 왜 물이 얼지 않나 봤더니 강 상류에 있는 펄프 공장에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가자니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추적이 이루어지고 있을 텐데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언제 얼지 모르는 강물을 마냥 바라보고 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얼지 않은 강을 헤엄쳐서라도 건너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지체한다면 분명 국경수비대들에게 들킬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잡혀가서 처음부터 그 힘겨운 과정을 견뎌낼 자신도 없고 그럴 수 있는 건강 상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그 동안 여러 구금시설을 이동하면서 강제노동에 시달려 오시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다. 몸무게는 30킬로를 겨우 넘기는 정도로 삐쩍 마르셨고 피부도 까맣게 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강을 건너려고 하니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리셨다. 몸과 마음이 나약해지신 어머니를 몰아붙인 것은 나였다. “잡혀도 중국 가서 잡히는 게 낫지 않겠어? 밥 한 끼라도 먹을 수 있잖아.”라며 엄마를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물은 처음에는 무릎까지 오던 것이 갑자기 가슴까지 훅 올라왔다. 추운 겨울에 흐르는 강물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차가워서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온 몸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강물에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이 우리 몸을 툭툭 치며 지나갔는데 너무 쓰리고 아팠다. 결국 강 중간쯤 와서 어머니는 그 고통을 버티지 못하시고 다시 북한 쪽으로 황급히 돌아나가셨다. 추위에 덜덜덜 떠시는 어머니의 이빨이 드드드드 부딪히는데 그 소리가 안타깝다고 생각할 세도 없이 너무 크게 들리는 그 소리 때문에 우리의 도강 시도가 들킬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우리 포기하자.”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럴 수 없다며 동생과 엄마를 끌고 다시 강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고비가 되었던 강의 중턱을 넘으니 강의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저 멀리 논밭이 보이고 반짝이는 집들이 보였다. 다시 중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우리의 옷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몸도 얼어있어서 잘 움직 여지 지가가 않았다. 그렇지만 옷을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우리는 무작정 논으로 뛰어 들어가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그때는 국경선 주위에 철조망이 없던 때라 앞으로 무작정 달리면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마을 앞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갈 때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한 집을 골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有人在 (계세요)?” 처음 탈북했을 때와는 달리 동생과 나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에 일부러 중국 사람인 척 중국말을 썼다.

 

그런데 문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조선말이었다. “아니, 이 밤에 누구지?” 우리는 다시 중국어로 대답했다. “能借一下 (전화기를 한 번만 빌려 쓸 수 있을까요)?” 문을 열고 나온 분은 조선족 할머니였다. “어떡하나…. 중국말을 못하는 데 내가….” 할머니는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조선족이셨던 것이다. 우리는 조선말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빌릴 수 있는지 다시 여쭈었다.

 

조선말을 하는 우리가 신기했는지 놀라신 할머니가 전화를 빌려달라는 말에 “전화? 저기에 있는데….” 라고 하시는데 할머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전화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옥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야.” 울먹이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엄마 옆에 동생과 나는 딱 달라붙어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벙찐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조카들이 얼마 전에 북한에 가서 죽었을 텐데 이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언니~” 하며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이모도 놀라며 진짜 서윤이네구나 하셨다.

 

옥이 이모는 바로 기차를 타고 도문으로 갈 테니 모레 역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지금에야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고속철도가 없었고 그 구간에 직행열차도 없었기에 최소 이틀은 기차를 갈아타며 이동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할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매우 난처해하셨다. 당시 북송되는 사람이 많았던 만큼 공안의 단속도 심하던 시 기였다. 중국인이라면 북한 사람을 보면 무조건 공안에 신고를 해야 했고, 돕다가 걸리면 처벌도 받았다.

 

우리는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우리가 중국말을 아주 잘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고 이틀만 숨겨주시면 얼마간의 돈도 드리겠다고 했다. 고심 끝에 할머니는 알겠다고 승낙해 주셨고 혹시라도 모르는 사람이 수색하러 들어오거든 마루 밑에 숨으라고 당부를 하셨다. 할머니는 노총각 아들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나중에 귀가해서 우리를 보게 된 그 노총각 아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할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는 우리를 내쫓거나 신고하지 않고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조선족 할머니의 집에서 조용히 틀어박혀 있는 가운데 아무 일 없이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옥이 이모를 만나러 그 노총각 삼촌과 함께 도문역으로 향했다. 옥이 이모가 아침 일찍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전날 밤에 택시를 빌려 출발했다. 우리가 있던 곳은 시골이었기에 도문시내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달리는 동안 택시에서 자면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있던 내 얼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쳤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차 바깥에 키가 훤칠한 변방부대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서있었다. 시끌시끌 소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변방부대원이 신분증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생각도 못 했던 검문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택시 기사와 삼촌은 당연히 괜찮았다. 우리는 출발 전에 삼촌과 같은 일행이 아니라 중간에 합승한 걸로 하자고 말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만 문제를 해결하면 되었다. 나와 동생은 아직 어리니 변방부대원은 어머니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너무 놀라신 어머니는 놀라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중국어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아니 요즘 누가 택시 타면서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요.” 그 말을 들은 변방대원들이 “하긴, 이 밤에 누가 신분증을 가지고 나와”라면 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우리 지금 병원에 가는 중인데 너무 급해서 신분증을 안 가지고 나왔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아파 보였다. 점점 설득이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마침 무서워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많이 아픈데 자꾸 신분증을 달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내가 엉엉 울며 말하자 군인들이 당황하며 빨리 보내주라고 서로 얘기했다. 긴가민가하며 그래도 신분증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군인을 다른 군인이 “아프다잖아.”라며 빨리 보내라고 재촉했다. 게다가 우리가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니 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행스럽게 검문소를 지나칠 수 있었다. 이제는 차에서 다음 검문소가 나오면 어떻게 말을 할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당황하지 말고 담대하게 말하자며 엄마는 중국어로 “죽겠다”라고만 반복하고 동생은 울고 나는 우리 엄마가 죽으면 아저씨들이 책임질 거냐고 따지는 역할을 맡았다. 기차역까지 8개 정도 검문을 지나갔던 것 같다. 변방부대원 입장에서도 트렁크를 열어도 텅텅 비었고 가지고 있는 짐도 없으니 딱히 의심할 만한 거리가 없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검문소는 상당히 위험했다. 변방부대원들이 강경하게 우리 모두를 차에서 내리라고, 병원에 가더라도 일단 내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더 강경하게 대응했다. 화를 마구 내며 지금 죽을 거 같은데 뭐 하는 짓이냐며 따지니 이기지 못하고 보내주었다. 어찌 그렇게 대담하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죽기 살기의 마음으로 하니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우리는 도문 시내로 들어와 도문 역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먼저 역으로 들어가겠다며 이모가 오면 부를테니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자그마한 몸을 이끌고 당당하게 역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는데 역 안에공안들이 검문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안이 출입자들을 대상으로 신분증 확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무슨 생각인지 당당하게 부스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것을 본 우리는 입이 떡 벌어지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시련을 뚫고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잡혔구나…. 라고  생각하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역으로 성공적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역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무언가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는 자신의 앞사람이 들어갈 때 꼬리를 물고 미꾸라지처럼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는데, 희한하게도 공안이 어머니를 놓친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순간 엄마가 투명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하늘이 도왔다며 감격했다. 

 

어머니는 들어가셨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아닌 뒷문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엄마와 다시 만났고, 그렇게 가슴 졸여 역에 들어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옥이 이모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서로를 얼싸안은 우리는 이모에게 부탁하여 우리를 도와준 삼촌에게 처음 할머니 집에서 약속했던 돈을 쥐어 보내고 이모가 사준 기차표를 받아 기차를 타고 다시 길림으로 향했다. 인간적인 계획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여정을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시 우리는 임기응변과 운으로 그 땅을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으로 자녀 삼으시기 위해 불러내신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여전히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함께하심, 섭리하심을 찾아내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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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9화 - 하나님의 열심 /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9

우여곡절 끝에 다시 중국 길림(吉林 市)으로 돌아왔지만 우리의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지만 여전히 중국은 우리를 반겨주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우리는 난민이 아닌 불법체류자들 이었다. 옥이 이모는 우리를 위해 오래되었지만 조용하게 지낼만한 아파트를 구해주셨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모든 긴장이 풀리며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갖 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신분이었기에 집에서 몇 달 동안 링거만 맞아야 했다.

세 명 다 아파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밥도 넘기지 못해 다 토해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침을 놓을 줄 아셨던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액을 놔주셨고 어머니는 내가 놔 주는 수액을 맞으셔야 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팔이 붓고 멍들고 했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추운 겨울, 변변한 이불 한 조각 없는 집에서 링거만 꽂고 기어다니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북조선이 아닌 중국이어서 감사했다.

한 번의 북송을 경험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중국에 눌러앉아 살 생각이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중국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자칫 서툴고 조급한 남한행을 기도했다가 잡히기라도 하여 북송이 된다면 틀림없이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가든지 총살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백방으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북송되었을 때 감옥에서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몽골로 가는 길이 가장 유력하다”고 들었다. 중국의 국경을 무사히 넘어, 몽골 사막을 지나, 안전하게 몽골 군인들에게 발견되기만 하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가 국경이고 사막인지 몰라 자칫 중국 국경 경비대원들에게 붙잡히게 되면 남한행으로 간주하여 북송된다. 어머니는 준비만 잘 해서 가면 사막을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고, 이제는 중국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우리도 몽골을 통한 한국행이라도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내가 아픈 탓에 사막을 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이 되어 결국 몽골로 가는 길은 포기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오로지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던 우리에게 베이징에 브로커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일인당 천만 원씩 모두 3천만원이라는 너무나도 큰돈이 든다고 우리를 떠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에 가면 갚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착금이라는 걸 준다고 넌지시 던지는 말에 어머니는 정착금을 받게 되면 즉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담보도 필요했다. 옥이 이모는 흔쾌히 자신의 집을 담보로 잡아 주셨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서 돌아온 조카들을 다시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며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베이징에 브로커의 집으로 갔다. 그 브로커의 집에는 이미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고향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총 20명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중에는 대부분이 건장한 어른들이었는데 그 어른들이 우리 모녀를 보자 반기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어려운 길에 애들을 어떻게 데려가냐며 말이다. 그들이 반기지 않았던 이들 중에는 나와 동생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80세가 다 되는 노부부도 있었다. 그 부부는 국군포로였는데, 북한에서 살다가 한국에 먼저 간 딸이 부모를 한국으로 빼내고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노부부를 부탁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노부부와 아이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며 브로커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가만 계시지 않았다. “어떻게 당신들만 살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우리도 살아야 한다. 핏덩이 같은 애들을 데리고 다시 북한으로 갈 수 없다”며 싸우셨다. 어른들은 그러면 엄마만 가고 애들은 나중에 데려 오라며 버텼다. 밤새 그러고 싸우고 있으니 노부부는 그냥 방에 들어가 주무시고 나는 엄마 옆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듣다 보니 나도 답답해서 한마디 하게 된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로 사람들의 초점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럼 아줌마 아저씨 들끼리 가면 되지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있는 겁니까? 우리 빼고 북경 대사관으로 가면 되죠.” 어머니는 어른들 얘기하는데 왜 끼어드냐며 면박을 주셨지만 싸우던 아저씨는 제대로 말을 못하며 “위험하니까”라는 말만 했다.

 

그때 브로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대사관 주변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신분이 노출될까 봐 얼씬도 못하고 있단다.” 알고 보니 그들 중에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잡히면 대처를 할 방법이 없어 대사관 근처도 가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여태까지 한국 대사관 위치만 파악해 놓고 근처도 못 가봤단 말이에요?”

 

그 당시는 남북 관계나 정치적 문제로 해외 탈북자 수 대비 많은 이들이 한국에 오지 못했다. 더구나 2000년대 초반 북한은 김정일의 방침으로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송환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자칫 실수하면 단체로 북한으로 북송이 될 수 있었기에 안전에 안전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겁도 없이 말했다. “우리가 대사관 앞을 가볼게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등장으로 브로커 아저씨는 다시 판을 짜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의심을 덜 받을 것이고, 의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중국어를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더구나 우리 가족은 죽기 아니면 뭐가 더 있겠냐는 각오가 되었기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총 세 팀으로 나뉘어졌다. 중국어를 할 수 있는 나와 동생이 행동팀이 되었다. 1팀인 나는 갓 제대한 군인 삼촌과 팀을 먹었다. 10년 동안 군인으로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키도 크고 싸움도 잘하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내 동생과 엄마, 노부부가 2팀으로 택시에 타서 대사관 철문 옆 도로에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아무도 노부부 할머니 할아버지와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 동생과 엄마가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건장한 어른들은 대사관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보는 3팀이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대사관 주변만 알짱대던 아저씨들이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일을 진행 할 수 있었다. 8시 반쯤 직원들이 출근을 하기 때 문에 그 시간쯤에 대사관으로 가기로 했다. 삼촌과 나는 1팀으로서 대사관 대문 앞에 가 있기로 했다. 준비를 하며 삼촌은 조그마한 망치를 사서 뒷주머니에 찼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직원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건물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 한 명이 쓱 곁에 와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중국어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사전에 말을 맞춘 대로 옆에 있는 사촌오빠와 내가 대학생인데 한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서 비자를 알아보려고 북경에 왔다고 했다. 그 남자는 자기 가 유학원이랑 여행사 사장인데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유학 보냈다며 여러 가지 유학에 대한 내용을 술술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듣는 척을 하였고,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삼촌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때 한 봉고차가 대문 앞으로 다가오자, 입구에  경비가 무슨 차인지 묻지도 않고 철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퀴가 달린 자동문이 쓱 열리자, 봉고차가 들어갔다.

그때 급작스럽게 삼촌이 사장님과 얘기하고 있던 나를 끌고 봉고차가 들어가고 미쳐 닫히지 않은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삼촌의 손에 이끌려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고 경비실에서는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를 놓칠 새라 택시에서 대기 하고 있던 엄마와 동생이 보따리를 든 노부부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하며 자동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셔터와 유리문을 지나야 했다.

봉고차가 문 안으로 들어와 마당에 서자 당직을 서던 직원이 셔터를 열었다. 그러나 뒤를 이어 뛰어 들어오는 우리의 모습을 본 직원이 놀라서 셔터를 다시 닫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 새라 삼촌이 “셔터 잡아!”라고 외쳤고 나와 삼촌은 셔터 밑으로 들어가 문이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탁 잡았다. 내려오는 셔터를 잡고 있으니 문이 삐뚤어지며 셔터가 고장이 나고 우리는 셔터를 잡고 건물 안을 바라보며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놀란 눈을 하고 안된다며 문을 열어줄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나는 목 놓아 울면서 간절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애걸했다. 그 사이에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엄마도 우리 옆으로 와서 문을 열어주길 애원하였다. 어깨로 문을 받치고 있던 나는 어깨가 너무 아파서 잠깐 뒤를 돌아 우리가 들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새 공안들이 쫙 깔려 우리를 잡으러 오고 있었다.

유학 상담을 해주던 사장님도 눈에 띄었는데 한 손에는 유학브로슈어를 들고 입이 떡 벌어져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잡히면 진짜 죽는구나 싶어지자 나는 더욱 소리를 지르며 살려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삼촌도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망치를 꺼내 들었다. 유리문을 부수겠다고 손짓 하자 대사관 직원이 드디어 알았다며 문을 열겠다고 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우리는 모두 쓰러지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상처가 난지도 모르고 다들 잘 들어왔는지 주변을 살폈다. 대사관 직원들은 안심하라며 약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나머지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모녀와 군인 삼촌,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들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여섯 명은 대사관 직원에게 어떻게 우리만 들어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쫓을 수 있냐며 울면서 호소하니 그들은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우리가 울면서 얘기하니까 진정시키며 들어올 때 우리 6명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고 했다.

대사 관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진짜 한국 대사관에 들어온 건지, 진짜 기다리면 한국에 갈 수 있는지 직원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식사하며 점심을 챙겨주신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물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다른 14명은 어디에 있는지, 혹시나 공안들에게 잡힌 건 아닌지, 왜 또 우리만 들어 왔는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간단하게 조사도 받고 긴장이 풀려 서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세시 쯤 되었을까 밖에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방에서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 안에 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14명의 어른들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우르르 들어 왔다. 우리 20명은 확인하자마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이는 분명 아침에 흘렸던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서러움과 공포의 눈물과는 다른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내용인즉슨, 그들은 우리 6명이 들어올 때에 타이밍을 놓쳤고 순식간에 공안들이 깔리는 바람에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들어오지 못했고, 브로커 아저씨는 낙심한 그들을 조용히 태워 그 곳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들은 낙심하여 서로 자책하며 “어떻게 저 노인네랑 애들은 들어갔는데 우리는 못 들어 갈 수 있냐”며 호상 비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그곳으로 가보자고 하는 의견과, 안 된다 위험하다는 의견이 분분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번 가보자고 결정이 되어 다시 대사관 앞으로 왔다고 한다.

소망없이 왔지만, 그들에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는데 바로 우리가 들어오면서 고장을 낸 셔터를 수리하기 위해 수리공들이 문을 다 활짝 열어놓고 수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지나가는지 관심도 없이 어수선하게 수리하며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지나 차들 뒤로 숨어 건물 안까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참 약한 자들을 좋아하신다. 그때는 나의 힘으로 그것을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그렇기에 여전히 주님 앞에서 약해지고 싶고 여전히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 우리 모녀는 두 달 정도 대사관에 있다 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그토록 가고자 열망했던 곳에서조차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은 끝까지 찾아오셨고 결국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기 원하셨다.  이런 낮은 나를 찾아오시고 택하여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 한다. 그리고 지금 멸시받고 있는 북한을 언젠가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들어 쓰실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의 고향 북조선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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