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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 왕릉에 대하여~4탄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23.04.08|조회수72 목록 댓글 0

조선 왕릉에 대하여~4탄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정조의 능은 화성 융건릉에 있다.
융륭은 사도 세자의 능이고 건릉이 정조 대왕 능이다.
융릉에는 사도와 혜경궁홍씨가 합장되어 있고 ,
건릉에는 정조와 효의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사도와 혜경궁이합장되었다는게 참 우프다.
둘은 살아 생전에 빙탄 관계였기 때문이다.사도를 죽음으로 몬게
혜경궁의  친정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친정 오라버니들이었지 않은가?혜경궁 또한  사도가 뒤주안에서  굶어 죽어갈 때 구명운동은 커녕  수수방관 하다 못해 뒤주 앞에서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울부짓는 이산의 손을 강제로 끌고 나갔었다.그녀가 왜 그리 했을까?
사도가 왕이 되는 날엔 자신의 친정은 풍비 박산이 날 걸 염려 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 정조에 의해  자신의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할 거라는 건  미쳐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사도의 묘는 원래 배봉산 즉 청량리 위생병원 자리에 있었다. 창경궁에서 지척에 있었다. 그런데 혜경궁은
33년 동안 한 번도 사도의 무덤을 찾지 않았었다. 그런 혜경궁을 아버지 사도에 대한 효성심이 지극했던 정조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혜경궁도 합장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가 합장시킨 것도 아니다
정조가 혜경궁보다 15년이나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순조가 합장시켰는데  무슨 억하 심정으로
그랬을까?
살아서도 불편했던 부부는 순조로 인해 죽어서도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정조는 사도의 묘를 배봉산에서 화성으로 천장시켰었다.
화성의 융릉은 옛부터 명당으로
소문나 있었다.그러나 그 곳에는 백성들이 너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그래서 광해군과  현종도  선왕을 그곳으로 모시려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을 밀어 부쳤다.백성들에게는 보상금을 주어 수원으로 이주 시켰다.그리하여 융건릉과 화성 별궁이 생겨나고 오늘날의 수원시가 생겨난 것이다 .정조는
창덕궁에서 화성의 융릉을 13번이나 참배 했었다.혜경궁은 1795년 딱 한 번 동행했었다.
그것도 자기회갑연 즉 진찬연을 받아먹기 위해서였다.사도와 혜경궁은 동갑내기이다.
사도로서는 사갑이었다.

정조와 정조의 능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정도로 그친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정조에게는  순조말고도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라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5세 때 홍역을 앓다가 조사 했다.문효 세자의 묘는 효창공원  근처 청구 언덕에 있었다.같은 해에 죽은 의빈성씨도 아들 묘 근처에 묻혔었다.정조가 덕임이 묘를 자주 찾기 위해 궁궐에서 십리 밖에 묻었었다.
태조비 신덕왕후는 도성안 정동에 있다가  태종에 의해  성북구 정릉으로 천장되었다.
그 이후  도성안에는 묘를 쓰지못하게 하는 법이 생겼었다.
그래서 정조는 최대한 도성 가까이 덕임이와 문효세자  묘를 썼던 것이다

하지만 저 모자의 묘는 1944년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서삼릉으로 천장되었다.

일제는 그 자리에 골프장을 만들었다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지었었다.지금은 다 없어지고 효창공원이  되어  있다.

효창동과 효창공원의 효창은 효창원에서 비롯 되었다.효창원은 이름만 남기고 서삼릉으로 떠난 것이다 서삼릉 효창원은 비공개라서 답사 하려면 사전에 예약 해야 한다.

의빈 성씨는 무수리였지만 정조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다.
의빈 성씨는
얼마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인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요즘 덕임이 묘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단다.그런데 멋모르는 이들이 덕임이 묘가 서삼릉 내 효창원에 있다는 것 만 알고  무작정 서삼릉으로 찾아갔다가  사전 예약제로 인해 허탕치곤 한단다.

순조는 정조의 차남이다.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장남 문효세자가 조사하여 아들이라고는 못난이 순조 밖에 없었다.그래서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가 한 일은 거의 없다.그는 덩치만 컸지 쪼다 중 쪼다였다.그는 안동김씨들을  등에 업은 마누라에게 마냥 휘둘렸다.
그가 한 업적이 있다면 효명세자를 낳았다는 것 뿐이다.
그는 심지어 말년에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창덕궁 후원에 있는  99간짜리 한옥 연경당에 물러나 있었다.
그의 마누라가 악명높은 순원 왕후이다. 순원왕후가 바로 김조순의 딸이다. 그녀가 안동김씨들의 세도 정치를 불러온 장본인이다.그녀는 헌종과 철종대 까지 수렴 청정을 하며  조선을 말아 먹었다.
  조선의 왕자 중 가장 잘 생기고 똑똑했다는 효명세자는 안동김씨들에 의해 독살 당했다. 
효명세자는  예악정치로 왕권을 강화하고 안동김씨들의 세도 정치를 종식 시키기 위해 성균관유생들과 신진 사대부들을 규합 하고 있었다.
그 꼴을 지켜만  보고 있을 안동김씨들이 아니었다.
건장하고  너무도 건강했던 그는
어느 날 저녁에 인절미 하나를 먹고  쓰러져 급사 했다. 물론 안동김씨들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펄쩍 뛰고 있다.뚜렷한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정황상 독살설을 믿고 있다.

순조의 능은 강남구 세곡동 헌인릉에 있는 인릉이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인릉은 원래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던 자리이다. 그 자리가 흉당이라고 
여주로 천장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순조의 능을 덮어 썼다.당시 왕실 재정이 어려워 장례 경비를 절약 하려고 그랬단다 말이 되는가?순조가 힘이 있었던 왕이었다면 그랬겠는가? 그런데 순원왕후가 죽자 그 자리에 합장되었다.
안동김씨들은 왜 그녀를 흉당에 합장시켰을까? 그들은
명당에 조선왕의 능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오히려 흉당에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마르고 닳도록 세도 정치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효명세자는 사후에 익종으로 추존되고 나중에는 문조황제로 까지 추존 되었다.
문조의 능은 동구릉에 있는 수릉이다 수릉은 문조와 신정왕후 즉 조대비의 합장릉이다.

그 이후 조선은 안동김씨들에 의해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순원왕후를 순조의 배필로 정한게 바로 정조였단다.정조는 죽으면서 까지도 순조를 순원 왕후와 혼인시키라고 유언을 남겼단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경주 김씨들의 세도 정치에 데었기 때문이었다.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 보다 자심 했던게  경주 김씨들의 세도 정치였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 정순 왕후가 바로 경주김씨이다.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김한구이고  친정오빠가 김귀주이다.  저 부자가 사도를 죽음으로 몬  임오 화변의 일등공신이다. 저 부자가 나경언의 배후 인물이다.
나경언은 사도를 죽여야하는 이유 열가지를 영조 앞에서 고변했던 인물이다.하지만 나경언은 사도보다 먼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원래 남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다가는 자신이 먼저 물에 빠져 죽는 법이다.
영조도 참 웃기는 사람이다.  자신이  친 아들을 굶겨 죽여 놓고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말이다.사도란 그리워 하며 애도 한다는  뜻 아닌가?
따라서  사도란 시호에선
영조의 진정성이 일도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사도가 미친 나머지 스스로 죽을  짓을 한 건 맞다.그렇지만 사도가 미치도록 만든 건 영조 자신이다. 나는  자신의 왕위를 보전 하기 위해서  영조가 아들을 굶겨 죽였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오늘도 여기 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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