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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산실 오대산 상원사

작성자미션|작성시간23.08.21|조회수96 목록 댓글 1

#.문화공감
#.한글창제
#.오대산 상원사


🎱한글의 산실 오대산 상원사


한글은 전 세계 문자 중 창제 목적과 제자 원리가 뚜렷하게 밝혀져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이로 인하여 그 독창적인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7년 『훈민정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한글의 창제는 일반적으로 집현전 학자들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당시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가 한글창제에 반대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세종의 주도로 만들어진 한글

『세종실록』 권103의 1444년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한글 창제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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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쓴 훈민정음 서문 부분. 呎否合会 1962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반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최만리는 '중국을 섬기고 사모함에 부끄러움이 있다.'
,'독자 문자를 갖는 것은 오랑캐가 할 짓'이라 말하고 있다.
또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대제학이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고 부제학이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점에서 최만리의 이와 같은 판단과 발언은 집현전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세종의 반론이다.
세종은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지 아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세종이 집현전과는 다른 특수한 비밀조직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원사, 한글의 고향으로 우뚝 서다

한글 창제를 주도한 인물은 국왕 세종과 당시 동궁이었던 문종 그리고 수양대군과 실무자인 신미 대사, 수미 학열 학조 등이다. 이들을 분류하자면 크게 왕실과 상원사 승려로 구분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왕실이 한글 창제를 주도한 이유는 백성을 계몽해 개국공신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좋게 말하면 세종의 애민이며, 나쁘게 말하면 왕조의 안정을 위함이라고 하겠다.

한글 창제에 불교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자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문자 구조를 요청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자 중 한자와 필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불교와 관련된 인도 문자그리고 인도 문자 체계 외엔 달리 없었다.
한편 유학자들은 사대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문자 창제에 비판적이었다.
또 그들은 한문에 능숙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난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까지는 영향력 있었던 불교계에 도움을 요청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한글) 글자체는 인도글자를 본받았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상원사가 대두되는 이유는 집현전 학자 출신의 당대 최고 고승인 신미 대사가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미는 당시 최고의 문신이자 실력자였던 김수온 1410-1481 의 친형으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후일 세조는 신미대사와 그의 두 제자인 학열, 학조를 '삼화상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신미 대사와 수미는 1461년 간경도감이 설치되자 이를 주관하면서 불경의 한글 번역을 주도한다.
이 간경도감에 의한 언해는 한글의 정착과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가장 오래된 친필 한글 문서, 어첩御牒

한글 창제는 세종의 강력한 의지와 신미를 대표로 하는 상원사의 고승들, 그리고 이 양자를 연결했던 수양대군의 노력에 의한 결실이다.
이를 증명하듯 월정사성보박물관에는 국보 제292호 어첩-상원사중창권선문 「五臺山上院寺重會影善文이 소장되어 있다.
이 어첩은 1464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친필 한글 문서이다.
목판본인 훈민정음이 1446년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문서의 제작 연도는 다소 늦다. 그러나 손으로 직접 쓴 문건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이 어첩에는 세조가 불제자 이유라고 자신의 이름을 쓰고, 이와 함께 수결과 옥쇄를 찍었다.
이로써 상원사와 세조 사이에 얽힌 인연과 한글 창제에 관한 사연을 오늘날까지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어첩 - 상원사중창권선문, 국보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정사성보박물관

'불제자 조선국왕 이유라는 세조의 이름과
수결 즉 사인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월정사성보박물관

출처: 오대산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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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제야 | 작성시간 23.08.21 아! 이렇게 소중한 정보 고맙습니다.
    부끄럽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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