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봄.여름,가을)
심신이 지칠때면
가장 미천한 신분의 승려와 최고의 유학자인 회재선생이
신분을 뛰어넘어 교류했던 정혜사지도 거닐어 보고
높이 3m의 폭포가 떨어지는 자계계곡의 용소위를 외나무 다리로
건너다보면 귀가 멍할 정도의 물소리에 정신이 맑아 질것입니다
또 아름드리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옥산서원 진입로를 걸어 가노라면
수양처로는 더없이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 여러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것입니다
자연속에 은둔하면서 독락을 즐기며 자계계곡의 무인지경에 빠져
그 스스로가 '자계옹"이라 자처하던 회재 이언적
비록 그는 가고 없으나 그의 큰선비 사상을 찿아 길을 떠납니다
삼곡이라 세심대는 달을 실은 배 하나
진실로 정일(유학의 마음을 닦는 공부) 절로 천년이네
인을 체득하여 선천의 학문을 알게되니
무변루의 바람과 달이 더욱 어여쁘네
<옥산구곡 재3곡>
외나무다리 앞에 있는 용추폭포 옆에는 퇴계 이황이 새긴 '용추(龍湫)'란 글자가 보이고
다시 폭포를 기준으로 오른쪽 큰 너럭바위를 보면 역시 퇴계가 새긴 '세심대(洗心臺)'란 글자가 보인다
세심대(洗心臺)
옥산서원 바로 앞에 있는 세심대는 회재선생이 명명하고 퇴계선생이 돌 표면에 큰 글씨를 새겼으니
이것을 일러 삼곡이라 하였다 <이정엄의 옥산동행기 중에서>
조선 정조 때 지방 초시를 개최하기도 한 장소이다
세심문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20년 후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 등 도내유림들의 뜻으로
이언적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묘우를 건립한 곳이다. 그 다음해 관찰사 김계휘가 계청하여 1574년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서원 이름을 ‘옥산’이라고 사액한 것은 서원이
자옥산자락에 있기 때문이며, 자옥산은 해가 질 때 서쪽 하늘이 자주색으로 물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역락문 (조선고적도보)
서원은 돌아가신 선조들애개 제사 지내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세운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이다
역락문
역락문은 논어 학이편의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으로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는 뜻이다 편액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무변루
무변루
서원이 진정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건물 안에 구현되는 시대정신,
그리고 인간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에 있다.
물질보다 정신이 더 중요한 건축물이 바로 서원일 듯 싶다
무변루(조선고적도보)
조선 시대 명문사학 중 하나였던 옥산서원에 입학하려면 생원시에 합격하거나 추천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무변루
무변루 (한석봉 글씨)
무변루는 사방이 확 트인 병산서원의 만대루와는 달리 서원 밖의 경관을 차단하는 판문을 설치했다.
판문을 열어젖히면 자개천과 자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편액 옆에는 '옥산서원기'가 적힌 현판이 붙혀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처음 누각의 이름은 '납청루(納淸樓)'였다고 한다. 여기서 '청(淸)'은 기를 의미하고, 기(氣)는
양(陽)을 가리키니 이 누각에 올라 맑음을 받아들여 양(陽)을 기르게 된다는 말이다
훗날 문신이자 학자인 노수신이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 빛이여,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는 뜻을 취해 무변루로 고쳤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대청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로 알려진 이산해의 글씨다.
창건 당시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의 편액보다 크기가 작다.
최초 사액 당시에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였으나 현종 (1838)에 구인당 이 화재를 입어 다시 사액 받은 것이다.
두 개의 편액은 보통 편액과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인데, 이는 임금이 하사한 사액편액이기 때문이다
옥산서원
구인당 (한석봉 글씨)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온 구인당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방 앞에는 명(明)과 성(誠)을
뜻하는 양진재(兩進齋), 경(敬)과 의(義)을 뜻하는 해립재(偕立齋) 편액이 걸려 있다.
1839년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돼 증수하면서 다시 써서 헌종이 하사한 것이다
동제 ㅡ민구제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서재ㅡ암수재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이다
서원은 출입구·강당·사당 등이 일직선상에 놓인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르고,
무변루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서로 마주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의 중정(中廷)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이 죽은 지 20년 뒤인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유림들과 함께 묘우(廟宇)를 건립했고
1574년에는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도동서원.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과 더불어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회재선생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사림파로 동방오현중에 한사람이다
주자의 주리론에 근거를 근거를 두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 후 퇴계 이황에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577년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녀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옥산서원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 서원 안으로 옮겼다
경각
책을 보관한 곳이다
옥산서원은 전국의 여러 서원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확인된 866종 4,111 서책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 제322-1 [삼국사기] 완질본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중종 임신간본으로
1512년 12월 22일(음력)에 복간되어 올해로 꼭 500년이 되기도 한다.
. [삼국사기]는 김부식外 10명의 학자들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경에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로
총 5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이후 3차례 복간되었지만 완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옥산서원
독락당 장서각에서 발견된 중종 임신간본이다
서재인 청분각은 총 866종의 4,111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해동명적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그 밖에도 회재선생의 저서,
친필, 역대 명인들이 남긴 유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파격적 실험성이 돋보이는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는 10층까지만 보인다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
정혜사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933년 최준이 동경잡지를 보완해 발간한 <동경통지>에
신라 제37대 "선덕왕 원년 당나라 첨의사 백우경이 모함을 피해 신라에 귀화해
자옥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다. 이에 왕이 거둥했으며 친히 만세암을 정혜사라 고쳤다"
고 적혀 있다. 백우경은 중국 시성 백거이의 사촌인 인물로 귀화 후 신라 조정에서 벼슬도 했다.
수원 백 씨는 그를 시조로 받든다
불교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평면을 뜻하는 8방에 하늘과 땅을 더하면
10방의 세계 즉 온 우주가 되며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에 3배를 합하면 1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이형 석탑은 크게 2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탑 구조나 건축 방법이 전형적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회재는 젊은 시절 정혜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말년에는 이 절 바로 밑에 독락당을 짓고 기거했다.
사찰은 회재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공부방으로 쓰이면서 조선시대에도 잘 보존됐지만 1834년 발생한 화재로
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폐사됐다. 탑은. 1911년 도굴범들이 부장품을 훔치기 위해 해체했는데
도중에 발각돼 도굴 위기는 모면하지만 해체 상태로 방치됐다.이후 다시 복원됐지만 도굴범들이
버려놓은 탑재를 원상으로 복구하지 못해 10층 탑으로 남았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4권에도
10층 탑 모습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유리건판 사진 자료에는 13층으로 회복돼 있다.
그 몇 년 사이 탑을 재차 쌓은 것이다. 그러나 탑 상륜부는 영영 잃어버렸다
탑은 비대한 1층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하게 줄어드는 행태로
석탑 조성 방식이 전형적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