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댓글

뒤로

한 맺힌 슬픈 공양왕(恭讓王)을 찾아서

작성자마초| 작성시간24.05.31| 조회수0| 댓글 13

댓글 리스트

  •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21세기 최첨단시대인 지금도 죄인을 숨겨주면
    범죄 은익 죄로 처벌받는데 당시 역적(逆賊)으로
    몰려 처형된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하지요.
    마을 유생(儒生)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려다가 숨어 지키고 있던 관군(官軍)에게
    몰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공양왕릉 입구에 조그마한 안내판에 왕과 두 왕자
    그리고 시녀(侍女)가 묻혔다고 기록되어
    그 중 제일 큰 봉분이 공양왕(恭讓王) 바로 옆이
    왕세자, 약간 아래가 둘째 왕자,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봉분이 시녀(侍女)라고 싸나이 마초킴
    나름대로 정의한 것입니다
    어디에도 공양왕, 왕세자, 왕자의 무덤이라고
    구분하여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요.
  • 작성자 윤슬. 작성시간24.05.31
    공양왕에 대해서
    몰랐는데 덕분에 자알
    배우고 갑니다

    역사에 대해서 진짜루
    마니 아시네요
    가끔은 부끄러울 때가~
    감사해요

    오월 한달도 수고하셨슴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역사(歷史)에 대하여 많이 안다
    칭찬이 너무 과하시군요 지금은 작고作故했지만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두계 이병도 박사를 꼽을 수가 있는데
    젊은 학자들이 이병도의 역사관에 이견이 있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후 식민사관을 가진 국사학자라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중학교 국사를 이병도가 지은책으로 배웠던 것이
    기억나는구요
    글 마중 고맙습니다
  • 작성자 박희정 작성시간24.05.31 역사에서 말하는 공양왕과는
    실지로는 마니 틀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 나라는 좀더 틀렸을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당시의 명나라는
    고려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갓 개국한 나라 원나라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결국은 한 사람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명나라 눈치를 보는 소국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선배 님의 글을 읽으며 지금도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정치인들을 보며 혀를 차 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그래요 역사 (歷史)는 사학자(史學者)의
    여론이 비등한 쪽으로 기울고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편견(偏見)이 많은 것이지요
    사초(史草)를 기록하는 사관(史觀)들이
    똑같은 사건을 기술할 때 서인과 동인은 각각
    처한 입장에 따라 기술이 다를 수가 있지요

    오래전 덴마크에 있는 크론베르크성(城)에
    갔을 때 처음에는 그저 그 흔한 석조건축물로
    알고 둘러보았습니다.그런데 누군가가 쉑스 피어의
    햄릿이 이 성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성이
    달라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햄릿은 13세기 어느
    문헌에 잠깐 언급되는 이름이지 실존인물임은
    단정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쉑스피어가 햄릿에게
    사느냐 죽느냐 그게문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구체적 인물로 우리 두뇌에 올려진 겁니다
    별 거 아닌 크론베르크성이 전혀 다른 성으로
    여겨져 부지런히 둘러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경험이 추상적 (抽象的) 공간으로
    구체화시킨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거 같습니다
    글 감사혀요
    건강하시고
  • 작성자 하얀솔 작성시간24.05.31 그래서
    이성계도
    자식들한테 밀려나서
    아들들의 왕자의난도 겪었지요
    인생은 꿈이라오 ㅎ
    노래가 생각납니다 ㅎ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이성계는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데 요즘도 야구방망이나
    골프채 하나만 젊을 때 잘 휘둘러도 세계적 재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는데 이성계도 그때 대단하였던 것 같아요 이건 마초생각 ㅎㅎ
    압록강 이북의 오랑캐는 물론 왜구들도 이성계의 활 앞에는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어 말만 들어도 도망을 갔다고 하여
    왜구나 오랑캐 군대가 출몰할 때마다 이성계를 보내니 백전백승(百戰百勝)이었지요
    이러다 보니 이성계의 힘이 중앙무대에서도 젊은 추종자가
    많아지고 커지자 정적(政敵)들은 이를 제거코자 도저히 이길 수도 없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가게 하니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당시
    서울인 개성으로 와 정적들을 모조리 쳐 부수고 말았다.
    이성계에 대한 피력(披瀝)을 잠깐 아느채 해 보았답니다
    푸하하하
    내공 있는 멘트 고맙습니다
  • 작성자 희은이 작성시간24.05.31 역사적 사건에 대해 마초님의 메끄롭게
    전개된 감정표현이 참 놀랍습니다.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한 무덤 앞에서
    멸망한 고려를 떠올리고 힘 있는 자에
    의해 목메임 당한 왕에 대하여 동정적인 게 느껴집니다
    많지 않은 세월을 흘렀는데 이 정도라도
    보존이 되었는 걸 보면 조선의
    창건자들이 마음이 넓은 것 같습니다
    증거 자체를 없애어야 되는 것이 정석인데
    민초들을 통해서 이어 왔다 기는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시녀 무덤이 있다는 게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역사적 고찰에 대한 좋은 글입니다 몰랐던
    역사를 덕분에 하나하나 배워나가니
    재미있네요 은근히 기다려집니다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마초님 건강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대한민국 역사(歷史)는 대부분 바르게 기술되지 못하고 시절의
    위장자 정권에 입맛에 맛게 날조되어 비 정상적으로 흐르는데.
    여기에 일제 36년 사가 대한민국 역사를 정말 망치는데.
    그 위력을 발휘하였지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피가 흐르고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슬픔을
    당하는 집단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으로 대다수의 국민과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부하게 하는 참된 정치를 했는가 수탈(收奪)하는
    정치를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보면 고려말에 부패한 정치보다는
    그래도 조선 초기 정치와 문화가 융성하고 나라의
    면모가 서는 일이었다고 나름 생각합니다
    유구한 한반도에 깔려있는 역사(歷史)의 흔적을 다시
    한번 상기(想起) 해 봅니다
    부티나는 글 마중 고마움을 표합니다
  • 작성자 달님이랑 작성시간24.05.31
    공양왕의 이야기~
    몰랐던 역사를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인생무상을
    다시금 느낍니다 배움이
    있는 글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지금 돌아가는 정치판을 한번 보시죠
    죽는 줄도 모르고 권력[權力에 덤비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칼날이 예리한 취모검(吹毛劍)에 묻은 꿀이 달콤하여 조금씩 핥아먹다가
    결국 혀를 잘리고 마는 여우 같지 않는가?
    역사(歷史)는 돌고 돌지요
    흔적 고맙습니다
  • 작성자 피 터 작성시간24.05.31 파주에 모신 아버님 추모공원에
    들렀다가 귀가할때 보면
    공양왕릉 표지판이 있어서
    한번 시간나면 들러보까 하곤 했죠

    삼척 공양왕릉 다녀온걸 쓰셔서
    검색을 해보니 쌍릉 이로군요
    경기도 고양에도 있고
    강원도 삼척에도 있다고 나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4.05.31 왕은 한 명인데 왕릉(王陵)은 두 곳이라?
    참 신기하기는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 인물(人物)에 두 무덤은 전쟁 와중에는 더러 있는 일이지요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도 묘가 두 곳이라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승겸도 무덤도 쌍봉이지요
    두 무덤이 부자연스러운지는 몰라도 때에 따라 3곳도 있는 곳도
    있는 줄 아옵니다
    언젠간 시간 내어 파주에 수색정찰 한번 나가볼까 합니다
    관심 주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좋은날 되시고요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카카오 이모티콘
사용할 수 있는 카페앱에서
댓글을 작성하시겠습니까?
이동시 작성중인 내용은 유지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