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사키 서점의 하루하루]
내게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 혹은 소설까지도 거의 언제나 입고 나서리라 다짐하고 걸쳐보다가 결국 거울 앞을 떠나기도 전에 벗어놓게 되는 어색한 옷 같은 것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일본의 단시들, 그리고 2000년 이후 처음부터 읽게 된 하루키의 소설들을 제외하면, 그랬다.
대학원을 시작하던 그 시절, 주변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하루키의 소설을 언급하지 않고 수업시간 이외의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을 챙겨보도 하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손에 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내게 뭔가 좀 생경했고 [상실의 시대]에서는 서머셋 모엄의 [인간의 굴레]가 겹쳐 보였다. 그 경험들은 내게, 나는 일본 문화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가보다, 라는 선입견을 심어놓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 원인은 더 멀리서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일본어, 딱 일본어투를 생각나게 하는 담당 선생님의 유쾌하지 않은 억양, 눈빛, 태도, 그리고 무시하는 듯한 어투. 나는 일본어까지 싫어졌다. 어쨌건 한참 뒤까지 이런저런 몇편의 일본 영화를 보았고 제목도 기억은 안 나지만 은퇴한 야쿠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바다가 인상적이었던 포스터의 영화는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일본 영화, 소설은 잘 안 맞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까닭없이 오래 내게 남아 있었다. 기회도 많이 없었고 애써 노력하지도 않았다. 최근 만난 두 편의 영화가 그런 나를 바꿔 놓았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다. 일본 영화가 아니라 어디 영화였더라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했을 것이지만 일본 영화여서 더 좋았다. 결국 '어디' 영화인가가 아니라 '어떤' 영화인가였던 것이다.
오래 사귀던 직장 동료로부터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통보를 받는 좀 어이없는 첫 장면, 그걸 덤덤하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자 말하는 철면피 남자. 회사를 그만 두고 지내가 받게 된 한통의 전화. 모리사키 외삼촌의 고서점 일을 돕게 되며 지내게 된 다카코의 흔하디흔한 하루 일상들. 그 소소한 고요함과 그 일상을 담아내는 담백한 화면이 좋았다. 정기적으로 책을 찾아와 책갈피를 받아가는 중년의 사내, 함께 아르바이트 하는 여대생을 짝사랑하는 수줍은 청년,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 옥상에서 어두워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고서점 축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 그리고 오래된 책을 읽어 가치에 따라 가격을 정하는 모리사키와 다카코. 그들 사이로 마치 작은 개울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영화에는 특별한 무슨 사건도 보이지 않는다. 모리사키와 함께 다카코의 그 전 남자 친구집을 찾아가 사과하라 요구하는 정도가 가장 동적인 장면일 정도. 그런데, 그래서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웃는다. 가만히 화면 속 그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 바로 옆에 나도 조영히 앉았거나 혹은 같이 걸으며 그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더러 한 마디씩 참견도 하면서 그들 속에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된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어떤 고민이 있건 다 내려놓고 그 화면 속으로 들어가 거기 모리사키 서점의 오래된 종이 내음 가득한 책 속에 앉아 퀘퀘하지만 정겨운 내음 은은한 책장을 넘기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거나 어두워진 거리에 켜지는 오렌지 빛 가로등 아래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이는 이층 옥상에 앉아있고 싶어진다. 수줍은 마음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뒤돌아 달려가는 그 아르바이트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짓거나 커피향 가득할 조용한 뒷골목 커피숖에서 느릿한 첼로음을 들으며 앉았거나, 모리사키, 다카코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툭툭 돌맹이를 튕기며 걸어가고도 싶다.
책을 읽지 않으면 세상의 겉모습만 보게 된다, 거나
가치있는 것을 사는 사람보다 스스로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라거나 혹은 무엇보다
가끔은 쉬어가는 것도 좋아, 라는 평범하나 평범하지 않은 울림을 주는 대사가 조용히 크게 들리는 영화.
누구라도 모리사키 외삼촌처럼 "너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리라.
아침부터 시간 쪼개 움직이며 동동거려야 했던 하루. 열차 안에서까지 뛰는 것 같았던 하루. 유난히 더 생각나는 영화. [모리사키 서점의 하루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