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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충신을 모신 삼충사(三忠祠)를 다녀와서

작성자마초|작성시간24.10.02|조회수203 목록 댓글 6

https://youtu.be/8fmOcqtCzvs

백제(百濟)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소산성 숲길에서 역사를 담아본다.부소산성 남문터 밑의

삼충사(三忠祠)는 백제(百濟) 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階伯)을 모신 사당

이다.


사당,

우측에는 떠나간 벗을 그리워한다는 붉은 배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꽃이 한번 피기 시작하면 꽃다발 아래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오래도록 핀

다.

백제(百濟)의,

3충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 좌측으로부터 성충, 흥수, 계백(階伯)의 순서대로

모셔져 있다 성충과 흥수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냈으며 계백장군(階

伯將軍)은 2등 관직인 달솔에 이르렀다. 


위대한,

장수를 꼽으라면 계백 (階伯) 을 최고로 꼽을 것이다.신라(新羅)를 통일한 

김유신은 월래 계백(階伯)의 적수가 되지못했다. 

계백 (階伯) 은,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며 스스로 가족들을 죽이고 전투에 임한다.


계백(階伯)은

5천의 정예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5만여 신라(新羅)군을 맞아

싸웠다.명장이 지휘하는 백제(百濟)군은 신라(新羅)군과 네 번 싸워 네번 격

파하였다.화랑출신 거진, 반굴은 힘껏 싸웠으나 전사하고 만다.


관창 (官昌) 이,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계백 (階伯)에게 사로잡혔다.관창(官昌) 을 

붙잡은 계백(階伯)은 관창(官昌)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살려서 돌려보냈

다.

신라군으로,

돌려보내진 관창(官昌) 은 또다시 백제 (百濟) 군에 쳐들어간다.결국 계백(階伯)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관창(官昌)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百濟) 군은 패하고 계백(階伯)은 전사한다.

 

다 아시는 사실이지만 백제 (百濟)는 막을 내렸으나 계백(階伯)의 충절은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부소산 입구 들어가는 길, 이잰 요란한 매미소리 대신 은은한 풀벌레 소리 들리는

단풍나무와 떡갈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길에 널찍한 돌을 깔아놓았다.

외삼문 의열문을 지나면 내삼문 삼충사가 나타난다 우측에 떠나간 벗을 그리워

한다는 붉은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백제말기 의자왕 때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좌측으로부터  

모셔진 사당이다.성충과 흥수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냈으며 계백장군은

2등 관직인 달솔에 이르렀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연리지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비유하는 사랑 

나무가 부소산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영일루,

백제시대(百濟時代) 왕과 귀족들이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하루의 일

과를 계획했던 곳으로 이 건물은 1964년 5월 홍선관아의 문루를 옮긴 것이다.

영(迎)과 루(樓)자를 크게 하고 일(日)을 작게 썼는데 이것은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누각 안에는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

한다는 뜻의 寅賓出日 (인빈출일)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단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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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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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희은이 | 작성시간 24.10.02 화랑관창과 계백장군의
    이야기 참 오랜만에 리바이벌해서
    듣게 되는군요
    제가 우선 궁금한 건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 이걸랑요.^^*
    진짜 삼천궁녀는 있었는지요
    마초 님 생각은요 ㅋㅋㅋ
    덕분에 역사공부 배워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02 마초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삼천 궁녀(三千宮女)는
    납득이 어렵고 어떤 문헌 (文獻)에도 찾아볼 수가 없
    었지요 한번 파헤쳐 본결과 유적(遺跡)을 통해 궁궐의
    규모를 보면 그들이 지낼 공간도 없었고삼국사기(三國史記)
    어디에도 그 기록이 없고 그냥 궁인(宮人)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기록만 있는것을 확인 했답니다.

    조선 초기의 왕들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이야
    기를 하다가 방탕한 생활로 망한 의자왕(義慈王)에
    대해 술과 여자를 좋아하다 망한 폭군이며 그 음란이
    나라를 망쳤다고 궁녀 (女)숫자도 마구마구 부풀렸다.
    여기서도 삼천이란 숫자는 언급이 없지요

    조선 명종 때 학자인 민재인이 쓴 백마강부(白馬江賦)
    에서 의자왕 (義慈王)의 방탕한 생활을 말하며 삼천
    즉 구름처럼 많다三千其如雲'는 표현이 처음 나오지요.
    그러니 문학적으로 삼천 궁녀 (三千宮女) 다 이 말씀
    입니다요 ㅎㅎ

    여기에 대중가요로 인해 사람들은 사실인 것처럼
    믿었고.삼천 궁녀 (三千宮女)는 문학작품으로 대중
    가요로 인해 점차 사실인양 정착되었지요
    분명한 것은 역사(歷史)는 강자의 편이다는 것그들이 유리
    한 쪽으로 적지요.패자는 얼빵한 멍청이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아실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02 마초 
    무지(無知)한 마초가 알고 있는 상식은
    이것밖에 안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단 결~!
  • 작성자복매 | 작성시간 24.10.02 부소산에 올라 연리지 를 보고싶어요
    뿌리 엉겨 한 나무 된 그 사연 들려 줄까요
  • 답댓글 작성자마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02 뿌리는 다른데 가지가 서로 붙어 한 나무처럼
    자라는 나무를 연리지(連理枝)라 하여 아주
    진한 부부애의 상징으로 비유하고있지요.
    (그대는 한그루 연리지(連理枝) 되고 나는
    한 마리 비익조(飛翼鳥)되어)
    옛 시인들이 연문(戀文)으로 많이 사용했던
    글도 부부가 서로를 갈구하고 보듬는 사랑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때문이 아닐는지요
    연리지(連理枝) 사랑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슴으로만 들을 수 있는
    약속의 메시지를 이렇게 전해주는군요
    애정 깃든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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