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의 개념과 유형]
1) 실제 작가, 내포 작가, 화자
'시점'을 이처럼 '초점화'로 대치시키는 일은, 화자의 개념과 역할을 '보는 자 또는 경험하는 자'의 그것으로부터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초점화자와 구분되는 화자의 개념은 어떤 것이며, 그는 정확히 작가와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저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 저서야말로 하나의 소설을 쓰거나 읽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 체계로 바라보고 화자의 문제를 비교적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최초의 서사 이론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저서가 서사 이론에 공헌한 핵심적인 것의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실제 작가'와 '내포 작가(the implied author)', 그리고 '화자'를 구분했다는 데 있다. 부스는 이 저서에서 실제 작가와 화자의 거리는 물론 내포 작가와 화자 사이에도 뚜렷한 경계선을 그어 보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내포 작가는 "실제 작가가 특정한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자신의 '제 2의 자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실제 작가와 내포 작가의 불일치가 암시되어 있다. 예컨대 작가는 실제 자신의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상이나 정서를 소설에 표현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쓰는 서로 다른 작품마다 역시 상이한 사상과 정서를 담을 수도 있다. 설령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설화하고자 한다 셈치더라도 그 자신과 그의 '제2의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존재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가의 제2의 자아로서의 내포 작가란 결국 '텍스트 전체의 규범과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은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게 있어서 내포 작가는 어디까지나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일 뿐 의미의 근원으로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에 대한 독자의 관찰과 추측을 통하지 않고서 그것이 감지될 길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리몬-케넌이 내포 작가를 선험적이고 고정된 의미가 함축된 '작가의 제2의 자아'로서보다 "텍스트의 모든 성분들로부터 독자에 의해 추측되고 집성된 하나의 '구성물'"로 보는 쪽을 선호하는 것도 이 점에 연유한다.
그렇다면 부스에게 있어 화자는 어떤 존재일까.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을 상당히 섬세하게 인식해 낸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든, '그'든 이야기하는 한 사람의 의식을 통과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연극에서조차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것이 누군가에 의해 서술된다. 소설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우리는 하나의 경험하는 주체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경험하는 그의 견해가 우리와 사건 사이에 끼어들게 된다. {살인자들}처럼 그러한 '나'가 없는 경우, 경험이 없는 독자는 그 이야기가 중재 없이 전해진다고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화자에게 아무런 개인적 특성이 주어져 있지 않더라도 작가가 하나의 화자를 이야기 속에 설정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이미 중재되고 있는 것이다. 굵은 글씨는 필자의 것임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작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곧 그가 자신의 대리인인 화자의 '중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는 이야기의 성격과 주제와 예술적 효과에 따라 그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유형의 화자들을 기용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부스는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의 화자들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극화된 화자'와 '극화되지 않은 화자', '관찰자로서의 화자'와 '행위자로서의 화자', '자의식적 화자'와 '그렇지 않은 화자', '신빙성 있는 화자'와 '신빙성 없는 화자', '전지적 화자'와 '제한적 화자' 등.
2) 화자의 여러 가지 유형
부스가 서술 효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로 내세우는 것은 '화자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극화되어 있느냐(극화된 화자)' 아니면 '화자가 신념이나 특성을 작가와 공유하느냐(극화되지 않은 화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화된 화자' 중에는 단순한 '관찰자로서의 화자'도 있고, 사건의 진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행위자로서의 화자'도 있다. 또 필딩의 {톰 존스}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스스로를 작가로 의식하고 있는 '자의식적 화자'가 있는가 하면, {허클베리 핀}처럼 작품을 쓴다는 일에 대해 말을 극히 적게 하거나 까뮈의 {이방인}처럼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화자'도 있다. 그리고 내포 작가, 화자, 다른 작중인물, 독자 등 네 사람 사이의 '거리'에 따라 '신빙성 없는(unreliable) 화자'와 '신빙성 있는(reliable) 화자'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화자는 도덕적·지적·신체적·시간적 측면에서 내포 작가나 그가 하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독자의 일반적 규범과도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이 거리는 화자의 의도적인 거짓말에 의해 생기는 수도 있겠으나, 사태의 실상에 대한 화자 자신의 인지 결여로부터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밖에도 부스는 엄격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지닌 화자(전지적 화자)와 현실적 시각과 추측에 국한되어 있는 화자(제한된 화자)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화자의 유형에 대한 부스의 설명은 그 나름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것을 텍스트 전체의 구조 속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규명할 방법은 없을까? 그 가능성을 주네트가 보여주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크게 화자가 속해 있는 '서술의 차원(Narrative Levels)'과 '스토리에의 참여 범위'를 기준으로 화자의 유형을 가르고 있다. 그런데 스토리에 참여하는 '동종화자(homodiegetic)'와 참여하지 않는 '이종화자(heterodiegetic)'에 대한 후자의 논의는 부스도 이미 행한 것으로 별로 새로울 것은 없는 논의이다. 그러나 화자를 서술 수준과 연계시키는 전자의 논의는 분명 주네트가 화자 이론에 새롭게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서술 수준에 있어서 화자가 자신이 서술하는 스토리보다 상위에 있으면 '스토리 외적 화자(extradiegetic)'이고, 화자가 자신이 서술하는 스토리 내의 작중인물이면 '스토리 내적 화자(intradiegetic)'이다. 이때 전자가 '1급 화자'라면 후자는 '2급 화자'인데, 스토리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3급, 4급 화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몇 겹으로 이루어진 액자소설의 경우 각 서술 수준들의 화자들은 원칙적으로 그 수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 중의 한 주인공인 '알리바바'와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그건 확실히 넌센스일 것이다. 그러나 주네트는 '겉 이야기'의 화자인 '트리스트람'이 탈선하여 '속 이야기'의 아버지께 낮잠을 주무시라고 요청하는 {트리스트람 샌디}나 피란델로의 희곡인 {저자를 찾아나선 여섯 등장인물}과 같이 역전되고 극단적인 형식도 존재할 수 있음을 귀띔하고 있다.
3) '화자성(narratorhood)'의 스펙트럼
S.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Story and Discourse)}은 저자의 독창적인 이론보다는 주로 기왕의 서사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저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이 책에는 논쟁거리가 될 만한 저자 특유의 화자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단적인 예로는 부스의 서사 이론을 토대로 그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기호학적 소통 모델을 들 수 있다.
이 모델은 우선 '실제 작가'와 '실제 독자'가 서사 거래의 장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텍스트 상에서 각각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라는 대리인에 의해 위임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자'와 '수화자'에만 유독 괄호가 부여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양자가 여타의 참여자들과 달리 선택적 요인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채트먼의 도식은 텍스트 내에서의 화자와 수화자를 경우에 따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채트먼이 '화자성(narratorhood)의 부정적 극점'을 '최소한으로 서술된(minimally narrated)' 것이 아닌 '서술되지 않은(nonnarrated)' 이야기로 지칭하고, 이런 종류의 전달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언하고 있는 데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화자의 중재를 느낄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소위 '화자성(narratorhood)의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 한쪽 극점에 해당하는 '화자성의 부정적 극점'은 '순수한 보여주기'의 극점으로서 작중인물의 언행과 생각이 극화되거나 대화, 일기, 편지 등이 인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의 극점인 '화자성의 긍정적 극점'은 화자가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순수한 말하기'의 극점으로, 화자가 대명사 '나'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해석하거나 관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채트먼은 이처럼 예외적인 극점들보다는 양자 사이에 내포되어 있는 '숨은 화자'와 '드러난 화자'의 보편적 스펙트럼 속에서 담론의 차이가 찾아져야 함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가 작성한 '드러난 화자'의 스펙트럼은 배경묘사→시간적·공간적 요약→등장인물이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보고→논평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숨은 화자'에 의한 서술은, 독자에게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려주면서도 정작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담론의 그늘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흔히 '간접화법'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이것은 화자의 중개나 해석적 장치를 드러내긴 하지만, 화자가 숨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존은 돌아오겠다고 말했다"라는 문장에서 화자가 숨어 있는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보고동사인 '∼고 말했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깊고 활기차고 쾌활한 콜리의 목소리를 들었다"의 경우 밑줄 그은 부분은 과연 누구의 언어인가? '그'의 것인가, 아니면 숨은 화자의 것인가?
4) 부재하는 화자?
그런데 이러한 채트먼의 논의는 곧 부분적으로 리몬-케넌에 의해 반박당하게 된다. 즉 그의 {소설의 시학}은 채트먼의 소통모델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채트먼이 서사 거래의 장 내부에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을 겨냥한다. 내포 작가가 하나의 구성물에 불과하며 목소리도 없고 직접적 소통수단도 없다면, 이러한 내포 작가에게 소통 상황 내에서의 송신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용어상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내포 작가가 철저하게 실제 작가와 화자와 구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비인칭화되어야 하며, 발언자나 목소리로서보다는 일종의 내포적 규범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는 결국 서사 거래의 장에서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채트먼의 도식에 대해 리몬-케넌이 내비치는 또 하나의 불만은, 그것이 화자와 수화자를 소통 상황의 선택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에는 항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떤 서사물의 텍스트가, 순수한 대화의 대목들이나, 병 속에서 발견한 원고나, 잊혀져 있던 편지나 일기를 제시할 때에도 이 담화의 발언자나 필자 외에 그 대화의 인용이나 글로 씌어진 기록의 복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상위의 서술상의 권위자가 있는 것이다. 부재 화자와 현존 화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채트먼의 양분법 대신, 나는 텍스트 내에 존재하는 화자를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느냐 하는 정도나 형식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굵은 글씨는 필자의 것임
필자가 보기에 리몬-케넌의 이 진술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자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도 엄격한 정의이다. 그의 말마따나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은 순수한 '보여주기' 또는 '객관적 서술'의 극치라 해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대화 역시 누군가에 의해 '인용'되어 있는데 이 '누군가'야말로 화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은연중 그는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지식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적 발언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현존을 들키게 되어 있다. 설령 서술이 철저히 극화되어 등장인물의 '내적 독백'의 형식으로 나타날지라도, 그리고 나아가 단지 발견된 일기나 편지의 형식으로 제시될지라도, 여기에는 최소한 그것을 '옮겨 적고' 있는 누군가의 중재 행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몬-케넌은 부스 이래 자주 언급되어 온 화자의 '신빙성' 문제도 좀더 꼼꼼히 따지고 든다. 그 동안 대부분의 논자들은 화자의 신빙성의 여부를 내포 작가의 가치기준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로 설명해 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같은 설명이 납득할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케넌은 묻는다. 화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내포 작가의 가치기준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물론 그 역시도 내포 작가의 가치규범과 화자의 그것 사이의 간격을 지시하는 텍스트 내의 다양한 요소들을 제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신빙성 없는 발언'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경우라는 것이 존재하며, 실제로 화자의 신빙성 여부를 간단히 결정하기가 어려운 텍스트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지 않는다. 예컨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에 나오는 가정교사는 일단 귀신들린 두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빙성 있는 화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자신의 환각의 세계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하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신경증 환자로 간주해서 안 될 이유도 딱히 없는 것이다.
리몬-케넌의 이 같은 지적들은 왠지 우리에게 화자 이론과 서사학, 나아가 구조시학 전체에 대한 희망과 절망 모두를 한꺼번에 예견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구조시학이 한층 섬세한 분석의 잣대들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하자면 무슨 신념에 찬 각오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케넌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사학을 포함한 구조시학 자체가 운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백'을 그 스스로 헤집는 작업의 시발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잔뜩 뒤덮인 모래더미를 헤치고 가까스로 '구조'와 '체계'라는 단단한 철근을 들춰냈으나, 그 철근들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 모래들의 비의까지는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 그런 불안한 예감을 그는 어느 순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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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푸실 작성시간 18.09.19 "그 한쪽 극점에 해당하는 '화자성의 부정적 극점'은 '순수한 보여주기'의 극점으로서 작중인물의 언행과 생각이 극화되거나 대화, 일기, 편지 등이 인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부정적 극점에서는 작중인물이 하는 언행이고 긍정적 극점에서는 화자라고 하셨는데 부정적극점에서도 화자로 대체할 수 있나요? 두 주어가 다른것이 왜그런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푸실 작성시간 18.09.19 그리고 숨은화자에 관해서 간접화법이 아닌 직접화법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