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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던 ㅡ000

작성자임진강|작성시간26.06.17|조회수24 목록 댓글 2

보원사의 정확한  연대와 폐사 내력에 관해서는 밝혀진 문헌이 별로 없다,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통일신라-고려 초에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시기에는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법장화상전》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도 폐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호산록』을 참조하면 보원사의 사우는 모두 없어지고 비석, 탑, 철불 1좌만이

 

 남아 있었는데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에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현재는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절터만 남아 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양식과 조각수법에서 절제와 균형을

 

나타내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상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당간을 세워 깃발을 달아 두었던 곳이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보원사지 5층석탑(보물 제104호)·

 

탑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보원사가 중건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남아 있으나 부재는 노반만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완만하며, 옥개석은 넓고 끝이 반전되어 백제석탑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백제계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추고 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와 문비가 모각되어 있다.

상층에는 팔부중상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위에는 별석을 끼워

 

 5층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석탑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1968년 6월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탑 안에서 금동 사리갑이 발견되었다.

 기단은 2중기단으로 하층에는 사자상이 음각되어 있다

 제작연대를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중인  ‘전 보원사지 출토 철조여래좌상’

 

 머리는 소발이며, 얼굴은 원만한 타원형으로 양감이 있고 자연스럽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

 

수려한 얼굴 생김에 알맞은 비례 등이 신라 석굴암 본존불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귀 아래 목에 신라 불상 특유의 삼도가 뚜렷하며, 

 

눈썹 부분을 층단 위에 다시 음각선을  그어 표현한 것과 옆으로 길게 치켜올라간 눈매는 통일신라 8세기

 

불상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얇고 몸에 밀착되었는데, 옷주름선이

 

유려하며 크고 작은 2중의 주름으로 된 번파식  표현이 건장한 몸을 더욱 잘 드러내 보인다. 항마촉지인을

 

취했던 두 손은 파손되었다.이 상의 제작시기는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되어왔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통일신라 최성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8세기 후반경의 상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철불 조성의

 

시작도 8세기로 올라감을 시사해주는 중요한 불상이다

서산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

사진촬영ㅡ 2023년 국립중앙박물관

 

이 불상은 높이가 2.57m에 이르는 큰 철불로 조성 시기는 고려 때인 11세기로 추정된다.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가 뚜렸하게 표현되어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이 가늘며, 코와 입이 유난히 작고,

 

. 두 손은 사라졌으나, 항마촉지인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얇아 몸에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드러나 보인다. 옷 주름은 도식적으로 처리되는데, 얕은 층단형으로 선각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 
 고려 초기인 11세기 전반까지 조성된 대부분의 불상은 왕실 발원 불상이 집중되었던 개경과 충청남도

 

논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석굴암 석조불좌상 등 통일신라시대 경주 불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지방의 호족들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에서도 나타난다

보원사지 금당 추정 건물지

 

보원사터에서는 백제 시대에서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북위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법인국사 보승탑(고려), 보물 제105호)·

 

 탄문은 신라 효공왕 900년에 출생하고 고려 광종  975년에 입적한 화엄종 계통의 승려이다.

 

부도는 탑비의 건립이 978년인 것으로 보아 법인국사가

 

 입적한 975~978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은 큰 편으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8각의 탑신석은 중대석처럼

 

좁고 높으며, 사천왕상·문비·인물상이 돌아가며 얕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다

중대석의 받침은 원형으로 구름에 싸여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도식적인 표현이 보인다. 중대석은 장식이 없는 8각기둥이다

 

기단부의 하대석은 8각이며 안상 안에 다양한 자세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다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되었다.

 

비받침인 귀부는 거북 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등 위에 3단받침을 두고 비를 얹었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는 고려 광종 974년에 국사가 되고

 

이듬해에 입적했으며, 비는 고려 경종 97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978년 왕은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 :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문은 김정언이 짓고 한윤이 썼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는 보원사 불교적 성격, 위치, 중창 시기 등을 밝혀 주는 자료이다.

 

이것은 경내에 남겨진 부도, 석탑, 당간 지주 등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된다

비문 내용은 법인국사 탄문의 출가 과정, 태조와 광종 등 역대 고려 임금들과의

 

특별한 인연, 보원사와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국사를 칭송하는 비명(碑銘)을 덧붙였다

탄문은 고려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신명순성왕태후가 임신하였을 때 축수하여 광종이 태어났다

 

. 고려 광종 968년에 왕사로 책봉되고 975년에 국사로 봉해짐으로써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호불 군주이며 개혁 군주였던 광종이  종교적·사상적 배후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종은 호족들의 비호를 받아온 선종을 배격하고 왕권 강화에 유리한 화엄종의 고승인 탄문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탄문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 사상을 융합하려고 힘썼다. 서산 보원사

 

화엄 10찰의 하나로 꼽힌 것은 탄문의 영향력과 관계가 깊은데, 975년 탄문이 보원사로

 

돌아올 때 교종과 선종 승려 1,000여 명이 그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975년 임종을 앞둔 탄문 스님이 보원사로 떠나자 광종은 태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개성의 교외까지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그해 3월 보원사에서 열반하였으며,

 

그의 영향력을 기려 978년 보승탑과 부도비가 건립되었다

. 서산 지역은 중국 남조의 양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에 길목 역할을 했다. 태안 반도를 거쳐

 

 해미면에 이르는 바닷길은 당시 중국과 교류하는 무역 항로였고 해미-운산-예산-부여로 이어지는

 

육로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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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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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진영 | 작성시간 26.06.18 new 서산 보원사지는 안가봤는데 해설과 함께
    알아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임진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new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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