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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4)

작성자리노정|작성시간24.02.14|조회수147 목록 댓글 6

휴전 후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인천으로 모이다.
 
 6.25 전쟁으로 전국으로 뿔뿔이 피난 갔던 친척들은 휴전이 되자 모두 인천으로 이주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통일이 되면 고향이 있는 황해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인천이기 때문이다.
 
둘째 오촌 아저씨를 잃은 셋째 작은 할아버지 식구도 피난 갔던 전남 해남에서 인천으로 이사 왔다.
전쟁 후에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식구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둘째 오촌 아저씨의 행방을
알아보았지만 생사가 묘연하였다.
 
안타깝게도 둘째 오촌 아저씨에게는 학도 병 입대 1개월 전 결혼한 부인(나에게는 당숙모).이
있었는데 18세에 결혼한 당숙모는 자식이 없었다.
 
동병상련 이라 고나 할까 26세에 청상과부가 된 나의 어머니와는 아주 친했다.
당 숙모는 나의 어머니를 만날 적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고나 할까 인천에 온 지 1년 후 당숙모는 지인의 소개로
서울 사는 2명의 자식이 있는 홀아비와 재혼하였다.
당숙모는 재혼하고 나서 2차례 어머니를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전혀 왕래가 없어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서 새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계시리라 믿고 있다.
지금 생존해 계시다면 90세가 훨씬 넘었을텐데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만나 뵙고 싶다.
 
나의 둘째 할아버지 식구들은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가기 위해 나의 할아버지 식구들과 함께
어느 깊은 시골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첫째 딸(나에게는 고모)이 이곳을 갑자기 찾아와 둘째 할아버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북한군이 점령한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나의 고모는 중학교 6학년생이었는데 이북 공산당을 추종하는 학생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 전에는 국경 순찰이 느슨하여 국경 부근에 사는 남쪽과 북쪽 사람들은 비밀리에 왕래하고 있었다.
접경 지역이라 그런지 중학교(6년제)에서도 좌, 우익 학생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나의 셋째 할아버지는 남한 정부가 1.4 후퇴를 발표한 후 이곳 황해도 옹진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남쪽으로 피난길을 그의 형인 나의 할아버지와 의논하기 위해 한 밤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밤 귀가 길에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인민군들은 셋째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잡은 포로들을 마치
굴비엮듯이 포승줄로 일렬로 묶은 후 근처에 있는 광산의 굴로 데려가 모두 총살시켰다.
 
휴전이 되고 약 3년이 지난 후 인천에 거주하는 황해도 웅진군 피난민들은 흩어졌던 가족과 친척, 지인들의 소식을 파악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옹진군민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매년 1회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결성하였다.
 
옹진군민회가 최초로 개최되던 날 나도 어머니를 따라가 모임에 참석했다.
아이고! 창수 아버지, 어머니 아직 살아 계셨네요, 이게 누구야 옥주 엄마 아니야! 여기저기서 친척들과 고향의 지인들이
사선에서 살아온 그들을 알아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인민군에 잡혀 총살당했다. 아들이 납북되었다. 딸이 피난길에 포격 맞아 죽었다 등 비참한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서로 부둥켜 앉고 엉엉 물었다.
 
멀리 경기도 화성군 정남 면에 정착하여 살고 계시던 외삼촌께서도 시간을 내어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외숙모(외삼촌 부인)를 만나게 되었다. 부부가 6년 만에 해후였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러나 외삼촌은 외숙모의 사연을 듣고 아주 씁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외숙모는 홀로 피난 길에 양식이 떨어져 아사 직전에 갔었고 이를 구해 준 남자를 만나 아들 하나 낳고 살고 있다고 하며
연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외가 집에 있던 막내 이모와 외삼촌 딸 영란(나와 1살 차이의 외사촌여동생)이도 인근의 섬으로 피난 갔다 양식이 떨어져
고향 집에 계속 남아 계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집으로 되돌아갔는데 국경이 폐쇄되어 다시는 남쪽으로 피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 그야말로 외가 집 식구들은 풍지박산이 난 꼴이 되었다.
 
오랜만에 일가친척 및 고향의 친지들을 만나게 되어 기쁨에 벅차 있어야 할 텐데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감정 만은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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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리노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14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
    만은 피해야합니다. 그렇다고 구호만 외친다고 평화가 저절로 오는 것도아닙니다. 우리가 약해서 6.25 전쟁 전쟁의 침략을 받았고 최근의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약하니까 러시아 침략을 받고있습니다.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달성하는 길은 오로지 국방력을 튼튼하게
    강화하여 상대가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박희정 | 작성시간 24.02.14 슬픈 지난날
    가슴 아픈 기억들일 것입니다.
    만남과 그리고 현실을 겪는 아픔들
    예전에 방영되었던 이산 가족들의
    방송을 보고 우시던 부모 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선배 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선배 님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나의 선배 님이란 것이^^
  • 답댓글 작성자리노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14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이기를 주셔서 6.25 동란
    중 겪었던 아픈 상처를
    잊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동란 중에 죽거나
    다치지않고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의 운명이 죽지않고
    살 팔자로 태어났다고
    생각됩니다
  • 작성자금송 | 작성시간 24.02.15 리노정님
    말씀이 맞아요 운명 이라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우린 갑장 인데도 남과 여의 차이 일까요~?
    전혀 모르고 살았어요
    비행기 날고 무서웠던 기억은 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님을 봐주신것 같아요
    무서운 그당시를 떠올리어 쓰신
    마음아픈글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리노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15 저의 평생소원이 죽기전
    고향땅을 한번 밟아보는
    것인데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데 한 낮의
    허황된 꿈으로 끝날 것
    같은느낌이 듭니다 이번
    "복수"라는 제목의 글의
    작성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6.25 동란 중에 겪었던
    악몽을 다시 정리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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