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심 2화 - Ἀρχή 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2) 탈북민 수기 김 서 윤 전도사 23,2
고난의 행군이 시작이 된지도 어느덧 수 년이 지난 그 해, 부모님 두 분은 결국 이혼을 하셨 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어머니가 책임지셨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 팔베개를 하고 책을 읽어주시기도 하며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아버지를 향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다. 나는 동생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일주일에 한번씩만 동생들을 보러 갔다.
하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살아오셨던 아버지는 제대로 된 배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고지식 하게 배정된 직장에서 일하셔야했고, 그러다 보니 나 하나도 부양하기 힘드실 정도로 형편 이 어려우셨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 하시며 나를 어머니에게로 보내셨다. 출소하고 돌아오시면서 우리에게 “고생한 만 큼 갚아주겠다.” 약속하셨던 어머니는 그 약속 을 기어이 지켜내셨다.
사업수완이 좋으셨던 어 머니는 아버지와 이혼 후 우리를 데리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동해에서 나오는 특산품(명태, 털게, 낙지 등)을 중국으로 판매하고 중국의 밀가루와 옥수수를 사 오는 중개업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셨다. 나라 전체가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이 굶어죽는 시기였지만 우리집 창고는 늘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도 밥을 배부르게 먹을 뿐 아니라 당시 살던 귀국자 아파트에서 이 웃과 함께 농마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잘 만드시던 깨송편이나 생태나 오징어로 요리한 순대 등 여러 별미도 종종 해먹었 다.
남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평안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집 밖의 상황은 심각했다. 우리 학교는 지역 명문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친구가 밥을 먹지 못해서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그나마 싸온 아이들도 누가 훔쳐 먹을까 몰래몰래 음식을 먹었다. 당시 어머니는 내 도시락을 쌀 때 항상 선생님의 도시락도 싸주셨는데, 선생님은 집에 있는 가족을 위 해서 그 도시락을 드시지 않고 늘 집에 가져 가시곤 했다.
나중에는 결국 도시락을 싸 오는 학 생이 완전히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나도 분위기상 도시락을 챙겨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점심시간에는 집에 달려가서 밥을 먹곤 했다. 어 머니께서는 집에서 밥 먹었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기에 나는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밥 대신 강냉이 국수를 먹었다고 거짓 말을 해야 했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이 반장인 나에게 며칠째 학교에나오지 않는 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반장과 둘이서 그 친구네 집으로 갔다. 학급 동무네 집은 언뜻 봐도 새까맣게 불에 타 있고 그 친구는 없었다. 그 집 앞에서 하염 없이 기다리던 중 드디어 친구를 봤는데 그 사이에 친구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변해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뒷걸음질 을 치는가 싶더니 애써 태연한 척 다가왔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같이 학교에 가자고 했다. 그 친구는 나더러 뭘 알겠냐는 표정으로 “학교는 배부른 애들이나 가는 곳이지”라며 자신은 학교에 가지 않을 것이니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친구도 없이 돌아가면 선생님께 혼날 것 같아 그 자리를 쉽게 뜰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그 친구를 몇 번을 더 찾아갔는데 그 친구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게 되었다.
친구의 부 모님은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질병으로 약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굶주림에 허약으로 돌아가셨고 친구는 어느새 부턴가 꽃제비가 되어 기차역에서 다른 꽃제비들과 함께 승객들에게 물을 떠다 팔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안계시면 이렇게 되겠구나 생각 하며 전에 어머니가 붙잡히셨던 그 때를 떠올렸다.
성경책 소지 혐의로 어머니께서 끌려가셨던 2여년 동안 나도 살기위해 안 먹어 본 것이 없었다. 방학에 외할머니댁 밭에서 엊그제 막 심 어 놓은 감자알갱이까지 다 캐서 먹었고, 한 여름에는 먹을만한 풀뿌리도 없어서 외할머니와 함께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오기도 했다.
그렇게 벗긴 소나무 껍질을 뜨거운 물에 삶고 또 절구에 찧어서 옥수수 가루 한 줌과 함께 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먹고나서 한동안 변비로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배에 가스가 차올라 외할머니가 나무꼬챙이를 들고 나를 따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성공으로 풍족하게 지내고 있지만 어머니께서 안계셨다면 나도 친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의 풍요와 평안은 그리 오 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 는데, 그중 막내 외삼촌은 어머니가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다고 한다. 이사 후 오랫동안 다른 가족과 교류가 없었는데, 어머니와 남달리 우애가 좋으셨던 그 막내 외삼촌께서 수소문 끝에 우리 가족을 찾아오셨다. 두 분은 얼싸안고 기뻐하며 우셨다. 그동안 제대로 된 끼니조차 못했을 남동생을 위해 어머니는 한상 부러지게 솜씨를 발휘하셨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후에 외삼촌은 한참을 뜸들이더니 어머니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출소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외할 머니도 그 충격으로 쓰려져 큰집이 모시고 있다 는 것이다. 게다가 외할머니 상태가 점점 더 악화하여 치매 증상이 나타나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하셨다. 삼촌은 이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려 수없이 보낸 전보와 편지를 부치셨지만 어 머니에게 닿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시던 아버 지께서 돌아가신 소식조차 모르고,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큰 죄책감에 빠지셨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차마 믿을 수 없으셨던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해 달라고 외삼촌에게 부탁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본래 늘 단정한 몸가짐을 유 지하셨고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신 분이셨다.
그렇지만 고난의 행군이라 는 어려움은 노인들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다가 왔고, 연세 많은 두 노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식들이 가져다주는 식량과 물품을 아껴 써가며 삶을 연명하는 것 뿐이었다. 그마저도 며느리들이 계속된 눈치 속에서 외할아버지는 늙은이가 짐짝이 되기 싫으시다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냐는 말씀을 외할머니께 자주 하셨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열심히, 남부끄럽지 않게, 올곧게 살아오셨기에 기나긴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고 추한 모습을 보이길 원치 않으셨던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거두셨다. 이 사건으로 외할머니께서도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셨고 치매를 앓게 되셨다. 외삼촌이 찾아와서야 이런저런 소식을 듣게 된 어머니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무고한 심문과 고문, 수감생활을 딛고 이제는 당과 조국에 의지하지 않겠노라며 오직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 성공을 위해 이제껏 달려왔건만 결국 부모조차 챙기지 못한 처지가 된 자신이 원망스러 웠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나 몰라라 하는 이 나라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일어났다. 그렇게 남동생을 붙잡고 한참을 목 놓아 우셨다. 부모 의 비통한 소식에 제 정신이 아니셨던 어머니는 끼니도 못 드시고 잠도 못 주셨다.
어머니의 마 음은 온통 어둠과 같은 슬픔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마도 그런 슬픔 속에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당과 조국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왔었는지,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로부터 당과 조국을 비방했다는 명목으로 고발을 당하여 보위부로 끌려가셨다. 어머니는 철저하게 혐의를 부인하셨다. 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 온 것이냐, 나라에 충성 한 죄밖에 없다고 잡아떼셨다.
그러자 심문관 은 당과 수령을 비판했다는 내용이 적힌 밀고서 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24시간 재우지 않고 물고문을 자행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에 차 있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누군가가 거짓 증언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일방적으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고문하느냐고 항변하며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내 앞으로 직접 데리고 와보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어머니가 잡혀가신 줄도 모르고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보위부 위원이 아파트 입구에서 인민반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보위원이 내게 어머니가 갖고 있어 야 할 집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한동안 사정이 있어서 못 오시니 맏이가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며 격려하고 떠났다.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듯이 말하는 그였지만 사실 그는 우리가 없는 사이에 어머니의 혐의점을 찾기 위해 이미 집을 한바탕 수색한 뒤였다.
이미 한 차례 어머니가 안 계셨던 경험이 있었기에,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씩씩하게 동생들을 보살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살림을 잘했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밥을 지을 때 입쌀보다는 강냉이 쌀을 더 많이 섞고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며 알뜰하게 살림을 지켰다. 그러다가도 한 밤 두 밤 지나갈 때마 다 혹시나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가슴 졸였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두려움과 무서움에 토끼눈을 하고 나만 바라보는 동생들 몰래 눈물 을 훔치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불면증이 그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다행히 일주일 만에 어머니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혐의의 입증이 어렵고 어머니께서 사업을 하시면서 평소에 관계를 잘 만들어 놓으신 것이 도움이 되셨던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온갖 멍으로 말할 수 없이 엉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머니는 확고하게 깨달으셨다. 아무리 돈을 벌고 성공해도 자유가 없는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맘 놓고 울지도 못하는 나라, 인간에 대한 어떠한 존엄과 존중도 없는 나라,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나라, 그래서 최악의 끝에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 나라 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확신하게 되셨다.
이러한 확신은 지난번 성경책을 소지했다는 의혹으로 2년이 가까이 심문과 고문으로 고통 받았던 일과 함께 어머니의 나라 에 대한 충성심을 모조리 꺾어버렸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오늘부터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말씀하셨다. 그중 첫 번째는 아무리 친한 친구도 집에 데리고 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어딜 가더라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꼭 집에 와야 한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집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의심하지도 말고 밖에서 어른들이 어머니에 관해 묻거든 잘 모르겠다고만 하라고 우리들의 입을 주의시키셨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 있던 식기류들부터 시작하여 식기장, 옷장, 텔레비전까지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다가오는 겨울 방학에는 우리들은 뵌 적 없는 친척집으로 여행을 갈 것인데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의 단짝 친구인 영희한테도 말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매번 방학이면 단짝 친구인 나와 영희 는 방학 숙제도 함께 했었고, 일기와 두 달 치 방학 숙제를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끝내고 서로가 점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여름방 학에는 수영하러 다녔고, 산천어와 메뚜기 잡 으러 다녔고, 이번 겨울에는 목도리랑 손 장갑 을 뜨개질해서 만들어 서로에게 선물하기로 했 고, 그 장갑을 끼고 눈썰매 타러 가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이미 방학 동안 알차게 보낼 시간표를 마쳤던 나는 참 속상했고 영희에게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영희에게 혹여나 잠시 어디 다녀오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주면 꼭 영희가 갖고 싶어 했던 머리 핀을 선물로 주기로 하고 친구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렇게 결전의 날이 밝았다. 달님도 깊이 잠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우리를 깨우셨다. 그리고는 아직 눈을 비비고 있는 우리에게 여려 겹으로 옷을 단단하게 입히셨다. 어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내복을 입는데 내복이 좀 무거웠다.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미리 나의 내복 옷깃에 자그마한 금덩어리들을 넣고 꿰매 놓으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떤 의중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상황의 엄중함과 중압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겹겹이 옷을 껴입은 우리 삼남매에게 어머니는 각자 책가방과 보자기로 묶인 짐을 챙겨주시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준비성은 철저했다. 미리 준비하신 여행증과 통행 등 많은 뇌물이 들어갔을 절차를 미리 완료해 놓으셨다. 심지어 방학 기간에 선생님의 허락 을 받아 여행 학습을 하러 간다는 증명서까지 챙겨놓으셨다. 우리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계속)
전세계 이슬람권, 공산권 교회, 성도 국제선교단체, 순교자, 중보기도, 세계기독교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