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가 있는ㅡ해남 충무사

작성자임진강|작성시간26.06.16|조회수28 목록 댓글 2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충무사

 

이순신장군 영정을 모시고 있다

충무사로 오르는 돌계단은 목포유달산에서 직접 돌을 가져다 쌓았다고 한다

충무사라는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노산이은상 선생이 제작한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최근에 다시 제작됐다

전라우수사들의 공덕비

 

수군만호 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등 30여기를 모아 이곳에 모시고 있다

명량대첩 비 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1597) 이순신이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횡서로 된 제자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12자를

 

써서 숙종  1688년 3월에 건립해.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임진왜란 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비(碑)를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명량대첩비각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 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명량대첩비ㅡ보물 503호

 

이들은 미군정청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진영 | 작성시간 26.06.18 해남 충무사 명랑 대첩비에 관한 글을 보며
    알아 갑니다
    문화 해설사 역사에 깊은 조애가 있으시네요
  • 답댓글 작성자임진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과찬이십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