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명설화》89편
을미왜변의 영웅 한온이 태어난 평택 금암리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金岩里)는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순국한 한온(1511~1555)의 충절에서 생긴 지명이다. 한온(韓蘊)은 을미왜변에서 죽은 뒤 충의(忠毅) 시호를 받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받는다. 이 충신정문 현판에는 “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라 쓰여 있다. 곧,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한마음 나라에 바쳤도다.'라는 뜻인데, 쇠 철자에서 금(金)을 따고, 돌 석(石)자에서 바위 암(岩)을 유추해서 지금의 금암리가 되었다고 한다.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金岩里)는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순국한 한온(1511~1555)의 충절에서 생긴 지명이다. 금암리에 가면 한온(韓蘊)의 충절을 기려 세운 한온장군 충신정문이 있다. 그 입구 현판에는 “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라 쓰여 있다. 이를 번역하면,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한마음 나라에 바쳤도다.”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쇠 철자에서 금(金)을 따고, 돌 석(石)자에서 바위 암(岩)을 따서 금암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 금암리에는 북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변해서 금암이 되어 지금의 금암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을묘왜변과 금암리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창자는 쇠붙이(金), 쓸개는 돌(石) 한온의 충절
평택은 ‘평택섶길’이라는 걷기 길을 개발해서 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중에 8코스인 ‘황구지길’이 있다. 이 길은 황구지교에서 지위역에 이르는 12.4km의 길이다. 이 길은 금암리를 지나가는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온장군 충신정문을 만나게 된다. 정려문 앞에 가면 현판이 있고, ‘철장석선 일심순국(鐵腸石膳 一心殉國)’이라 쓰여 있다. 즉 ‘창자는 쇠붙이(金)와 같고 쓸개는 돌(石)과 같아라. 한마음 나라에 바쳤도다.’라는 뜻이다. 이 글은 후세 사람들이 한온 장군을 한마디로 표현한 구절이다. 한온 장군은 지금의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에서 탄생했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8세에는 전라도 장흥부사로 임명되었다. 장흥에 부임한 한온은 백성들의 생활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장흥보다 이웃 고을이 더욱 흉년에 고생을 하고 있음을 보고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을묘왜변(1555년)이 일어나 장흥 달량진(達梁鎭)에 왜선 70여 척이 쳐들어왔다. 이에 한온은 방어를 하는 한편, 조정에 파발을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조정에서는 절도사 원적을 보내 한온을 돕게 하였으나 원적은 포로가 되어 죽었다.
한온 자신은 죽 한 그릇으로 하루의 끼니를 때우면서 병사들에게는 밥을 먹였다. 그렇게 하면서 적과 대항해서 싸웠다. 한온이 적과 싸우던 중 칼이 부러져 맨몸으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한온의 용맹을 두려워하던 왜적은 그의 시체를 갈갈이 찢어 성벽에 걸어 까마귀밥이 되게 하였다. 왜적은 한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싸움을 하기 전에 미리 상소문을 만들어서 조정에 보냈다. 한온은 여색을 좋아하고 주민을 괴롭혀 재산을 모은다는 가짜 내용을 보낸 것이다. 조정에서는 상소만 믿고 그를 처벌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 이율곡이 한온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한온의 처벌을 극력 반대하고 직접 현지에 내려가 조사하기로 했다. 율곡이 장흥에 내려가 보니 달량포구는 이미 왜적의 손에 들어가고 한온의 시체는 날짐승의 밥이 된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더니, 상감은 눈물을 흘리며 한온의 넋을 위로하고, 한온의 충성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널리 알리게 하고, 교시를 내려 병조판서로 추증을 하였다.
참고자료
단행본
김기빈. 한국지명의 신비. 서울:지식산업사, 1992.
기타
김혜경, "7월 평택 역사인물-한온 장군", 평택시민신문, 2010.07.01
기타
김희태,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한온장군 충신정문’이 들려주는 역사의 흔적", 평택자치신문, 2018.08.13
집필자
이학주
시대/연대
· 시대 : 조선-조선 전기(1392~1592)
· 연대 : 1500 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