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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18의 영웅 김동문 기자, 대한민국을 구했다.

작성자청산별곡|작성시간18.05.20|조회수31 목록 댓글 0

  

나주출신으로 당시 전남매일신문 광주지사에 근무하던 김동문 기자는 5.18의 영웅이자 대한민국 영웅이다. 역사현장의 중요한 증인이자 체험자일 뿐 아니라, 장비의 용기와 제갈 공명에 비견될 지혜로서 광주폭동 전국 확산을 막아 대한민국을 구한 분이다.

 

우리역사에 이런 분을 또 만나기 쉽지 않다. 나는 이 분에게 영웅의 칭호를 받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웅을 기리지 않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혼란은 아직도 이런 영웅을 장삼이사로 취급하는 우리국민의 천박성 업보라 본다.

 

김동문 기자가 쓴 [記者가 본 歷史現場 "반란의 도시"] 수기는 광주사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바꿀 결정적인 증거이고, 왜곡 조작된 광주5.18사건을 바로 잡을 사초다. 국가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영웅이 계속 탄생하도록, 이 분의 당시 활약상을 청소년교과서에 실어 후손들에게 귀감으로 삼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김동문 기자의 체험 증언은 우선 광주5.18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바로 잡는다. 전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광주5.18의 진실이다.

 

1. 광주5.18 당시 최초로 경찰서가 피습 점거당하고 무기가 피탈된 건 198051912, 무장폭도에 의한 광주의 관문 나주경찰서다./민주화운동이었다는 건 애초 거짓말이었다는 증거

 

- "나주경찰 잔여인원은 지금 서()를 철수합니다. 현재 폭도들에 의해 점거 당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전화가 끊겼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19일 정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 사무실 앞 국도를 질주하는 버스에는 각목과 몽둥이, 그리고 칼빈소총으로 무장한 장발의 폭도들이...

 

- 이 때 사무실 입구에 사복차림의 정보과 0경장이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찾아왔다. 경찰서가 피습되고 무기고도 털리고 저마다 피신처를 찾아...

 

2. 최초의 무기고 피탈은 1980519일 오후 3시 나주 금성동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다./21일 광주도청 앞 계엄군 발포로 시위대가 자위차원에서 무장했다는 건 거짓말

 

- 신의주1호선인<광주-목포>도로에는 삽시간에 각목과 쇠 파이프 그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장발족의 청장년들이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채 요란한 함성을 지르고 목포와 영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 박경장과 유리창에 새겨진 신문사 제호를 떼다 말고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박 경장이 200미터 전방에 있는 금성동파출소 옆 예비군 무기고를 걱정한다. 그곳은 나주읍내에서 예비군 무기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 이 때 광주 아시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군용트럭이 사무실 앞을 질주하며 파출소 쪽을 향해 소음을 내며 달린다. 파출소 방향으로 질주하던 군용트럭은 갑자기 무기고 블록담장을 향해 돌진, 무기고를 박살내고 있다. 19일 오후 3, 곧바로 요란총성이 들려온다.

 

- 박 경장이 건네준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신 이 준위(보안대 주재관)"김대중의 내란폭동이야" 외치며 정신없이 도망쳐 온 경위를 설명했다. ~ 피습 당한 무기고에는 M1, 칼빈소총 1600. 중화기인 M60기관총과 수류탄이 든 상자 등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 20일 아침 6시 새벽부터 나주읍내 도로에는 계엄철폐란 붉은 색 머리띠에 복면을 한 폭도들이 어제 탈취한 총기로 무장을 하고, 버스차창 밖으로 각목과 총기를 휘두르며 도로를 질주(함평 목표 방향)하고 있었다./무장 세력이 왜 목포 방향으로 질주했을까?

 

3. 광주5.18 당시 최초의 총성은 1980519일 오후 3, 나주 예비군무기고를 탈취한 무장폭도들에 의한 발포였다./처음부터 내란을 기획한 증거

 

4. 방위산업체 광주 아시아자동차가 1980519일 오후 3시 전에 폭도들에게 점거당해 군용트럭이 피탈되었다./계획적 조직적 폭동이었다는 증거

 

5.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1980519일 아침 8시에 이미 광주외곽까지 전파되고 있었다./폭동의 사전 기획 조직 증거.

 

- 공수부대가 지역계엄사령관인 31사단장 정웅 소장(호남출신) 명령을 받고 시위현장에 투입된 건 1980518월 오후 5시경, 방석모도 없이 투입되었다가 시위대의 투석에 부상자가 속출하며 시위대를 해산하고 작전 종료한 게 12시경. 그런데도 벌써 19일 아침 8시 나주까지 학살유언비어를 전파하고 있다.

 

- 1980519일 아침 8시경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파와 버스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채 나주경찰서 보안과장 0경감이 전투복 차림으로 호각을 불어대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광주행 버스들 진입을 차단하고 있다.

 

-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김 차장 여기서 뭣하고 있는가?"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마구 죽이고 있다는데..." 선배 0씨가 상기된 모습으로 웅성대는 군중들을 향해 열변을 토한다. "나주인이여, 광주로 갑시다. 지금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총칼에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간답니다."/감히 전투복 입은 보안과장 교통통제를 면전에서 무시하고 광주궐기 선동.

 

- 40대 후반인 그는 "민주회복 국민회의"란 김대중의 외각 단체로 알려진 재야 운동권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어 나는 야당 정치권이 개입된 사태로 판단, 도망치듯 1키로 떨어진 집을 향해 무작정 ~

 

6. M16을 폭도들도 가지고 있었다.

 

- 벽시계가 24일 새벽 3시를 알려준다. 정소령이 건네준 모포 한 장을 들고 긴 나무 의자에 누웠다. 24일 아침 진압작전을 앞두고 문득 월남 퀴논 지역에서 산화한 36명의 전우들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 당번병이 대대장과 현역병16명이 출동 했다고 알려 준다. 16명의 병력으로 진압작전에 나섰다는 소식에 심장이 멈추듯 전신이 떨려온다. 저들은 줄잡아 1천여 명의 병력으로 추정되고 있어 1100의 작전이다.

 

- 부대 전 인원 60명이 출동하기로 다짐했는데, 대대장은 나를 포함 피신 온 휴가 장병과 방위병, 예비군들을 남겨두고 16명의 현역들과 출동한 모양이다.

 

- 꿈속에서 들었던 총성이 현실임을 알고 온몸이 쭈삣해 진다, 직전에 울린 총성이 앰16 총성이기에 우리 현역들의 신변이 염려 되었다. 나는 당번병에게 부대 잔류 병력의 안전을 맡기고 부대 앞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서른일곱의 나이를 잊은 채 마구 뛰어 ~

 

7. 헬기를 향한 무장폭도 사격은 나주에서 이미 있었다.

- 21일 오후 4, 간신히 무전교신이 잡혀 식량지원을 요청한 헬기가 부대 쪽으로 날아오자, 부대 300여 미터 앞 폭도들의 진지에서 갑자기 총성이 요란하다. 폭도들이 쏘아 대는 총알을 피하느라 고공비행으로 부대 쪽을 향해 접근하다 연병장 상공에 이르러서는 더 높이 고공을 선회하며 부대 앞에서 쏘아 대는 총격으로 착륙을 못한 채 선회를 반복하고 있다.

 

8. 무장폭도가 19일 밤부터 군부대를 포위 공격했다./이게 반란 아니고 뭐냐?

 

- 20일 아침 6시 새벽부터 읍내 도로에는 붉은 색 머리띠에계엄철폐란 머리띠에 복면을 한 폭도들이 어제 탈취한 총기로 무장을 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각목과 총기를 휘두르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 8시께 보급소의 손 총무의 안내로 군부대로 피신하기 위해 자전거와 남루한 점퍼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출발을 서두는 중, 도정공장을 운영하는 윤 선배가 총을 든 폭도들이 찾아와 쌀가마를 털어 갔다며 피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 어제 밤부터 부대정문 쪽은 이미 폭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대대장의 전언을 받은 터라 나는 후문 쪽 2킬로를 돌아서 보산리 맛재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 도축장 앞 농로 쪽은 대형트럭(주황색)이 도로를 차단한 채 무장한 장정 6~7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군부대 후문 쪽을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트럭 꽁무니에 영암 시민군이란 표식이 붙어 있었다.

 

9. 군부대가 폭도들에게 점령당할 위기 속에서, 37살의 월남전 참전용사 김동문 기자가 고작 16명의 현역장병과 함께 1천여 명의 무장폭도를 상대로 군부대를 지켜냄으로서 광주폭동 확산을 막고 대한민국을 구했다.

 

- 통신 식량 지원의 두절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16명 장병의 정신적 지주가 된 김동문 기자의 애국심 용기 지략 담대함에는 영웅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우리역사에 이런 위인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 목포 함평 방향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폭도들이 나주에서 묶여 20일 오후에야 광주로 진입할 수 있게 됨으로서 광주폭동을 호남전역으로 전파시키려든 애초 계획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 (19일 오후) 나는 예비군대대로 전화를 돌렸다. 대대장 정 소령 음성이 들렸다. “김 차장이오. 부대로 피신을 해야겠는데 부대사정은 어떤가?” “여기도 이미 전화국 앞 송전탑 부근은 버스에 무장한 폭도들이 부대정문을 차단하고, 마구 위협사격 하고 있소.” 라며 당황해 했다. “무조건 부대만은 지켜야 하네. 부대가 무너지면 큰일이네. 날이 밝는 대로 부대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10. 목숨 걸고 1천여 명의 무장폭도를 상대로 군부대를 지켜내고, 폭도들 광주진입을 지연시킨 대대장 정 소령 외 15명의 장병은 애국자인가 반역자인가?

 

- 광주 호남사람들이 반드시 답해야 한다. 광주5.18의 진상규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내용 발췌/김동문의 세상 바로잡기/http://cafe.daum.net/kdmwj/GG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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