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심주일 부천창조교회 담임목사 -
2017.08.25 15:06
"통일은 꼭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해방 후 북한 김일성 정권에서는 종교를 무참하게 탄압하였다.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고 목사를 반동이라며
인민재판장에 세우기도 했으니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인민이 주인 된 세상을 만든다는 노동당정권의 이중적
태도에 의심이 갔다. 그것이 독재국가의 본성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사실상의 김정일 정권에서는 1980년대 말 노동당이 허가한 성당 1개를 포함해 교회 3개를 평양에 세웠다.
허나 그것은 외국관광객에게 보여주고 평양체류 외국인이 이용하는 것이며 일반주민들이 자유롭게 찾는 곳은
절대 아니다.
김일성으로부터 3대로 이어오는 김정은 정권에서도 종교탄압은 여전하다. 가령 중국에서 북송된 탈북자가
보위부 취조에서 “중국에서 숨어 다니던 중 남한 목사(선교사)를 만나고 교회에서 성경책을 보았다”고 하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최소한 2~3배나 되는 가증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탈북민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북한에서 이렇게 종교를 극심히 배척하는 이유는 수령이 인민들을 기만한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정해야 만이 수령의 위상이 유지될 수 있기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종교가 인민에게 퍼지는
것을 막고 있다.3만 탈북민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자유롭게 종교를 가진다.
그 중에는 개신교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 대략 20여 명, 전도사 70여 명, 신학생 100여 명이 있다.
얼마 전 서울 용산역 근처 커피숍에서 탈북민 출신 목회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심주일 부천창조교회
담임목사를 만났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50년 2월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리농맹위원장(마을 농민들의 사상 및 학습생활을
지도하는 이장급 간부)이었고 모친은 농민이었다. 내가 모친의 등에 업힌 지 4개월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그 후 4개월 뒤 부친이 치안대에 의해 총살당했고 그걸 복수한다며 형님이 군대에 나갔지만 행방불명되었다.
- 군 출신이다. 그것도 보기 드문 정치장교로...
1967년 남포교원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푸에블로호사건’(북한이 원산
앞바다 자국영해에 침입했다며 공해상에서 미군함 ‘푸에블로호’를 강제로 나포한 사건)이 터졌다.
하여 인민군에 탄원 입대했고 인민무력부 16고사포 사단에 부대배치를 받았다. 이 즈음 김일성의
평양방어사령부 창설명령이 하달되었고 나는 군사복무를 해도 평양에서 하기를 원했다.
- 군에서 진급과정을 말해 달라.
입대 후 1년 뒤 한 개 소대가 전몰된 소련제 고사포 보관 갱도공사장에서 유독 살아남아 국기훈장 3급을
받았고 중대초급단체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고사포 보관 위장막 설치작업 평가에서 상부의 최고점수를 받아
노동당에 입당하였다.
- 자세히 소개해준다면...
1970년 무력부(남한의 국방부) 산하 김책정치군관학교(당시 평안남도 개천군에 소재, 71년 평양시 형제산
구역으로 옮기며 ‘김일성정치대학’으로 이름이 바뀜)에 입학하였다. 72년 그 대학을 졸업, 소위계급을 받고
중대 정치지도원이 되었다. 1980년 김일성종합대학 의탁생(4년)으로 졸업, 연대정치부에 배치 받았고
85년부터 평양방어사령부 정치부 조직부 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계급은 중좌였다.
- 김일성종합대학 의탁생은 무슨 소리인가?
북한에 ‘김일성’ 이름을 붙인 학교가 모두 5개 있다. 군(무력부 산하)에 있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일성정치대학, 민간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고급당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이다.
평양방어사령부와 호위사령부에서는 연대급 정치간부양성을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의탁해
양성한다.
- 인민군의 생활 실태는
1994년 김일성 사망이후 눈에 띄게 군인들의 생활이 내리막길로 떨어졌다. 말단부대에서는 하전사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져 나갔으며 사령부에서는 본인을 제외한 가족의 식량배급도 중단되었다. 간부신원조회 차
지방출장을 갈 때면 인민들이 현지에서 굶어죽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게 나라냐?”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고 그럴수록 김정일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 북한 정권에 해이를 느낀 계기가 있나?
1997년 5월 경, 중앙당에서 간부들에게 비공개강연을 해주었다. 내용은 황장엽 탈북관련인데 미제와
남조선의 고정간첩, 반동이라고 했다. 속으로 “황장엽 중앙당비서가 남조선으로 도망갔다면 공화국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 특별한 일이 있었다면...
어느 날 국가보위부 외사처에서 근무하며 중국출장이 잦은 지인으로부터 몰래 전해준 성경책을 받았다.
그와는 자주 술을 먹으면 취중에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을 다소 비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성경책을
처음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당국의 ‘금서’이니 말이다. 허나 나도 몰래 내 손이 성경책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 읽은 독후감은?
일주일 만에 집에서 정독했는데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은 왜 인간이 귀한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주체사상에도 없는 해설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해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면서 내가 굳이 독재자의 땅에서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 탈북 경로를 말해 달라
1998년 3월 집을 나서 무작정 평양발 만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후 자강도 만포에서 이틀간 지형파악을
하고 깊은 밤 국경을 넘었다. 위험의 고비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
중국에서 지만, 통화, 대련 등을 거치며 7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1998년 10월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신원조사 및 특정기관 자문활동 등을 마치고 1999년 사회로 나왔다. 나는 평양에서 비밀리에 성경책을
보았음으로 남한에 가면 꼭 신학공부를 하리라 결심한 사람이어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석사과정 3년을,
‘한국성서대학’에서 박사과정 2년을 마쳤다. 2005년 목사안수를 받았고 이듬해 6월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 담임한 창조교회를 소개해 달라.
내가 산 증인이 되어 체험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전도방식이다. 성도들 중에는
탈북민도 있으며 북한에서 받은 상처를 하나님을 만나고 치유 받는다. 남북통일 예행연습을 우리 교회에서
솔선수범으로 실행한다.
-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어떻게 보나
나름대로 분석하면 남한교회가 북한에 선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북한이 너무 폐쇄적이기에
선교사를 파송할 엄두를 못한다. 당장 선교사를 보내고 물질을 투입하면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북한선교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북한선교를 하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 다른 대안이 있다면...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사역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쓴 신앙서적을 중국에 체류하는
북한주민들에게 건네주는 일을 한다. 조선인민군 중좌출신의 탈북자가 남조선에 와서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 또한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바른 신앙인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한목사
수백 명보다 탈북민 신앙인 한 사람이 고향에 주는 영향력은 더 크다.
- 심 목사의 통일관은?
하나님께서 한반도통일을 불허하는 이유는 남북한이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교회들은 희생의
각오가 부족하며 김일성 우상화에 빠진 북한주민들 역시 준비가 안 되었다. 하나님을 미리 알고 섬기는
남한교회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필사의 각오로 북한선교에 앞장서야 한다. 통일은 꼭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오래전부터 탈북민사회가 단합이 안 되었다는 소리가 있다. 솔직히 말해 탈북민 출신의 목회자들조차
서로의 화합과 통일이 안 된 상태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라면 양심에 어긋나는
목회활동을 조금이라도 하여서는 안 된다. 일부 탈북목사들은 그냥 ‘탈북간판’을 걸고 상업적 목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데 진짜 실망이다. 하나님께 죄짓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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