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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숨 쉬는 백마강은 흐르고

작성자마초|작성시간24.04.19|조회수222 목록 댓글 29

https://youtu.be/d7eLnFq-H9E
(백마강 노래)
백제의,
마지막 도성 사비성,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토성과 통일
신라때 이성을 에워싸고 연결해 다시 쌓은 토성이 부소산에 남아 있다 금강의 한구
간인 백마강이 감싸고돌아나가는 산에는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고 길이 완만해서
천천히 솔향기 맡으며 산책 삼아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보자 옛 토성 흔적들을 넘나
드는 숲길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참나무 뒤로 숨어버린다. 

부소산의,

낙화암 아래 강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암자가 고란사다 주위의 경관이 비할데 없이
아름답고 유서깊은 곳에 규모 작은 고란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뒤편에 솟아나는 약
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한몫했을 것이다 30년 전에 갔을때 스님이 바위에 붙어 자생
하는 풀을 가르치며 친절하게 고란초를 소개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고란초를 남획
해서 멸종단계에 이르고 있다. 
   
백제왕은,

고란사에 있는 약수를 애용하였는데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어 약수를 운반해 왔는데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만 자생하는 기이한 풀이 있었으니 이름을 고란초라고 불렀
던 것이며 고란초의 이파리 하나씩을 물동이에 띄워 올렸다 백제 임금님은 이 약수
를 항상 즐겨 마신 탓으로 원기가 왕성하여 위장병은 물론 감기 한번 안들고 건강하
게 살았다는 설화가 아직도 전해오고 있지만 싸나이 마초 킴이 그당시 살고 있지는
아서 확실한 것은 모리겠다 ~ㅎㅎ.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군을 쫓아 금강을 건널 때 물속에서 용이 방해하여 백말을 미끼로 조
대 바위에서 잡아 올렸다고 백마강 낚시했던 바위를 조룡대라 불렀다는 이야기는
다 아실 것이고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낙화암 나당 연합군이 수륙으로 쳐들어와 왕
성에 육박하자 궁녀들은 굴욕을 면하기 위해 절벽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
에 몸을 던진 곳이다.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죽음도 마다하
지 않고 절개를 지키려던 고결한 백제의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진 낙화암으로 가는
길모퉁이 아픈 역사를 품은 꽃잎 하나가 낙화로 흩뿌린다 전날 내린,비로 백마강은
황토 빛으로 심하게 곡류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구곡
간장 찢어지는~♪불러 보자 삼천궁녀를~♪낙화암 나루터에서 끊임없이 백마강 노래
가 흘러나온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바라볼수 있는 낙화암 정상 바위에 육각지붕으로 세워진 정자로 백제멸망
시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하
여 건립한 것이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절벽에 자리한 고란사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절이다 낙화암 뒤편에는 약수가 솟아나고 예전에는  바위에서 자생하는
고란초를 심심찮게 보았는데 지금은 남획으로 멸종위기.

고란초가,
좋다는 전설이 있어서 사람들이 뿌리째 케 가서 지금은 멸종단계에 이르렀다.사진
은 어항 안에 바위를 넣고 기르는 것을 찍은 것이다 고란약수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 고사리과 고란초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수명은 30~50년 정도 된다.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서있는 바위 절벽으로 백제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게 유린될 때 사바성내 궁녀와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런 삶을 사느니 차라
리 푸른 강에 몸을 던져 국운과  함께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하여 여자의 정조를 생
명보다 소중히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다. 

금강을,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부르고 백마강의 자연경관은 백제권의 문화관광자원과 함
께 개발하면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된 지금은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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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2 백제의자왕과 같이 거론되는 三千宮女 는 진짜삼천명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宮女를 거느렸다는 표현이라고 겹 처지면서
    많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초생각 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고요 ㅎㅎ
    그 당시 부여인구가 얼마인데 정말로 웃겨 푸하하하
    더불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백제멸망
    내용은 당시 승자였든 신라입장에서 쓰인 내용이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길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보여주는데 치중을
    했지를 않나 합니다 歷史란 늘 강자편에서 기록을 했기에
    분명한 것은 올바른 결론은 우리 민초들이 歷史를 알아야 하는
    가치의 지혜가 너무 순진해서 낙후가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푸하하하
    가만히 보면 일본이나 한국 歷史왜곡의 달인들이여ㅎㅎㅎ
    아우님 부연설명 감사혀 ㅎㅎ
    건 필하시고
  • 작성자오개 | 작성시간 24.04.22 정절을 여인의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옟날엔
    열녀문까지 세워서 여인들을 성의 감옥에 가두었지요
    요즘 세상은 '처녀'가 부담되어 아무에게나 줘 버렷다고 할만큼 성 개방시대죠
    수원역에 가면 벌건 대낮에 젊은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은 수백군데서 목격할수 잇습니다
    첨엔 당황했으니 하도보니 얘사롭고 시선만 살짝 피하게 되더군요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2 이 시대의 뒤죽박죽인 이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맑게 씻겨 주는 청량한 댓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도반(道伴) | 작성시간 24.04.22 잘 읽고 갑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백마강은 비온 뒤에 찍은 것 같네요.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2 너무나 가슴 아픈 암울한 역사 속의 사연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은 전설이지요 백제의 멸망 앞에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적군에게 몹쓸 짓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부소산 높은 절벽에서

    공수 교욱도 받지 않고ㅎㅎㅎ 높은 절벽에서 띄어 내린
    그 정신이야말로 길이길이 후손에게 사실인지는 몰라도ㅎㅎㅎ
    전설이 된 이야기로 바로 낙화암이라 하지요 다 아시는
    사실이지만 늘 그렇치만 패자의 역사 실록은 정말로 비참 한
    것이라는 걸 우리모두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배님 관심 주심에 감사합니다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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