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修業時代),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風化)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醉氣)처럼 올라온다 웬 들판이 이렇게 넓어지고 얼마나 빨간 작은 꽃들이 지평선 끝까지 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物體)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房)이었다 인형(人形)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敎會)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房)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空氣)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戀愛)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門間)을 지나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