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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 이야기5편

작성자수리산|작성시간24.03.03|조회수229 목록 댓글 22

굿이 자랑할것도 없는 네 지나온 과거 이야기 올린다는것이 내 사생활을
드러내 보여서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지만 언젠가 만남의 기회가 되신다면
님들에게 일일이 소개말 을
드리지 않터라도 제가 어떤사람인지 알고자
하는분이 계실것같아
봐주셧으면 해서 솜씨도 없는글을  삶의 계시판에
올려봅니다.

운영진에 혹시 누가 되면 이내 삭제토록 하겠어요.

조금은 유치한 글이고 누락 되긴했으나 모든것은 사실 그대로 입니다..
3월의 첫 휴일 행복한 하루가 되셧으면 합니다..

요번 것은 좀 길어요. 4편에 이어서.

막내딸애 라면이나 끓여 주고 다시 죽자 하고 내려와서 끓여주고나니
얼핏 스치는 생각에 죽을결심 이면 뭘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네.

라면값 이라도 벌어서 애들 배는 굶기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앞서더군요.
그리곤 참 어리석은 놈이라 혼자서 자책했지요.

그 다음날 새벽에 다시 몸이나
추스려야 겠다는 생각에 운동삼아 약수터를
올라가는데 왠 젊은친구가
자전거를 타고가며 우유배달을 하는데 참 기특해서 불렀지여.

그랬더니 자기는 학업상 며칠못하고 그만둔다길래 나한테 넘기라고 했더니
권리금 몇만원이 있어야 된다더군요

그때부터 헌 자전거를 사다 모우유 새벽 배달을 했었지요.
자동차 기사를 데리고 직원도 몇몇이나 두고 청계천에서 사업을 하던늠이
졸지에 자전거 에 우유박스를 싣고 달리니 조금 서글프기도 했지요.


그일은 새벽에 3시간만 하면 되는 일이라서. 그리곤 동네 골목을 빗자루로 쓸었지.
동네분들이 기특하게 생각했는지.동네 새마을지도자가 공석이니 맡아달라는 거야.

그래 쾌히 승낙하고 새마을지도자 와 반공연맹 총무를 3년간 봤지.
반공연맹에선 여고생들을 인솔하여 군사분계선부근에 있는 땅굴들을 견학 시키고
간단히 반공교육을 하는정도 이네. 

그래서 아침마다 배달을 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니 제 뱃살이 쏙 들어가더군요.
그러던중 모모식품에서 보급소를 하면 어떠냐고 제의가 왔지. 승락하고 해보니
제법 수입이 짭짤하데요 .
와이프가 내가 맡아 할터이니 "당신은 못다한 공부나 하슈"그러더군요



고마운 생각도 들고 또 시간도 남고 특별히 더 할일도 없어서 독학을 해서
가장 등급이 낮았던 모 공업전문대에 가게되었지여.

그때가
1987년 이었다오 .그런데 나이가 36살때인데 공부는 무슨공부가 되겠나여
동갑나기인 지도교수 와 술만 마셔댔지요 .ㅎㅎㅎ 학생들은 거의 20대 전후고
간혹 복학한 애들은 25~6세. 대학다닌다고곤하나 거의 6-70%는 공부보다는
노는데 더 치중하고 아니면 이성간 교제에 더 치중하는것 처럼 보이데요..

 
나는 가까스로 탈락안하고 수료 했다네.지도교수가(설계제도)A+을 준 덕이지.
제일못한 색채학은 D학점이더군요. 그후에 학교측 에서 시흥에소재한



모 석재인테리어 하는 회사에 연결이 돼어서 그곳에서 석공예품과
건축석재 디자인실장을 했지요
밑에 애니메이션 하는 친구를 데리고 한 6개월간
버텼지만 사무실에서
가만히 앉아 제도와 디자인을 한다는 건 보통 고역이 아니더군요



워낙에 내삶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림만 그릴려니 너무 갑갑하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현장을 뛰겠노라니까 사장이 찝차를 주며 이주임 마음대로하게
해서
공사현장과 석산, 포천 ,강화 ,충주등을 돌아다니니 내적성에 맞더군요

또 그당시 모 재력가 저택에 내가 디자인한 작품이 채택 되어서
시공도 하고 멀리 연곡쪽 절에 탑공사도 맡고 삼성그룹쪽 석재공사로

통영에도 광주에도 전국각지의 사찰이나 학교 기업체 두루 두루
시공을 맡아서 해보니 적성에도 맞고 나한텐 상당한 도움이 돼엇다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날 사장이 음주운전을 하다 큰사고를 친거야.
차는 박살이 났는데도 가벼운 경상만 입었더군.부랴부랴 안양병원으로 가보니
나더러 뒷책임질테니 내가 운전한걸로 해달라는거야.

화가 치밀더군 못한다고 했지.그리고 한달도 못돼 사장과 멱살을 잡고 한판
붙고는 사표를 내던졌지."당신같은  사람과는 같이 일못하겠다고"  그러나 결국

또 실업자가 됐지요 그러다 시흥시 신천동소재 (현 우리동창이 살고있는)
영광철물 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철물장사도 배울겸 취직을 했지.그때 1톤
4.5톤덤프,2대가 있더군.기사는 한명이고 (나까지2명) 그래서 2년간 열심히

덤프차를 몰고 다녔다네. 주로 모래나 시멘트,벽돌등을 운반하는 일이었네.
새덤프 구입한지 얼마돼지 않아서 신천동 현장에 자갈을 싣고서
덤프를 올리는순간 경사도가 아주약간 인데도 갑자기 기우뚱 하더니
내몸이 차량과함께 굴러서 뒤집혀 버렷다네...흐 이 구..

완전히 거꾸로 처박힌 몸을 가까스러 빼고 차밖에 나오니
새 덤프차가 찌그러 진것이 아까웁긴 했어도 그만하길 천만 다행 이라고 여겻지.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ㅎㅎㅎㅎ

그런데 나보다 어린사장은 도박에 미쳐 그때 당시 9천만원을 다 날린거야.
전라도 영광친구인데 참으로 어이가 없더군. 그러던중 땅 주인여자가 땅(약300평)을
건축을 한다고 비워달라더군요 . 지금은12층 빌딩이 들어선 자리이지.

그당시 국회의원까지 한 제정구씨를 만났지요. 복음자리에 공사자재를
납품하다가 .. 참 훌륭하신 분인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부인도 훌륭하고 철거민 들과 함께 똑같이 어려운 생활을 하는거야.
느낀점이 많았지요.

그러던 중 내가 사논 대구땅이(국도변이고 영남대 부근) 엄청 발전 했다는
거야.
학교에서 건축도 했고 철물점 경험도 있고해서 가든식당(그 당시유행)
을 지을려고

마음먹고 대구로 내려갔다네. 자본금은 약5천만원 현금이 있고
땅이 있었으니
청산건축에다 설계를 맡기고 공사업자를 소개해 달랬더니
공사금이 무려 1억8천이
든다더군.

마침 대구사는 여동생 주변에 친한목수 오야지인
손아무개를 만나 좀 도와 달랬지여.
하지만 현금5천으론 안돼겠어서 신협에서 4천만원을
더 빌려 시작했지요

순전 깡다구로 철근도 내가 둘러메고  잡부일도 하면서 텐트
생활을 하며 공사를
강행했엇네여. 공사기간이 무려 7개월 걸려서 완공햇지요

공사전부를 순전히 내 깡으로 말어부쳣으니 자연히 공기도 길어졋지요


그래서 근 1억을 줄여 8천5백으로 준공까지 받은거야요 .
1억8천공사를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장하지 않나요? 절반값으로 해치웠으니



시멘트 도 내가 직접 역전(하치장)에 직접 실어오며 최대한 몸으로 때웠으니..

지금 생각해도 어떻케 그렇케 애착을 가지고 노력 했나 싶으기도 하구

국도변에 위치한 3충건물인데 3층은 뒤쪽에 주택입니다.  아래에 있는 건물입니다......


그럼 3월첫 휴일 즐겁고 행복하시길 바라며 두서없이 올린글 이해바랍니다...


다음에 6편을 올리겟습니다


 
 밑에 여자분은 제 집사람입니다, 내가 피땀을 흘린곳이라 가끔 들러기도 합니다.




집사람이 베지밀 사업은 자기가 할테니 공부를 하라고해서 부천전문대 를 나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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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수리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4 고맙습니다 박희정님 그러나 짧은 자본으로
    건축을 하다보니 열정적으로 하지 얺았나 싶습니다
    오늘도 사랑이 넘치는 좋은 하루되세요

  • 작성자낭만 | 작성시간 24.03.04 지나온 세월
    열심히 사신 흔적이 곳곳마다 펼쳐보이십니다.
    장하십니니다.
  • 답댓글 작성자수리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4 고맙습니다 낭만선배님 좋은뜻으로
    생각해주셔서요 사실 무슨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 하긴 한답니다..
    그래서 노후엔 안정적이자 않았나 싶습니다.
    환한 웃음속에 행복 가득한 하루 되세요
  • 작성자신화여 | 작성시간 24.03.05 성실하게 그리고 폼나게 살아오신 벗님께
    축하와 격려의 박수 보내 드림니다
    남은 여생도 그져 건강하고 행복 하기 만을
  • 답댓글 작성자수리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5 고맙습니다 신화여친구님 제가 봉사활동도 합니다만
    어제 학교에 등록해서 오늘부터 수업을 받기로 하엿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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