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미년 3월1일은...?

작성자동구리|작성시간24.03.02|조회수117 목록 댓글 12

 

 

 

               기미년 3월1일은 ......?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誥)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오늘은 3.1절 즉 1919년 기미년에 우리민족의 울분을 전국,아니 전 세계에 퍼트렸던 날이기도
하다. 겨우네 얼어 붙었던 추위와 싸우면 지냈던 겨울철도 이제는 풀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즉 우리민족이 36년동안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일제에 식민지로 ,인권과 자유를 잃고 방황
하던 시기도 이제는 더 이상 지겹다는 민족의 한과 울분을 만방에 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미독선언문의 글은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와서 공부를 하였으나, 철부지한 고등학교 시절엔
제대로 그 깊은 의미를 알지는 못했던 같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다시 한 번 '기미독선언서'를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다. 하나의 독립국가가
다른나라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역사의 가슴아픈 일이기도 하다.
그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사건의 원인이 어디에 있던간에, 후대에 와 있는 우리들은 이 가슴아픈 
역사의 기억을 잊을수는
없다.

일본은 조선에 '총독부'를 두어 전국적으로 산하 조직을 두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게 된다.
저 지방에는 주재소라는 것을 두어 전국방방 곡을 훤히 알게되고,경찰국가로써 우리 민족을
통치를 하게된다. 총독부의 본산인 '중앙청'의 건물은 살아졌지고 청와대는 조선통독부의 관사
였다고 하니,우리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역사의 치욕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인권이 어디가 있으며,우리의 자유가 어디가 있겠는가? 우리는 쌀을 생산하고 면화를
생산하고 누에고치를 길러 명주실을 만들어 비단을 생산해도 그 물건들은 어디로 ,누구를 위한
생산이었던가? 조선민들에게 툭하면 '공출' 울력'등으로 이용당하게 되고, 진정 가난과 배고품은
고스라히 우리들의 몫이었다. 90%이상의 문맹률과 소작쟁이로의 전락. 북간도로 이주 등...

어디 그뿐이랴! 총독부산하에 '동양척식회사'를 두어 우리나라를 8년간 전국을 측량을 하여 일제의
국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래서 수 많은 땅을 국유화로 만들어 , 일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 하는
정책으로 일본인들을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도록 유도하였다. 일본인들이 국내로 들어오는 기회를
제곻하여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상업지역이고,입지여건이 좋은 지역은 일본인이 점령하도록
하였다. 특히 인천. 군산. 목포.부산등 포구에는 지금은 그 잔재가 남아 있어 역사의 가슴 아픔을 전
하고 있다.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을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배상금을 크게 받았고
중국의 본토에 
광업권.그리고 철도 부설권의 설치등의  경제성장의  기틀을 받았고 ,동남에서 유일
하게 식민지를 갖은 국가이며 
세계에서 독서량이  5위안에 든 문화강국이며  노인복지정책도 세계
에서 3위안에 든걸로 안다. 

지금도 한.일간의 위안부문제가 해결이 않 되어,역사의 비극적이고 뼈아픈 시대의 비극을 우리들의
뇌리에 못 박혀 있다. 이게 남의 나라의 역사의 이야기인가?
꽃다운 나이에 일본으로 붙잡혀가 ,일제 군인들의 전쟁에 시달린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달레주는
도구라니, 이게 80 년전의 참다운 우리민족의 비극 이었다. 젊은 청년들은 전쟁에 참여하도록
강제 징용을 하여 전쟁터에 보내져야 했었다.

 

당대의 문학계의 거두 춘원 이광수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설득하는 글로써 유도하기도 하는 낮부끄러운 친일을 위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때 친일을 했던 분들이 이뿐이랴!

우리는 한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36 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이웃 일본의 침략으로 짓밟혔 왔으며
역사발전을 뒤로 돌려 놓게 하였다. 이미 세계적으로 서구의 민주주의와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려
발전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오늘이 있기까지 만주로 ,또는 해외로 독립운동릉 위하여,국내적으로도 피나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하였던 분들이 있었기에, 문학적으로는 훌륭한 일제에 저항하는 글로
싸워 왔기에 ,이 만큼이라도 우리 나라가 발전을 하여, 우리모두가 행복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만해 한용운 선생은 33인의 한 분이시지만 기미독선언문의 공약3장도 작성하시고 시인이고 승려
이기전에 독립운동가였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도 나에게는 변호인도 필요 없고 ,논리정연하게
일본법정에서도 조선의 독립성의 필요성을 제시 하여 일본 법정인들도 그의 탁월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 하였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게 된다.

안동에 거주하며 주옥같은 시를 쓰신 이육사 선생님도 그의 평전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시인이고 문필가이기전에 독립운동가로 나의 눈에는 들어온다. 마지막 그분의 유해를 중국의
감옥에서 그의 가족들에 의해 싸늘한 시체로 고국에 돌아오게 됨을 알게 되었다.
수 많은 문학인도 글로 그리고 몸과 마음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싸늘한 죽음으로 맞이 한 분들이
어디 그뿐인가?  시인  윤동주도  일본유학중에 일본의  감옥에 그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사를 당하는
비애를  당하였다.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의 시원한  우리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하루빈역에서 ,윤봉길의사등


이 모든  책임들이 누구의  잘못인가?
조선왕조의  허약한 왕권체제, 눈을 크게 뜨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의  안목으로 우물안의  개구리
처럼  살아 온  근세  왕조의  책임과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에서  오는 동학농민들의  반기에 진압을
못하고 외세의  힘으로  진압 할려고  하였던 그 자세 , 전쟁 한 번 못하고  국권을  넘겨주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 우리민족의 구렁텅이 신세를  만들고 말았다.  작금의 정치역량의  부족도 다 지배자들에게
문제가 있고, 백성들의  잘못이 있는가? 그 책임은  지도자들에게  있다. 지금도  잘 먹고 사는  계층은  친일세대 ,
군사정부의 그 집단의 부의 부정축제자들, 지방의 지주들의  후손들 ,권력을  사유화하여 부를 축적한 자들......
고)김지하 시인은 그의 5적이란  시에서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10%의 계층이  우리나라의 부(富)의

90%를  장악하고 90%의 계층이  10%의 부(富)로 세상을  살아가니 빈.부의 격차로 허덕이는  국가이다.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다시는 가슴아픈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는 일은 않하여 되겠으며 우리민족은
역사가 똑바로 가게 하도록 우리들의 의식세계를 한 층 높어야 할 것 같다.

                                                                                                                               글/  동구리 (김용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동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5 감사합니다
    아마도 친일 세력들의 후손들이라 그런거 같습니다 소수가 이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서민들을 이렇게 구렇텅이에 몰아넣고 ......
  • 작성자수리산 | 작성시간 24.03.02 일본늠들이 저질럿던 과거를 생각하면
    갈아 먹어도 시원찮은데 그네들과 잘지내려고
    만 하니 가슴아픈 과거는 어떻할겁니까?
    정말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 답댓글 작성자동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5 공감하여주시어 감사합니다
    저도 일본놈들이야기하다보면 피가 꺼꿀로 솟습니다
  • 작성자박희정 | 작성시간 24.03.02 선배님의 글과 낭만 선배님의 댓글을 읽으며
    숙연한 마음을 가져 봅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동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5 감사합니다
    우리 나라국민드은 많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낟고 생각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