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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10~12화 - 체험 탈북민 수기

작성자봄편지|작성시간26.06.16|조회수2 목록 댓글 0

이끄심 10~12화 - 체험 탈북민 수기 

 

이끄심 10화 - 체험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10

목숨을 걸고 들어온 대사관이었지만, 한국에 언제 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불안한 마음이 삐쭉삐쭉 올라왔지만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대사관에는 우리 말고도 이미 많은 탈북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는 어려서 탈북을 한 탓에 학교 한번 못 가본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이름조차 잘 쓰지 못했다. 오랫동안 중국에 숨어 지낸 아이들이 무슨 학교생활을 경험했겠는가. 배움을 갈망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우셨던 영사관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그곳에 있는 몇 명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콕 집어서 나에게 부탁하셨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렇게 영사관 안에서 소소한 스터디클래스가 열렸다. 나와 여동생은 한글 쓰기와 읽기, 중국어 천자문 쓰기 등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책 읽기 훈련을 시켰다. 영사관님은 아이들이 공부하기 쉽게 한글로 된 책을 많이 구해다 주셨다. 그 책들은 대부분 이솝우화와 같이 교훈이 담긴 내용들의 책이었는데, 그 중에는 탈무드와 성경책도 있었다. 나는 한글로 된 책을 받을 때가 가장 기쁘고 책 한 권이 너무 소중했다.

그중에 이솝우화나 탈무드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재미도 있어 참 좋아했지만, 이상하게 성경책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성경책을 뒷전으로 했던 나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베이징 대사관에는 우리 팀 말고도 먼저 들어오신 모자(母子)가 있었다. 그 모자는 누가 봐도 예수쟁이로 불렸고 흔히 말하는 충만한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경계하면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오라버니가 내게 물었다, “서윤아, 너 혹시 하나님 알아?”

나는 첫 중국에서 만난 순자 이모를 통해서 교회는 들어봤지만 ‘예수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내가 하나님도 성경도 잘 모른다고 하자 그때부터 그 오라버니의 끈질긴 전도가 시작되었다. 하루는 성경을 가지고 와서 창세기 1장 1절을 읽어주시며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윤아,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철저하게 진화론을 배운 나는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오빠도 지지 않고 나에게 말했다. “절대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흙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루는 내가 오라버니에게 도전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디 한번 증명 해봐요.” 오라버니는 나에게 물었다. “서윤아, 공기가 눈에 보이니?” “아니요.” “공기는 눈에 안보이지만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죽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셔.” 오라버니는 또 하나님의 존재를 바람에 비유하며 열정적으로 나에게 하나님을 전하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렵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제는 나는 그 오라버니의 얼굴도 보기 싫을 만큼 하나님 이야기에 질려버렸지만 그 좁은 대사관 안에 도망갈 곳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어도 그 모자가 부르는 찬송가는 너무나 좋았다.  그들은 틈만 나면 마주 앉아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자연스럽게 성경은 이해가 안 되지만 노래는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 모자는 나에게 찬송가 몇 곡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들 옆에 앉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원래 노래를 좋아했기도 하고 한국 노래를 즐겨 듣기도 했기에 이 노래들이 한국에서 새로 나온 노래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그때 좋아했던 찬양은 “샤론의 꽃 예수”와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는 시간이 끝나면 이제 말씀을 보자며 자연스럽게 성경을 폈지만, 나는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천근만근 내려오는 눈을 이길 수 없어 대놓고 졸았다. 그런 시간도 잠시, 얼마 있지 않아 그 모자는 우리보다 먼저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를 피곤하게 했던 오라버니가 먼저 한국으로 가시고 나니 매우 홀가분해졌다.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대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할 사람이 없다!’며 좋아했다. 

그런 데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고 있던 내 안의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할 때는 잊고 있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혼자 찬송을 부르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외로움이 몰려왔다. 혼자 고뇌하며 하루를 보낸 그날, 나는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서윤아!”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크게 불렀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너무 놀라 “누구세요?”라며 되물었다.

환하신 빛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는 누구인가? 단호하면서 온화한 그 음성에는 부드러움과 사랑이 느껴졌다. 두 팔을 벌려 환한 형상으로만 있는 가운데 누구냐고 계속 따져 묻는 나에게 “나다. 네가 그토록 부인하고 있는 나다.”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 음성이 내 귓가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졌던 나는 낯선 남성의 음성에 순간 “혹시 제 아버지세요?”라며 되물으며 그냥 울었다. 울음 가운데 위로받는 따뜻함이 느껴졌고, 흐느끼며 울고 있는 나에게 이런 음성이 들렸다. “이제부터 너는 기도하여라.”

깨어나 보니 실제로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내가 만난 빛이신 하나님이셨다. 시간이 지나 돌고 돌아 신학생이 되어 알게 되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I am who I am, εγω ειμι (에고 에미), I am He.”였다. 그래서 한동안 얼마나 가슴이 먹먹했던지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어나 보니 모두가 잠든 밤이었고, 나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다시 갓 태어난 신생아 철부지였다. 기도하라는 생생한 음성에 이끌렸지만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 혼자 고민하던 순간 ‘옥별’이란 동생이 생각났다. 옥별이 동생은 선교사님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사관에 오게 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였다.

옥별 이는 늘 혼자서 기도하는 아이였는데, 평소에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즉시 옥별이를 깨우러 갔다. “옥별아, 옥별아!” 잠결에 놀라 깨서 눈을 비비는 옥별이에게 나는 급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옥별아, 언니에게 기도하는 것을 좀 알려줄 수 있니?” 아직 잠도 덜 깬 목소리로 옥별인가?대답했다. “기도요? 그거 그냥 언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다 하면 돼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을 꼭 해야 효력이 있어요” 그리고는 다시 누었다.

처음 불러보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계속 중얼거리며 손바닥에 그 이름을 적어 가며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외우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제 자리로 돌아온 나는 벽을 보고 앉았다. 남들이 다 잠든 밤, 나의 첫 기도가 시작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내 속에 있던 아픔들이 입술을 통 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마에 대한 상처였다.

내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미움 과 원망이 있었다. 우리 가정의 깨어짐도, 북한에서 탈출하고 북송을 당하고 했던 모든 힘든 순간들도, 남동생과 헤어져야만 했던 것도, 그리고 내가 몸이 아픈 것도 다 엄마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도와 여기까지 왔지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싫었다. 칭찬에 인색하셨던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와도 맏이니까 당연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엄마는 나를 늘 위험한 곳에 앞세우고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칭찬이나 응원의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늘 엄마의 인정에 목마르면서도 엄마를 증오하는 애증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 하셨던 엄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꾹꾹 묵혀두어 응어리진 서러움이 다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펑펑 울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엄마를 고발했다.

그렇게 다 뱉어내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 과 사건이 ‘It is done. 이제는 끝이 났다’ 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게 이 곳 대사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그저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배웠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을 외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창살 사이로 살짝 만 열리는 작은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어제와 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어제와 똑 같은 하루일 텐데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저 밖에 풀들도 나무들도 다 너무 예쁘게 보일 뿐 아니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뿐 아니었다. 내 옆에 엄마와 동생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나의 달라진 모습을 엄마와 동생은 단번에 알아봤다. 항상 무표정이고 냉소적인 모습이었던 내가 달라졌다며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몇 주 동안 대사관에서 지내면서 내 마음을 짓눌렀던 두려움들은 다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칫 한국에 못 갈 수도 있다고 속삭이는 말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한국에 가고 안 가고가 내 삶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이 작은 건물 안에 있어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쁨과 행복이 나를 감싸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모녀는 드디어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꿈에도 가고 싶던 한국에 왔다. 이제 나도 떳떳한 교인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다짐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잘 몰랐었다. 그때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다.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는데, 말씀과 기도로 양육되지 않은 나의 삶은 ‘멈춤’이 아니라 ‘도태’된 삶이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삶이었다면 그건 소설이지 인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 온지 어언 20년이 넘었지만, 17년 가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해 보겠노라,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루어 내겠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왔던 것이 자기 우상이었고,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실 곳이 없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고집스러운 나에게 져 주셨던 것이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는 절대 강압적으로나 힘으로 나를 몰아붙이지도 않으셨고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비로소 보이는 것, 한 번도 우리 가족을 놓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뼈 저리게 깨달아 알게 된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때와 같이온 우주가 멈추는 것 같은, 온온몸에서전율이 흐르는 영적인 체험을 허락해 주시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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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11화 - 하나님의 시간표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11

드디어 한국에 가게 되었다. 오래 기다려 온 순간이었기에 여러 가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영사관님처럼 훤칠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 만 살고 있을 것 같은 한국에 간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두 번의 환승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피로도 지루함도 없는 오직 꿈과 희망뿐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사복 입은 국정원 사람들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게이트를 이용해서 나온 우리들은 공항에 대기 중이던 검은 봉고차를 타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국정원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체 말이다. 처음 국정원 생활은 오전, 오후 번갈아 가며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게 하는등 운동하는 시간도 주고, 저녁이면 TV도 자유롭게 보게 하고 소등이 되면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라디오 방송도 틀어 주곤 했다. 또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과자들을 나눠 먹는 것이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한국 과자는 정말 맛있었다 (그때 먹어본 과자에는 고소미, 오징어 땅콩, 양파링, 자갈치 등등이었다.).

또 매일 밤 자그마한 창문 밖에 보이는 빨간 십자가들을 세어보며 무료함도 달래보았다. 처음엔 그 많은 빨간 십자가 사이에 초록 십자가를 보며 어디가 병원인가 했는데 누가 빨간 십자가는 교회라고 알려줬다. 나는 설레기 시작했다. 교회는 자유의 몸이 되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순자 이모도 주일이면 가시던 곳이었기에 교회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에 교회가 이렇게나 많다니 생각할 수록 가슴이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조사도 시작되었다. 국정원은 우리 가족이 함께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각자 독방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A4용지 한 뭉텅이를 앞에 놓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 들을 모두 쓰라고 했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하게 쓰라고 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다”부터 시작해서 고향, 친구, 학교 선생님 이름, 지역, 단짝의 이름 등등 빠짐없이 쓰라 고 했다. 나는 독방에 홀로 앉아 나의 일대기를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시콜콜한 내용을 다 써야 한다는 것이 너무 지겹고 힘들어서 빨리 쓰고 나갈 심정으로 몇 날 며칠을 밤새 종이를 붙들고 앉아 써 내려갔다. 

그렇게 국정원에서는 우리 세 모녀의 글이 다 취합될 때까지 기다렸고, 취합된 글을 다 검토한 이후, 다음 단계인 일대일 취조로 들어갔다. 아마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각자 다른 방에서 다른 시간에 취조하는 것 같았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와 여 동생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와 마주 앉은 취조관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과 말투로 취조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기억 속의 나는 죄를 짓고 남한에 들어온 죄수와 같았다. 영화에서처럼 담배 연기와 니코틴 냄새로 가득 메운 방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이름… 생년월일…” 한 여름인데도 차가운 공기 속에 컴퓨터 타자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존칭, 호칭 다 생략하고 다짜고짜 시작된 조사에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약 보름이 넘도록 독방에 갇혀 누구와도 말을 섞어보지 못했던 나는 얼마 만에 하는 사람과 대화가 기뻐 그만 자동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고 지금 웃을 분위기냐며 호통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취조가 이어지던 중 소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이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 이름을 모르는 게 말이 돼 이 녀석아?!” 라며 분위기가 더욱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기도 했고, 소학교 1학년 당시 담임 선생 님은 잠깐 계시다가 출산휴가를 가셨고, 다른 선생님이 임시로 담임을 하시는 등 담임 선생님들이 몇 번 바뀌어서 담임 선생님 성함이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에게 그렇게 잘 해주셨다는 선생님 의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나도 답답했다. 문제는 질문 하나 답변하지 못한 것이 내 정체성을 의심하는 추궁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긴 침묵과 함께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조사관은 이런 가설을 내세웠다. “너는 중국인이고 북한에서 학교에 다녀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보다는 중국을 더 잘 알고 말하는 억양과 발음도 중국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순간 나조차도 내 정체성이 흔들릴 만큼 혼란스러웠다. 몇 날 며칠을 똑같은 질문에서 제자리걸음이 이어졌고, 그 문제에 완전히 꽂혀버린 담당 취조관은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놓으면 중국에 잘 보내 주겠다는 식으로 반 협박식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답답함에 차라리 죽고 싶었다. 죽어서라도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속 시원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여군 출신이셨던 어머니는 스파이가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으셨고, 여동생과 나는 중국에서 주워 온 아이들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럴듯한 소설 하나가 뚝딱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약속이나 한듯이 유전자 검사를 하면 모든 것이 명백할 것이 아니냐며 당당히 말했고 거짓말 탐지기 까지 기꺼이 응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 한 달이라는 긴 조사 끝에 최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결국 취조는 잘 정리가 되었지만, 말도 안되는 억지와 거짓으로 뒤집어진 우리 마음의 뒷수습은 온전히 각자가 이겨내야 할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취조관은 A4용지를 내밀며 앞으로 한국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써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래서 네 꿈이 무엇이라고?” 하며 묻는 그 얼굴에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저는 앞으로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업신여기는 당신같은 사람들을 혼내줄 거예요.”

 

취조관의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정원 취조관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국정원은 탈북민으로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되는, 환영받지 못하는 곳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제 우리 모녀는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나오게 되었지만, 허탈하기가 그지없었고, ‘하나원’이라는 기관이 남았다는 것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하나원은 남한 정착에 필요한 절차를 밟는 곳이었고 그곳을 거쳐야만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하나원에서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며 모범생처럼 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와 여동생은 선생님들께 말썽 한번 안 부리고 열심히 임했다.

나는 호기롭게 국정원 취조관에게 ‘변호사’가 될 것이라 고 했던 말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법대는 기초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가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았고, 변호사가 되려면 많은 준 비와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능력을 쌓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공부를 해 야 했고, 이를 위해 시간적·금전적 투자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미성년자인 나에게 브로커에게 갚아야 할 돈에다가 학원에 갈 돈까지는 없었기에 법대는 깔끔하게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꿈에만 그리던 대학 생활이 눈앞에 있었다. 빨리 대학교에 가서 모두가 이야기하는 캠퍼 슬라이드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심리가 3개월 만에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어떤 정보도 없이 단 지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나는 대안학교에 있던 선배들에게 들은 ‘외대 중국어학과’가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중국어’는 남한 아이들과 경쟁했을 때 자신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참에 대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외대 재외국민 특별전형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재외국민 특별전형이라고 해도 아무 준비 없이 딸랑 검정고시 합격증만 가지고는 대학교에서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리가 없었기에 떨어졌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검정고시 패스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 외의 준비를 하지 못한 나의 실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힘이 쭉 빠졌지만 그렇다고 내년에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종일 PC 방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려 가며 대학교들의 수시와 정시 마감 일정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숙명 여자대학교의 정시 마감이 내일 오후 5시까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해의 마지막 정시 마감이 숙대였던 것이다. 하루 만에 급하게 서류들을 준비하고 자소서와 추천서까지 받아 원서를 제출하였고, 다행히 1차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두 번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준비하는 가운데 외국어 특별전형 지원자들의 면접 날이 다가왔다.

 

다섯 분의 교수님들께서 면접관으로 앉아 계셨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약 4분 가까이 준비해 온 자기소개에 중문과 교수님들은 높은 점수를 주셨고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여대생이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뛰어든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와 같았다. 맨 땅에 헤딩 하듯 공부 잘하는 그녀들을 쫓아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수강인 청에 월~금요일까지 들쑥날쑥 지혜롭지 못한 시간표를 들고 하루 종일 학교에 대기 했다. 1교시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아침 7시부터 출근길에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곳에 몸을 싣고 아침부터 부리나케 오르막과 계단을 뛰어다녔던 기억은 참으로 행복하고 두 번 다시 없을 소중한 캠퍼스 생활이었다.

그렇게 4년 동안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났고, 좋은 학우들을 만 났다. 숙명여대를 대표하는 앰버서더(ambassador) 활동도 참여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졸업할 때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중간에 휴학도 하고 교환학생으로 외국에도 다녀오고 스펙을 쌓고 컴퓨터 학원부터 랭귀지 학원까지 다닐 때, 나는 그저 학교생활을 쫓아가기에도 바빴다. 그제야 나는 정보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나같은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부 어 이 땅을 밟았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 불리한 조건(disability)을 가진 이 사회의 낙오자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곳에 뿌리가 없음이 불만(handicap)이었다. 알량한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당당하게 말도 못하고 살았다. 대학교 4년 내내 탈북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도 없었고, 몰라도 아는 척 넘어가야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에 그지없었다. 그나마 나의 공허함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건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생활 동안 나는 매주 교회는 나갔다. 청년 부에서 찬양 부에서 섬기며 예배를 참석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깊이 없이, 사모함도 없이,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했다. 웃고 떠들고 마냥 좋은 사람 인척 하며 온갖 가면들을 쓰고 교회에 나오는 나란 사람을 바라보면 다시금 회의감에 빠졌다.

일주일 중 주일에는 행복한 척 웃고 떠들었지만, 월요일에서 토요일을 쳇바퀴 속에 살았고, 집 학교 도서관이 나의 최대 활동 영역이었다. 교회에 가더라도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기도하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나는 온통 거짓 속에 감추어 져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뿌연 안개 속에 나는 갇혀 있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배경도 없었던 나는 우리말로 쓰인 성경일지라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그의 나라는 무엇이고 그의 뜻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목사님께 여쭤보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믿음이 더 커지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알게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아마도 목사님은 나에게 장난처럼 하신 말씀이겠지만 나는 시험에 들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도태되었다.

나는 분명 꿈으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인생에 대해, 신앙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누구에게도 묻지 못 했다. 또 그 자격지심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종교니 뭐니 다 제쳐두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대학교 4년 동안 내가 잘한 일을 꼽아보자면 학교를 대표하는 앰버서더(ambassador)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선배님들께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통역하는 자리에 참석하다가 선배님을 통 해 주로 중국 여행객의 국내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 여행업계에서도 상당히 큰 여행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좋게 보신 대표이사 님의 빠른 결정으로 순탄하고도 빠르게 정식 가이드가 되었다. 뒤에서는 나에 대해 최소 조선족이 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족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은 매우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그들이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기로 더 버텼다. 나이도 어렸고 여자라는 이유로 또 조선족이라는 오해로 나의 입지는 좁았기에 실력으로 인정받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서러움에 많이도 울었다. 어떤 날은 ‘조선족인 주제에 한국인 척하고 다닌다’라는 말을 듣고 억울함에 한숨도 못 자고 운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는 탈북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도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난 사실 북한에서 왔어’라고 밝히면 너는 북한에서 왔기 때 문에 안 된다는 시선이 두려웠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싫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데, 차별 받는 것이 싫었기에 더 밝히기가 싫었다.

그렇게 악바리 기질을 발휘하여 인정받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고객의 컴플레인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 날밤을 새워가며 준비했다. 고궁 투어가 있는 날에는 드라마까지 되감아 보며 재미나는 고궁 관련 에피소드를 준비해 갔다. 만나기 전부터 손님들 이름과 나이를 외우고 첫 만남부터 고객들 이름을 일일이 외워서 불러주면서 얼굴과 매치하여 그들을 기억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이 식사를 잘 못 하면 밤새 죽을 만들어서 다음 날 가져다주는 등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디테일을 나만의 무기로 만들었다. 그렇게 애쓰자 고객들의 평가는 자연스럽게 좋았고 나를 자랑스러운 가이드로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여행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고 몇 년 뒤 좋은 조건에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 옮긴 여행사는 비록 신생 회사였지만, 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고 쉬는 날 없이 여러 대형 행사들로 정신없이 일정이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도중 발생한 고객의 사고가 나에게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손님이 화장실 가던 중 넘어지면서 골반 뼈에 금이 가는 사고 가 발생했다. 통상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 직원들 이 직접 나와 수습해야 하지만 회사의 여력이 부족하여 인력이 부족했다. 환자의 입원 수속과 나머지 관광객 행사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부닥친 나는 과부하가 걸릴 뻔했다.

그런데 회사 대표는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대책 없이 이번 일을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알아 서 처리하길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 너무 무책임 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히 행사는 큰 차질 없이 마무리 되었고, 다친 고객도 잘 수습 하여 귀국시켰다. 이번 일은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에 게 일종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던 나는 3개월 쉬겠다 고 통보하고 힐링을 핑계로 한국을 떠나 먼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휴가는 3개월에서 시작한 것이 점점 늘어져 결국 1년을 온전히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주 잊고 살았다.

한국에 가기 싫을 만큼 그곳이 좋았다. 나중에는 정식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고 외국 에서의 소위 말하는 욜로(YOLO,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뜻의 신조어)의 삶을 살았다. 외국에서는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쌓은 가이드 내공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연봉이 증명했다. 나는 결핍과 공허함을 돈과 커리어로 채웠고, 겉모습만 우아한 ‘한 마리 백조’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두 발을 휘젓고 있는 것과 같은 백조 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뒤처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악착같이 자기관리를 해가며 인간관계를 넓혀 나갔다. 나의 언어 능력은 큰 장점이 되었고, 나중에는 유명 인사들과 대기업 임원들을 모시는 VIP 특별 의전 가이드까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자아도취에 흠뻑 취해 살았다. 이렇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믿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살아도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고독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화려함 속에서 일이 끝나도 텅 빈 집에 아무도 없는 어두움만이 나를 반겼다. 자다 가 일어나면 베개를 껴안고 서럽게 울기도 많이 울었다.

어디에 있어도 내 마음 한편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결핍을 일욕심으로 채웠다. 그렇게 코로나19 팬데믹이 밀려오기 전까지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제 나는 과거의 교만과 알량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내 자아가 얼마나 부끄럽고 거짓 이었는지 말할 수 있다. 조선족이라고 오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나는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했던 결핍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나의 죄에서 왔음을 인정한다.

수년 동안 나를 발목 잡고 있었던 출신에 대한 핸디캡(handicap)이 나에게 불리한 조건(disability)이 아니었음을,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 능력(power),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사망 의 골짜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생명으로 옮겨 주신 구세주이셨다. 육체적으로 가진 장애는 없었지만 이 사회에서 스스로 장애(disability)를 겪고 있던 나를 놀랍게도 변화시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내가 가진 그 틈(gap)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셨다. ‘탈북 민’이라는 수식어를 나에게 불리한 조건(handicap)이라고 여겼던 것에서 감사함(grateful)으로 바꿔주신 것도 예수님이셨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고, 깨지지 않는 자아 속에서 고집스러움과 피로가 나를 가득 지배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부정했던 과거를 회개하며 나아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전 5:17) 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남을 덧입었다. 돌고 돌아 이제야 하나님의 시간표에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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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12화 - 본향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2  (끝)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내가 살던 나라에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경찰들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검문했고 반경 5km 이내로는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철저한 격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길어도 몇 달이면끝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경찰들의 눈을 피해 걸어서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봉쇄가 길어지고 거리의 분위기도 점점 더 흉흉해졌다. 

봉쇄가 길어지고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자 현지인들은 이를 중국인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했고, 나중에는 무차별적으로 아시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정말 이러다가 가족들 얼굴 한번 다시 못 보게 되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과 그리움이 눈 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은 전면적인 봉쇄까지는 하지 않고 있고 방역도 비교적 잘 된 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니 더욱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봉쇄로 인해 한 동안 출입국이 불가능한 상황 이 이어지다가, 잠깐 출국만 가능하도록 허용이 되었다.


그때 그 나라에 살던 대부분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편도 항공권 가격이 평소의 두 배가 넘었지만 그 돈을 지불하고 도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너도나도 한국으로 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나는 그래도 여행사에서 일했던 시절의 인맥을 사용해서 어렵사리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마스크를 세 겹씩 겹쳐 쓰고 비즈니스석 비용을 주고 이코노 미에 앉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내가 2주간 격리할 공간을 위해 동생은 어머니 집으로 이동했고, 내가 동생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지만 어머니와 동생과 부둥켜안지도 못하고 그저 멀리서 얼굴만 보고 반갑다고 인사해야 하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격리하는 동안에는 가족과 영상통화로 그리움을 달랬다. 한국에 와서도 영상통화라니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영상통화 중에 “서윤아, 네 동생이 많이 아프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격리 때문에 멀리서 인사하던 동생의 눈에 초점이 흐렸던 것 같았다.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했었는데 알고 보니 동생은 심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씩씩하던 아이가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을까?

내가 해외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머니와 동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자기를 위해 서는 돈을 잘 쓰지 않으시고 양말에 구멍이 나면 기워서 다시 신으실 정도로 절약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그렇게 아끼고 벌어서 모아둔 돈이 상당했다는 걸 알기에 엄마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필요없는 일이었다. 동생도 규모 있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었기에 나는 나만 걱정하고 챙기면 되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투자사기를 당해서 그동안 모아온 모든 돈을 잃고야 만 것이었다. 함께 투자했던 동생은 너무나 좌절한 나머지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돈을 아끼시고 모으시던 분이 왜 투자를 하려고 하셨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동생의 상태는 심각했다. 몇 번이고 자살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정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추워했고 불면증에 시달릴 뿐 아니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너무 걱정이 되어 격리가 끝나자마자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이것은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었다. 동생의 건강도 건강이었지만 사기를 당한 집이 으레 그렇듯 어머니도 마음의 병이 깊었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싸우기가 일쑤였다.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집이 지옥이 되고야 말았다. 집에 있으면 너무 진이 빠지고 괴로워서 밖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할 때에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때가 장마철이었는데 비를 맞으며 집 밖에 서서 많이 울었다. 나중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아는 언니들의 집을 전전 하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는 집에서 독립해서 살 수 밖에 없었다. 우울한 나날들 속에서 내 마음속은 번민으로 들끓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났는지, 왜 한국에까지 왔는지 등등 온갖 질문 들이 마음에서 올라왔다.

 

죽고 싶은데 이렇게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왜 이런 상황이 나에게 온 것일까? 정말 사후세계는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들로 가득 찼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답을 풀어 낼 수 없었다.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무렵, 숙명여자대학교 학부 시절부터 나의 지도교수님이셨던 소은희 교수님께서 내게 연락을 주셨다. 학업에서도, 신앙에서도 항상 나에게 조언해 주시고 도움을 주셨던 고마운 분이었다. 해외에서도 종종 연락드렸고, 평소 같았으면 귀국 후 먼저 찾아뵈었을 텐데 고단한 삶에 경황이 없어 연락을 드리지 못했더니 교수님이 먼저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서윤아, 너 한국에 와서 뭐 하고 있니?” 교수님의 질문에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대뜸 “교수님, 저 죽고 싶어요.”라는 대답 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는 교수님께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고 죽고 싶다는 소리만 했다. 내 상태를 확인하신 교수님은 내일 자신의 집으로 꼭 오라고 하셨다. 다음날 교수님 집에 찾아가서 차를 마셨다.

 

교수님께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다. 나는 교수님 앞에서 펑펑 울며 많은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입니까? 교수님?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겁니까. 잘사는 듯 보였는데 지금에 와보니 엄마는 이렇고 동생은 이렇고….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죽고 싶은데 진짜 천국이 있는 건가요?” 교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무례하게 들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정말 절실하고 간절했다.

 

“교수님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시는데 교수님이라서 그게 가능한 거잖아요. 저는 지금이라도 죽고 싶어요. 그러면 저는 천국에는 못 가겠죠….” 다 토해놓고 나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서윤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교수님,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하세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저만큼 가난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평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고, 또 지옥과 같은 지옥 같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천국이 어떻게 제 것이 됩니까?”

 

그때 나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믿고 있던 교수님께 대들 듯 이 쏘아붙였다. 그 동안의 정체성의 혼란과 고단한 인생의 이유에 대해 펑펑 울며 쏟아놓는 내 모습을 보고 교수님은 함께 우셨다. “교수님은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저는 어느나라 사람인가요?” “서윤아,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야. 그러니 이 땅에서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아. 하나님은 너를 알고 계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니까.”

“네?!”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처음 듣는 그 말에 내 머리는 망치로 맞은 듯 번쩍했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서윤이가 대학교에서 앰버서더로 활동을 했잖니. 네가 숙대를 대표하는 앰버서더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를 이 땅에도 특파원으로 파견하신 거야. 그러니 너는 북한 사람도, 남한 사람도, 미국 사람 도 아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란다.” 

 

교수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을 바라봐야지, 이 한 쪽 아래서 저 멀리까지 내다보려고 하니 볼 수도 없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란다. 하나님은 너를 그렇지 만들지 않으셨는데, 너는 계속 네 힘으로 해 보겠다고 하니 많이 고단했을 것이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수님의 입을 통해 나에게 전해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흐느껴 울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들과 말들이 일견 충격적이기 더 했지만,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사망의 길을 걷고 있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세계의 말씀들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께 다시 여쭈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먼저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하니 성경을 봐야 해.

그리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할거야.” 사실 그전에도 성경 공부를 하자고 교수님께 서 여러 번 권하셨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핑곗거리를 대며 피할 수도 없었고 죽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온라인으로 매일 밤 1:1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말 성경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교수님께서는 중국어 성경과 우리말을 함께 공부하자고 하셨다.

그렇게 교수님께서 몇년 전에 선물로 주셨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같이 공부하니 그동안 몰랐던 말씀의 의미를 더 깊게 깨달아졌다. 과거에는 성경 말씀 한 장을 읽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말씀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서 나와 함께 숨 쉬는 것만 같았다. 밤낮으로 말씀을 들었고, 그 일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동할 때도 오디오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다녔고, 잘 때도 말씀을 듣다가 결국 날밤을 새울 정도로 말씀이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성경 공부를 통해 삶의 새로운 세계와 비전을 보게 된 나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교수님하고 성경 공부하면서 여동생을 다시 예전처럼 살리고 싶어 기도했고 예수님께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동생은 예전부터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하러 교회 다니냐며 비판을 했었다. 그러니 성경 공부를 하자고 동생에게 선뜻 권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했던 소원이 이루어져 동생이 용기를 내어 우리 집에 와서 내 옆에서 자연스럽게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은 하나님을 만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안 되었던 동생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점차 치료가 되는 놀라운 과정을 겪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다시 살았더니, 그리고 이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우리 집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내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동생 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얼마나 놀라운지... 제삼자가 어떻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분이심을 나는 고백한다. 낙심하고 괴로워서 자책 하며 울 때도 늘 나와 함께 하셨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달란트를 주셨음을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잘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 들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제 나의 꿈은 180도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졌다. 또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졌다.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세상 지식은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이 진리와 복음을 모르는 과거의 나와 같은 북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전에는 그들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떠 올라 안타까웠고 울면서 기도하게 하셨다. 꼭 나처럼 헤매고 있는 그들의 심령들을 위로하며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앰버서더가 되리라 다짐했다. 이런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가던 어느 날 교수님은 나에게 신학을 공부해 보기를 권유하셨다. 제대로 배워야 통일이 되면 북한의 아이들에게, 또 고향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권면해 주셨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기에 내가 고 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겼다.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과거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가 결정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이 가장 좋은 길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은혜 가운데 진행되어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의 3년이란 기간 동안 순조롭게 술술 풀린 일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일도 있었다. 이 길이 안락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대학원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부조리하고 부당한 가운데서도 너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계신다. 세상은 나의 주변을 흔들고 나를 끊임없이 유혹 하며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나의 우직한 결단이 나를 살게 함을 다시금 고백한다.

 

그 결단은 바로 “사람을 위해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다.”라는, 사 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다. 그와 같은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생명 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다.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도 대답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숙제를 끝내면 하나님 계시는 본향으로 가는 것이다.” 이 모든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근본 지혜와 지식을 배우게 된 것은 더없는 기쁨이며 작은 실천임을 고백한다. 


살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죽어 있었고, 밑동이 잘려버린 나무처럼 죽었던 삶이 다시 뿌리를 이어내려 갈 수 있게 해주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한 영혼을 귀하게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하다. 이제 본향, 나의 고향인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이곳에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 그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서윤 전도사님의 탈북민 수기 “이끄심”을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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