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달인 역사학도님! (이데아)]
전국대학의 휴교령이 문교부에 의한 것이다? 웃기는 군요.
문교부는 오늘날의 교육과학기술부이고, 문교부가 휴교령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기초적인 사실조차 왜곡하는군요.
휴교령은 계엄포고령에 의한 것이었는데, 당시 이규현 문화공보부 장관이 17일 심야 11시 40분에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한 것이고, 그 계엄포고령은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의 명의로 발표된 포고령이었습니다.
계엄포교령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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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포고령 제10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을 계엄법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은 일절 불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절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전,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2)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3)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를 일절 불허한다.
바.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 5. 17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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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계엄포고문이 전국의 대학교에 접수된 것은 18일 새벽 2시 20분경을 전후해서 입니다.
전경이 없었다? 장난합니까?
서울의 봄 시기내내 대학생들의 시위에는 항시 전경 즉, 기동경찰들이 기본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87년에 전두환이 신설한 전경은 백골단이겠지요. 뭔 영양가 없는 용어문제나 걸고 넘어지고 있고 참...
서울의 봄 시기에 전국의 대학교에서는 언제나 철야를 하며 다음날의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계엄포고에 의한 휴교령은 위에도 말했다시피 17일 심야 11시 40분에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발표한 것이고 발표와 동시에 이미 공수가 각대학에 난입한 상황인데, 마치 미리 경고라도 했다는 양, 웃기지도 않는 소설을 쓰시는군요.
학생들이 20일에 김대중 내란음모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80년 5월 16일.
전국 59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고, [비상계엄을 5월 22일까지 해제]하고, [현 과도정부는 민주적 정부에게 연내 정권을 이양]하고, [정치일정을 5월22일까지 명백히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과.
이날 국민연합이 [제2차 민주화 촉진 선언문]을 발표하며, [5월 7일 제1차 선언에서 요구한 사항에 대해 5월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 할 것]을 선언한 것을 두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김대중 내란음모'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국민저항을 두려워한 전두환 신군부는, 바로 다음날인 17일 심야에 기습적인 '비상계엄령전국확대'라는 이름으로 군사쿠데타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5.18의 그 참혹한 학살극이었던 것입니다.
신군부라는 용어문제를 걸고 넘어졌는데, 신군부라는 용어는 우리가 편의상 구군부에 이어 등장한 신군부를 구분의 편의상 신군부라 부르는 것이지, 당연히 신군부가 스스로 우리는 신군부라고 주장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신군부라고 하면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를 중심으로 10.26 이후에 12.12 하극상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을 일컬음인데, 이런 별 영양가 없는 용어 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방송국에 한두명이 경계를 섰을 뿐이다?
[31사단 전투상황보고서]에 병력배치현황이 소상히 나옵니다.
31사 전상보에 의하면 7공수 33.35대대가 방송국에 배치된 인원은 아래와 같습니다.
KBS 장교2명 사병40명, MBC 장교1명 사병20명, CBS 장교1명 사병10명, VOC(전일방송) 장교 1명 사병 10명이 배치되었습니다.
이게 한두명이 경계를 선 것입니까?
18일 광주에는 향토사단만 동원되었다?
공수가 31사단에 배속된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임시배속일뿐, 그들은 분명히 향토사단과는 별개인 특전부대 공수대원들입니다.
공수병력이 적었다?
추가 투입된 11공수와 3공수 등을 제외하더라도, 18일 새벽 1시에 광주에 투입된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 33.35댇 병략만 장교 82명 사병 604명입니다.
이게 적은 병력입니까?
이것은 전면적인 전쟁에 투입될만한 본격적인 병력입니다.
21일 시민군에 밀려서 집단발포했다?
아주 거짓말에 도가 튼 분이로군요. 집단발포전에는 시위군중은 있었어도 시민군이라는 것 자체가 아애 존재하지를 않았습니다.
공수가 시민대표단과 합의하여 21일 도청에서 철수하기로 약속하였는데도 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내버스기사 등의 시위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 행진하면서 계엄군 철수를 외쳤는데, 시위군중의 규모에 당황한 공수가 밀리면서 우왕좌왕 하다가 공수의 장갑차가 뒤로 후진하면서 자기 동료대원을 실수로 깔려죽여버립니다.
이 장면을 본 공수들이 흥분하여 즉각적으로 무차별 집단발포를 해버리고야 말았고, 이로 인해 시위군중 중 60명이 즉사하십니다.
이는 당시 현장에 배치되었던 전 11공수대원 이경남 목사님이 증언하신 내용입니다.
21일 도청 병력에 실탄이 없었다고 님은 주장했으나 이미 실탄은 지급되어 있었고, 위와 같은 경위로 집단발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전경이 없었다고 했다가 또다시 극소수였다고 했다가 또 4,50대였다고 했다가, 지금 장난합니까?
거짓말도 계속 이어가려니 벅차시지요?
첫날에 수십명의 경찰이 인질로 잡혀서 그들을 구하려고 7공수가 투입됬다?
위와 같이 31사단 전투상황보고서에도 나와있다시피 7공수는 18일 새벽 1시경에 광주에 도착과 동시에 각 대학을 급습, 2시경에 이미 전남대를 비롯한 대학 점령을 완료합니다.
말했다시피 7공수는 17일 심야 전북대에서 이미 고 이세종씨를 살해한 바 있고, 이는 당시 7공수 군의관 위계룡님의 증언록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위학생들이 전경을 인질로 잡은 것은 18일 오후 5시경으로, 다른 의도가 아니라 연행해간 학생들과 교환하자는 서투른 인질극이었고, 공수는 이에 즉각 망설임없이 학생들에게 쇠곤봉을 휘둘렀으며, 도망가기 급급한 학생들은 인질도 곧바로 놓치고야 맙니다.
7백24명은 짜집기고 전경은 많이 없었다?
육군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는 분명히 31사단의 작전지시로 전남대 부근에 경찰 7백 24명을 투입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순 거짓말로 일관하는 역사학도님이군요.
그나저나 제가 역사학도님의 글에 반론한 글에는 윗대목 3개 이외에 전혀 아직도 아무런 답변이 없으시군요.
그 3줄에 대한 답변도 계속 횡설수설이시고.
제 반론글에 대한 재반론글 먼저 부탁합니다.
자꾸 딴청피우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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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씨의 똘마니 질럿이는 내 모든 반론글들을 즉시 역사학도씨에게 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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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역사학도 작성시간 10.01.10 휴교령 문제는 문교부 권한이고 계엄사가 관여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중요하기에 광주청문회 때 5.18측이 김옥길 전 총장 불러놓고 추긍했으나 5.18측 판정패였습니다. 김대중이 학생들 이용해 전민봉기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던 음모가 분명하게 드러난 5월 16일 오후 휴교령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으나, 이미 그 이전부터 김옥길 장관은 그 필요성을 대통령과 총리에게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http://cafe.daum.net/issue21/3IBb/383 에서도 밑에서 두번째 단락을 보면 그 에피소드에 대한 신현확 전총리의 육성 증언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