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주를 여행할때 공산성에서 무녕왕릉을 가거나 혹은 무녕왕릉에서 공산성으로 올때
무심코 이곳을 지나게 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의 발받침대를 본떠 만든 ‘무령왕릉연문이다
무령왕 발받침대(국보 제165호)
잠시 이해를 돕는다면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왕의 발받침대를 거꾸로 엎어 놓으면 바로 저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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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천
제민천교영세비(공주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공산성 입구에는 공주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던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군수들의 행적과 선정을 기리는
비석 47기를 모아 한줄로 세워 놓은 비석군(群)이 있다. 제민천교영세비 역시 원래 제민천변에 있던 것을
공산성 입구로 옮겼다 순조 1817년에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했다. 약하게 축조됐던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관찰사는 이를 재 건립한 뒤 그 과정을 소상히 적어 영세비를 세웠다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쌓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공사를 모두 완료했다는
기록이다.특히 이 과정에서 중수에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 백성 이름도
적었다 이 비문에는 당시 국가예산과 지방민들의 성금을 포함한 총 3천여금을 들여 오늘날의 영세민 취로사업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내용과 함께 공사에 동원된 영세민들에게 지급한 노임내역, 공사감독 현황까지 자세히
담겨 있다
제일교회
유관순 열사가 다닌 것으로 알려진 공주 제일교회,
1902년 세워진 공주제일교회 공주제일교회. 한국전쟁 때 건물 상당 부분이 파손됐지만
신축을 하지 않고 복원함으로써 건립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유관순 열사는 지난 1902년 천안시 병천면 출신으로 1910년을 전후해 천안 매봉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사애리시 선교사를 발탁되어 1914년 공주 영명학당 입학해 2년간 보통과 과정을 수학했다. 이후 지난 1916년
서울 이화학당에 교비생으로 편입해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병천면 아우내장터 3·1운동을 주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
1919년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당시 충남 도경이 있던 공주에서 1심 재판을
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옮겨 2심 재판을 받고 옥중 투쟁 벌이다 순국했다
박목월 시인
당시 23세이던 박목월 시인은 1935년 어느날 기차 안에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여인과 나란히
앉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 해 맞선 자리에 나갔다가 또 다시 그 여인과 만나게 되었다 여인은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인 유익순 이 둘은 바로 이 곳 제일교회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상화 시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시인 역시 공주제일교회 맞은 편 공주의 양가 댁 처녀 서은순과
혼례를 올렸다 그녀의 집은 넓은 한옥이었고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자 공주 신간회 국어연구회
등의 창립장소였다
구 공주박물관
웅진백제대왕묘
숭덕전
백제의 도읍지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의 시대를 웅진시대라고 한다
웅진백제시대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사비로 천도한 성왕 등 다섯 왕의 위패를 모신 전당으로
선조의 덕을 기리고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웅진백제 5대왕 추모제
웅진백제 5대왕(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왕)을 기리는 추모제향으로 향불피우기,
제물진설, 추모식, 추모연주 순으로 의식이 진행된다
숭덕전은 2017년 9월에 준공하고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에 웅진백제대왕 추모제를 올리며 선조들의 덕을 기리고 있다
공주 대통사지 당간지주 ㅡ보물 제150호
<삼국유사’ 흥법조>
"대통원년 (성왕 527년)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 대통사라는 절을 창건하였고이 절이 웅천주(공주)에 있다"
이는 당시 백제에서 양무제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양무제는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이라는 장군의 호를
주었으며 무령왕은 양무제에게 4차례 사신을 보냈고 양무제 또한 무령왕 사망한 다음 해에 장례에
쓰일 최고의 물품을 보내왔다
.그동안 고고학계는 “기록으로만 존재했고, 그 터가 어디인지 몰랐던 대통사가
2018년 공주시 반죽동 발굴조사를 통해 대통(大通)' 글자가 쓰인 기와가 발견됐다
그러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사찰명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반죽이 많아서 반죽골 또는 반죽리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대통 원년(527년) 정미에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웅천주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통사"라고 하였다
백제시대 때 "대통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에 활용되었던 석재들이다
당간지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깊숙히 땅속에 묻혀있어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지주의 받침돌과 한쪽 기둥의 아래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형태가 간결하다
간공
안쪽 위·아래 2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네모난 구멍을 파 놓았다
당간지주는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 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굵은 띠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윤곽대
띠를 둘렀다
. 기둥머리 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았으며
간구
저 홈은 당간을 견고하게 고정 시키기 위해 지지대인 간을 끼웠던 곳이다
이 일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백제의 유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眼象)을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교사였던 일본인 가루베 지온이 여학교 기숙사 욕실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통’명 기와를
수습함으로써 그 실체가 확실해졌다.사찰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는 반죽동 일원은 일본인 가루베 지온
에 의해 사찰의 위치가 비정되었으며 당시 발굴에서 중문터 ㅡ탑터ㅡ금당터ㅡ회랑터 등이 밝혀졌으나
다시 묻어버린 후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게 되어 그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대'(大) 자는 깨져 나가고 '통'(通) 자의 일부만 남았지만, 일제강점기 대통사지 조사에서 수습돼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대통' 명문기와와 문양이 흡사하고 인장을 찍은 형태여서 동일한 명문기와로
짐작된다.기와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아갔다"는 기록처럼 굉장히 얇은 점이 특징이다.
이는 백제 한성도읍기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에서 나온 기와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 유물들은 안정된 층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대통사지에 있던 건물이 재건축되거나 폐기될 때
한꺼번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야외전시장ㅡ중동석조(보물 제149호)
석조를 받치고 있는 받침 기둥은 일본군에 의해 깨어져 없어지고, 이후 반죽동 석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원기둥에 연꽃을 둘러 새긴 모습이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 모양으로 입구 가장자리에 굵은
돌기를 돌렸다. 바깥 면에는 2줄의 작은 띠를 돌려 새기고, 띠 위에 일정하게 연꽃을 장식하였는데
반죽동 석조에 비하여 많이 닳지 않아 문양이 훨씬 뚜렷하다
대통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529)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이 석조는 그 제작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석조의 형태나 연꽃무늬는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야외전시장 ㅡ대통사지에 맀던 반죽동 석조(보물 제148호)
이 석조는 , 일제 강점기 때 중동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대가 말구유로 사용하기 위해 그들이 주둔해 있던
중동초등학교로 옮겨갔으며, 말이 먹이를 쉽게 먹게 하기 위해 석조 몸체의 윗부분을 깨트려내기까지 했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양으로 네모난 바닥돌 이외에는 거의 동그란 구조이다. 바닥돌 위에
원기둥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둥글고 큰 석조를 얹었는데, 석조는 화강암의 안을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 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는데,
이 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그 위로 놓여있는 석조는 입구 가장자리에
굽처럼 넓적한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으며 띠에는 8개의 연꽃잎을 가진 꽃송이를 사방에
도드라지게 새겨 장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직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잎을 장식한 받침기둥 위에 놓인
이 석조는 바깥 면에도 풍만한 연잎과
단아한 띠를 돌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비바람에 의하여 장식무늬가 많이 닳아 있다.
각 층위에서는 백제시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대통’명으로 보이는 인각와를 비롯해 암막새,
, 연화문 수막새, 연목와, 부연와, 소조상, 치미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이들 유물은 중국 남조에서도 살필 수
있어 당시 백제와 중국과의 대외교섭이 밀접하게 이루어졌음을 판단할 수 있다. .
유적에서는 백제시대 문화층 위에 통일신라시대 1m 이상 지반을 성토하여 대지를 조성했던 흔적이 확인됐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대통사지 사찰의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백제시대 ‘대통(大通)’ 인장와와 고려시대
‘대통사(大通寺)’ 명문기와가 함께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대통사가
이어져 왔음을 파악할 수 있었고 조사지점은 통일신라시대 확장된 대통사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