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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에 대하여~3탄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23.01.24|조회수58 목록 댓글 1

숙종과 영조의 여인들 이야기

숙종의 능은  서오릉에 있는 명릉이다.

숙종의 첫 왕비는 인경왕후이다 .
인경왕후는 후사없이  천연두로 인해 1680년에  왕후가 된지 6년만에 죽었다.인경왕후 능은 서오능의 익릉이다.숙종의 명릉과는 언덕 하나 사이이다.

두번째 왕비는 인현왕후이다. 
인현왕후는 장희빈 때문에   폐비되어 친정인 감고당으로 쫓겨 났다가  다시 복위 되어 환궁 했지만 얼마 안가 죽었다.
희빈과 같은 해에 죽었다.드라마에선 천사표로 그려지곤 하는데 홧병으로 죽은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던 듯 하다.
세번째 왕비가 장희빈인데 인현왕후를 저주 하다가 
폐비되었었다.왕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상태였는데 그 래도 반성을 안한다고 숙종이 사약까지 내려 사사했었다.
장희빈은 얼굴은 고운데 성질이 고약 했던 듯 하다.자신을 후궁으로 천거한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죽을 때는 친자식을 성불구자로 만들었다기에 하는 말이다.숙종이 오죽하면 사약을 내렸을까?희빈이 인현왕후 보다
8살이나 많았었다.나이 값도 못한 것이다.
 
네번째 왕비는 인원 왕후이다.
인원왕후는27살 많은  숙종과  18년이나 같이 살았지만  숙종의 사랑은 받지 못했다.저 중에 누가 숙종곁에 묻혔을까?
숙종의 유언에 따라 숙종은 인현왕후 옆에 묻혔다.원래는 조강지처인  인경 왕후 결에 묻혀야 하는데 왜 그랬을까?숙종은 장희빈의 농간에 놀아나 인현왕후를 폐비시켜 궁밖으로 내쫓았던 일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해서 그랬을 것이다.
숙종은 김만중이 쓴 사씨 남정기를 읽고 나서  인현왕후한테 모질게 대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단다.
저렇게라도 해서 사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원 왕후는 생전에  자기도 숙종 옆에 묻히기를 소원했었다 .
영조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어
동원 이강릉이지만 숙종 가까이 묻어 주었다.인원왕후는 숙종 사후 대비가 되어  왕실의 어른 행세를 했었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를 남길 수도 없고 언제 붕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었다.
노론들이 나서서 연잉군이 세제가 되는데 앞장섰었다.그때 인원왕후가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노론의 대신들은 심야에 궁으로 몰려가서 심약한 경종을  겁박하여 수결까지 받아냈었다.

더구나 연잉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 되었을 때도
연잉군을 구해 준게 인원 왕후였었다. 그리니 인원왕후 소원을 왕이 된 연잉군 즉 영조가 안들어 줄 수 있었겠는가?

장희빈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묻혀 있다가 그 곳에 고속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1970년에 서오릉으로 이장시켰었다.하여간에 숙종과 숙종의 왕비는 죄다 서오능에 묻혀 있다.
서쪽 구석에  자리잡은
장희빈 묘는 능도 아니고 대빈묘라서 홍살문은 커녕 정자각도 없다.석물도 아주 적어서 초라하기 이를데 없다.

영조의 친모 최숙빈과 진종의 친모 정빈이씨는
파주의 소령원과 수길원에 묻혀있다.소령원과 수길원은 비공개이다.

진종은 9살 때 죽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인데  부인 효순 소황후 조씨와 함께 파주 3릉에 있는 영릉에 쌍릉으로 묻혀 있다.효장세자는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나중에 황제로 까지 추존 되었다

경종의 능은 석관동에 있는 의릉이다.의릉은 동원 상하릉으로 아래에 있는 능침이 
신의 왕후 어씨이다. 경종이 워낙 재위기간이 짧고 힘이 없었던 왕이라 쓸게 별로 없다.

영조의 능은 동구릉에 있는 
원릉이다.
영조는 조강지처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자 했지만 정순왕후가 기어히 동구릉에 묻었다.훗날 정순왕후는 영조와 나란히 묻혔다 .정순왕후는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남편곁을 차지 하려고 기를 썼던 것이다.

서오릉에 있는 영조비 정성왕후 능인  홍릉 옆이 지금도 비어있는 것은 저런 이유 때문이다.그 자리가 바로 영조가 묻히고자 했던 자리이다.

정순왕후는 삼간택 때 말 한마디를 기가 막히게 잘하여 왕비로 간택되었었다.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소금이라고 답했단다.
그 한마디에 녹아서 영조는 그녀를 간택 했단다.

영조와 정순왕후는 52살 차이이다.손녀뻘이다.영조가 팔순 고령에 정순 왕후를 제대로 품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둘사이에 아들은 커녕 딸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무늬만 부부였는지도 모른다.그래서 정순 왕후는 죽어서라도 영조와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단종비도 정순왕후이다. 두 정순 왕후는 동명이인이다.두 사람 다 팔자가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그러고 보면 정순 이란 이름이 문제인가 보다.

혜경궁 홍씨가 새시어머니 정순 왕후 보다 10살 더 많다.정조보다는 정순 왕후가 7살 많다.혜경궁 홍씨가 나이 어린 시어머니 정순 왕후를 모시느라 맘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며누리로서  시어머니에게  조석으로 문안인사를 드려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그래도 혜경궁이  정순왕후 보다 10년이나 더 살았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죽은 뒤에도 30년이나 더 살았다.혜경궁은
영조보다  40년이나 더 살았다.
두 여인은 정조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정조는 1800년에 붕어 했고 혜경궁은 1815년에 죽었다.

따지고 보면 혜경궁의 팔자도 참으로 기구하다 젊어서는 남편 사도세자가 은전군의 어미  빙애와 사랑에 빠져 자신은 소 닭 보듯 했는가 하면 남편 사도 세자가
영조와 피터지게 싸우다  뒤주안에서 오뉴월 염천에 물 한 모금 못 먹고 굶어 죽는 걸 지켜 보아야 했었다. 뿐만 아니라
친정 삼촌과 형제들은 자신의 아들 정조에게 사사 되어 자기친정이 멸문 지화를 당하는 꼴도 지켜봤으니 말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때문에 억울 하게 죽었다고 생각한데다
구명에 나서지 않은 자신의 생모 혜경궁도 용서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창경궁에 경모궁을 짓고 거기서 살도록 했었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경모궁에서 팔순  넘게 살았으니 대단히 모진 여인이다.혜경궁이 오래 살다보니 할 일은 없고  심심한 나머지 한중록을  썼을 것이다.

빙애는 사도세자가 목숨 걸고 사랑한 여인이다.영조가 빙애와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자 사도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 했었다.
 그런데 빙애는 사도에게 맞아 죽었다.사도가 의대증이란 정신병에 걸려 있었는데 발작 하여 빙애를 때려 죽였던 것이다.
너무도 이쁘고 착했던 빙애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 하려다 화를 당했단다.
빙애가 낳은 은전군은 사도세자의 얼자요 ,서자이다.
은언군과 은신군도 사도의 서자인데 은전군은 또다른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전군은 조선의 왕자 중에 가장비운의 왕자이다.사도가 정신병이 발작하여 은전군을 우물에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은전군은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정조에 의해 사사 되었다.정조를  암살 하려던 전홍문이란 자객이 붙잡혔었다.그 자객이 은전군이 배후라고 거짓 자백을 하여  은전군은 영문도 모르고 억울 하게 죽었다.정조는
은전군이 억울 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약을 내렸다.은전군을 죽여야한다는
대신들의 성화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사도 세자의 애사만 기억하고 빙애와 은전군의 슬픈 사연은 알지도 못한다.

정순왕후와 정조는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7살 밖에 많지 않으면서도 명목상 할머니 노릇을 하려 했을 뿐 아니라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상위 어른 노릇까지 하려 했으니 말이다.
오늘도 여기 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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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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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서울미니 | 작성시간 23.01.25 조선 실록에 흠뻑 빠져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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