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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다워라.

작성자낭만|작성시간24.01.28|조회수291 목록 댓글 41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펌함

 

추억은 아름다워라                      

 

나에겐 평생 단 하루 뿐인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나는 50대 후반 큰아들 며느리 둘 다 약국을 운영하기에

어린 손주 때문에 잠깐 수원 금곡동에 있는 엘지 빌리지라는  아파트에 가 살았다.

당시 그 주위는 논이고 밭이 있는 청청지역이었다.

 

남매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햇살이 유난히도 눈부신 날

나는 늘 보는 논과 밭을 둘러보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별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밭을 갈던 농부가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시를 읊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워드워즈의 시를...

시인도 아니고 흙을 만지며 사는 남자가

푸른 초원에서 밭일을 하는 것도 목가적인데 시까지 읊다니.

난 정신이 뿅 갔는지 나도 모르게 밭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한때는 찬란한  빛이였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없는 /  초원의 빛이여  / 꽃의 영광이여 /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은들 어떠리" 라고 읊는다.

 

난 조심스레 시를 경청하다 시 마지막 구절엔 나도 거들어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 오히려 남아있는 것에 힘을 얻으리" 둘이 함께 끝냈다.

 

와! 이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환상이었다.

나이 비슷한 남녀가 연두빛 대지 위에 서서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로 하늘을 보며

시를 읊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내 가슴엔 희열이 넘쳐났다.

주위는 유난히 햇살이 희고 넘쳐나 모든 것이 눈이 부셨다.

남자는 밭 일을 뒤로 미루고 나하고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산책했다.

 

야트막한 칠보산 초입의 숲은 언제나 다정했다.

이미 영혼으로 스며드는 시를 읊은 뒤에 얻은 나의 감정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떴다.

 

둘은 걸으면서 아득한 학생시절 청춘남녀의 애절한 이루지 못하는 첫사랑을 그린

추억의 명화 ' 초원의 빛'을 신나게 얘기하며 내가 여 주인공 나탈리 우드인 듯한 기분도 느꼈다. 

 

나는 여러 시인에대해  시에 대한 대화로 

이미 그 남자의 외모에 인품에 지식에 감성에 매료되었다.

 

산 정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공기가 맑다.

봄바람이 분다.

물을 들이지 않아 희디흰 그 남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간간이 주고받는 미소는 샘물처럼 달고 싱그러웠다.

 

나뭇가지마다 어린 새 초록 날개를 펼친 듯

연한 새 잎에 천사들의 복음 같은 이슬을 보며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또한 이 남자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순수한 감정을 소중하게 보듬었다.

 

집에 와서 난 그 남자를 생각했다.

오늘 오전은 너무 멋있고 근사한 하루다.

그리고 그 남자는 너무 잘 생겼고 멋있어.

 

나는 중얼 거렸다.

“'사랑은 논리보다 먼저' ‘더 사랑하고 덜 논리적으로 하라’라는 글이 있지.”

“이게 뭐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 오전에 한 행동이 사랑인가?”

나는 지금 내 마음이 그 남자로 인해 행복한가 하고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마.

시가 있어 좋았고

산책길이 좋았고

연두 빛 나뭇잎들이 좋았을 뿐이야

남자는 그냥 스치는 바람이야.

그렇지만 그 남자는 너무나 멋져.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말자.

 

혈액 속에 녹아든 사랑 비슷한 잔영으로 가슴엔 오묘한 감정이 감돌았다.

나는 소녀처럼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후 난 늘 그 시간에 그 사람이 밭일 하는 것을 먼발치로 보았다.

간간이 일하다 얇은 시집 같은 책을 보고 있는 농부를 보면

난 막 뛰어가 같이 읽고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을 자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남자가 생각날 때마다

남편에게 안아 달라고 칭얼댔다. 

 

얼마 뒤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난 단 한번 만났던 그 남자를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이가 80살 쯤 되었을텐데.

밭에서 아름다운 시를 같이 읊던 장면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름답고도 고운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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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샛별사랑 | 작성시간 24.01.30 남만님~
    여고시절 잔듸밭에서 네잎클로버 찾으면서
    "초원의 빛" 낭송했든 추억이 생각 나네요.
    선배님은 그때부터 문학의 뛰어남을 보이셨네요.
    순수하고 고운글에 감동 했습니다.
    고운꿈 꾸세요.
  • 작성자동구리 | 작성시간 24.01.30 연세가 8십인데도 이렇게 낭만적인 옛이야기를 소환해내시니
    역시 낭만이 많으십니다 역시 문학소녀이시고요

    삶방에서 이렇게 스토리텔링을 잘 만들어 멋진글을 쓰시는 낭만님은 역시 문인이십니다
  • 작성자담경 | 작성시간 24.01.30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등록되어 낯설지만 좋은 글 읽으며 힐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학창시절이 소환되었고 저도 초원의 빛을
    한 때는 외웠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합니다.
    수필 한 편 읽은 느낌으로 추억에 젖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낭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1.30 네 담경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 학창시절엔 초원의빛을 보고는 모두 가슴을 설레였지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드리고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이야기방에 좋은 글 올려주셔셔 읽는 즐거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신선 | 작성시간 24.01.31 역시 낭만 작가 님이세요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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