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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irony)

작성자김지성|작성시간10.05.27|조회수11,108 목록 댓글 0

아이러니(ir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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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초기 그리스 희극의 전형적 인물인 에이런(eiron)의 말과 행동 양식에 적용되었던 용어이다. 그의 상대역으로는 또 다른 전형적 인물이 허풍선이 알라존(alazon)이 있는데, 그는 허풍을 떨면서 상대방을 속여 그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패배자로 등장하는 에이런은 약하고 왜소하며 교활하고 약삭빠르다. 그는 그의 힘과 지식을 숨기고 천진함을 가장함으로써 점차 알라존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아이러니는 어떤 경우에든 이러한 원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이의 괴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이러니의 두 가지 근본적인 유형에는 언어의 아이러니와 상황의 아이러니가 있다.
  전자는 비유의 일종으로, 말하는 사람이 뜻한 숨겨진 의미가 겉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다른 경우에 해당하고 후자는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자신도 똑 같은 불행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떠들썩하게 웃어댈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극적 아이러니는 비극적 아이러니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등장 인물이 작중의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반대의 것을 기대할 때, 등장 인물의 무지와 관객의 인지 사이에 대립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작품이 '오이디푸스 왕'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상이나 김유정 등이 이 기법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 '반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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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 개념의 변천과 종류의 다양성
  아이러니는 아주 다른 형태를 지닐 뿐만 아니라 개념상으로 말해서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다. 16세기에는 '아이러니'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을 뜻할 뿐이었다. 오늘날 '아이러니'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른 뜻을 나타낸다. 그 결과 아이러니의 '종류'에 대한 명칭의 이질적인 集合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와 같은 것은 아이러니란 말을 에워싸고 있는 애매성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희극적 아이러니'란 희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란 비극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 는 소포클레스的인 아이러니'와 同義的인 말인데 소포클레스의 비극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극적 아이러니'와도 同義的인 것인데 그것은 또 비극이나 또는 드라마조차도, 또한 문학조차에 한정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는 운명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대개 느슨한 뜻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自己아이러니'는 자기 스스로를 희생해서 의식적으로 아이러니칼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실지로는 무의식적인 자기폭로의 아이러니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어왔다. '태도의 아이러니'(irony of manner)는 A.R.톰슨의 《메마른 模擬》에서 '성격의 아이러니'(irony of character)와 同義적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에 대하여는 아직 인정된 명칭이 부여되지 않았고 명칭이 주어진 것들 사이에서도 重複的이고 二重的인 것들이 많다.

▲ 아이러니의 초기(전통적) 개념
  초기 아이러니는 반어, 즉 <거짓 꾸밈>을 뜻하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반대되는 표현을 하여 '날카로운 멋'과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는 기법인데, 이 때의 의미는 머리 속의 생각(뜻하는 의미, what is meant)과 겉으로 표현한 말(what is said)이 다를 때 이를 가리키며, 언어(말)의 아이러니와 상황의 아이러니두 가지가 있다.
1) 언어적 아이러니 (verbal irony)
  언어적 아이러니는 '표현된 것'과 '의미된 것'의 상충에서 오는 긴장이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실질적 의미 사이에 상반된 관계가 있는 말. 잘했다(속뜻; 잘못했다), 똑똑해라(어리석다) 식의 표현은 상대방에게 우회(迂廻 ; indirection)적 기능에 의존하여 진술하는 언어적 반어로 빈정거림, 욕설, 비난 등의 경우에 쓰인다. 소크라테스가 무지(無知)를 가장하고 논적(論敵)에 접근, 지자(知者)로 자부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상대방 입장의 내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문답법으로 사용한 일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진의(眞意)와 반대되는 표현으로 표면으로 칭찬과 동의를 가장하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부정의 뜻을 신랄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등의 예가 있다. 이것은 지적인 날카로움을 갖는 점에서 기지(機知)에 통하고, 간접적인 비난의 뜻을 암시하는 점에서는 풍자와 통하며, 표리(表裏)의 차질에서 생기는 유머를 포함한다.

2) 상황적 아이러니 (situational irony) = 구조적 아이러니
  현재 진행 중인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결말이 드러나도록 장치된 사건이나 삶의 과정, 즉 미리 예상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경우를 가리킨다. 흔히 자신의 행위가 같은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는 인물들에 의해 나타나는 구조적 아이러니이다. 채만식의 <태평천하>,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운수좋은 날>의 반어는 바로 이야기의 발단과 결망의 상호 관계와 기대와 현실과의 상호 괴리 내지는 상충 관계를 형성하여 빚어 내고 있는 상황적 반어이자 구조적 반어이다. 또 한 예로, 오디세우스는 이다카로 돌아와 걸인으로 변장하여 자신의 궁전에 앉아서 그의 처의 구혼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비웃는 것을 듣는다. 그 상황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인 한편 그 상황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전연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분명히 스릴을 느끼는 것이었다. 
  <동백꽃>에서는 '나'의 관점에서 '점순이'의 행동을 서술함으로써 그녀의 애정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애정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점순이'의 마음을 '나'가 전혀 눈치채지 못함으로써 그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감자 사건이나 닭을 때려 죽인 뒤에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은 상황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개념의 유래, 형성과 변화
  아이러니란 현상은 이름지어지기 전에, 개념이 생겨날 수 있기 전에 존재하였다. 이 낱말은 아이러니의 현상에 적용되기 전에 존재했다. '아이러니'란 말은《詩學》(Poetics)의 몇 가지의 번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 상황의 급격한 역전)의로서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 말은 극적 아이러니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대신했을 것이다.  '에이로네이아(eironeia)'는 소크라테스의 지혜 때문에 좌우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그에 대해서 이 말을 적용시킨 것으로서 "사람들을 속이는, 매끄러운 비열한 방법", 즉 변장 기술을 뜻한다. '에이론'은 부적격하다는 것을 가장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려는 자를 나타낸다. '에이론'이란 회피적이고 얼버무리려하며, 敵意를 감추고 友誼를 가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거짓으로 나타내고 결코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 '에이로네이아'는 수사학적인 용어가 되어서 아이러니칼한 칭찬으로 비난하거나 아이러니칼한 비난으로 칭찬하는 것의 뜻이 되었다.  '이로니아'(ironia)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이 지니는 훌륭한 '점잖고 품위있는 假裝'으로서, 담화에 있어서 침투적인 습관으로서의 아이러니로 비난적인 뜻은 없었다. 퍼트넘(영국의 수사학자)은 '이로니아'를 '메마른 模擬(흉내내기)'로 번역하고 있으며 이것은 아이러니의 무표정한 특질을 나타낸다. 
  '아이러니'란 낱말이 영어에 나타나게 된 것은 1502년에 와서이며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8세기 초엽에 가서였다. 영어에는 아이러니의 胚芽라고 볼 수 있는 말의 구어적인 관용법이 풍부하게 있었다. 비웃음(fleer),조소(flout),우롱(gibe),모멸(taunt) 등등의 말이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놀림','희롱','빈정댐','야유','비웃음' 등의 말이 널리 쓰였고 이러한 말들은 '아이러니'란 말을 문학적인 말로 간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2백년 이상 동안 아이러니는 주로 표현법의 한 가지로 간주되었다. 영국에서는 다른 현대 구라파 제국에 있어서와 같이 아이러니의 개념이 아주 서서히 발전되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이러니화하다'라는 말은 장차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의 후기 개념 - 균형, 조화, 복합성, 이중성, 충돌
  아이러니란 말이 여러 가지의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18세기말과 19세기초 독일에서의 일이었다. '아이러니학자' 는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칼 졸거 등이었다. 
  A.W. 슐레겔은 아이러니의 개념을 진지함과 희극적인 것 또는 奇想과 平凡의 균형을 취한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란 "현세는 본질적으로 역설적인 것이며, 따라서 상반되는 감정을 지닌(ambivalent)태도만이 그 모순적인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과 우주의 다른 것들,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의 사이의 근본적인 부조화에 있어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世界 아이러니, 字宙 아이러니, 또는 철학적 아이러니 등의 명칭을 창출했다. 아이러니란 공상적이고 감정적인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일방적인 묘사를 나타냄으로써 평행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고 이러한 수단으로 대조적인 가면의 장면이 나타나는 고찌(Carlo Gozzi, 이탈리아의 극작가)의 동화극에서처럼 플롯에 대한 '대립적이고 보충적인 충동을 도입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칼 졸거는 진정한 아이러니란 "현세의 운명 일반을 靜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 주장했다. 슐레겔 형제와 그들을 따른 칼 졸거와 다른 자들은 '아이러니'란 용어를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객관성, '무관심', 자유스러운 태도를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소설가와 극작가는 그들 자신의 주관을 한 작중인물이나, 또는 독자도 공감을 느끼게 되어 있는 한 가지의 견해에다 구현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중인물의 제각기에 대해서 그들에 대한 작자 자신의 공감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풍부한 생명을 부여하지만, 또한 그만큼 모든 작중인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 극작품들은 작자자신의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괴테가 말하는 바 참다운 예술가의 특질이다.
  커노프 설월(Connop thirlwall,)는 말의 아이러니 또는 修辭的 아이러니 이외에 그는 '변증법적 아이러니'(Dialectical Irony, 소포클레스적 아이러니)을 따로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에 나타나는 주인공 타이몬은 도둑들에게 금을 주는데 이 표면상의 친절은 그들을 해치려고 벼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의 상반되는 결과는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설월은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스트가 전연 없는 아이러니를 생각했다. 이러한 운명적 아이러니 개념은 다 같이 아이러니의 희생자란 미리 운명지어져 있는 것에 대해서 전연 모르는 자라는 생각을 내포한다. 여기서 아이러니란, 경험에 있어서 그들 중 어느 한가지도 단순히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며, 불일치의 共存이 생존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생관을 말한다. 예컨대, 소송에서 피고나 원고 한 쪽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것이다. 즉 소송 자체가 아이러닉칼 한 것이다.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는 작가가 예술적 환상을 증가시키다가 나중에는 예술가인 그가 바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창조하고 조종한 사람이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그 환상을 다시 깨뜨리는 극적 또는 서술적 창작 기법을 지칭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쉴레겔과 기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독일 작가들에 의해 소개된 용어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현실과 이상,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有限我와 絶對我, 자연과 감성 등 이원론적 대립의식에서 발생한 것이다. 무한한 것,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본질적 감정이지만, 유한적 인간의 한계의식에서 낭만적 아이러니는 필연적으로 페이서스의 어조를 언제나 띠게 된다. 이상 세계와 절대아는 유한한 인간 존재를 비참하게 되비추는 거울일 뿐으로, 시인은 불가피하게 알라존이면서도 동시에 이 알라존을 비웃는 에이런이다.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된 인간의 존재성 때문에 아이러니는 미학적 가치이기 이전에 존재론적 가치를 띠고 있다.
  겸손한 아이러니는 적과의 근본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적을 필요로 하고 이 적에게 빚지고 있으면서 이 적의 밖에서 적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동시에 또한 자기 내부에 그 적을 지니고 있어 적과 동질적인 것이라는 감각에 의존한다. 인간은 자의식적 존재로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대상화하는 존재다. 작품 속의 두 개의 퍼소나는 동일한 시적 자아의 양면이기 때문에 겸손한 아이러니는 존재론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며 진정한 자아 발견을 위한 실마리인 것이다.  지적 관찰자가 비지적 관찰자의 탈을 쓰고 세계를 비판하는 아이러니를 '외적' 아이러니라 한다면, 낭만적 아이러니나 겸손한 아이러니는 화자가 바로 자신을 비판하는 '내적' 아이러니다. 외적 아이러니에서 어리석음이 외부세계에 있다면 내적 아이러니에서는 그 어리석음이 자신의 내부에 있다.
구조적 아이러니 또한 신비평에서 논의되는 아이러니로서, 한 작품에서 상충·대조되는 요소들의 종합과 조화의 상태를 말하며,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에 따른다면 갈등을 포함한 모든 문학에 아이러니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러니의 본질인 변장성이란 이중성이며 이중성은 복합성이다. 아이러니의 복합성은 인생의 폭넓은 인식으로서 그를 통해 사물과 현실의 리얼리티에 도달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이면에 숨겨진 것(의미된 것)과 표면에 오도된 것(표현된 것)의 이중의미를 찾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예술에서의 아이러니
  아이러니를 나타내는 예술이나 문학은 표면과 깊이, 모호함과 투명성의 양면을 공히 지녀야 하며, 우리들의 주의를 내용적인 면으로 돌리는 한편 형식의 면으로도 지탱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미'와 '존재'라는 요소가 서로 대립된다는 부대조항을 붙여서  아이러니를 나타내는 시는 "뜻함과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음악이나 視覺예(건축...)술, 비재현적 예술이 문학 만큼 아이러니를 나타내게 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예술들이 감각적이고 주의를 사로잡는 표면에 크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視覺예술의 경우 아이러니의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진다. 그림은 명백히 再現的일 수가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의 상황을 능히 묘사할 수 있다. 예컨대 훌륭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종교적으로 경건한 태도로 묘사되어 있는 그림은 숙녀의 양말대님을 잘못보고 그대로 두었다든가 잘 감추어져 있지 못하다는 듯이 놓여짐으로써 타르뛰프(몰리에르의 Le Trartuffe(1664)의 위선적 신앙가인 주인공)를 그린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視覺예술이 아이러니를 나타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러한 예술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아이러니의 범위는 더욱 더 넓다. 모든 예술과 같이 문학은 다른 작가나 다른 시대의 문체를 풍자적으로 모방할 수 있다. 문학이 사용하는 언어는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 것을 훨씬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와 그러리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의 상황과의 차이 등을 더 명확히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이란 몇 가지 이유에서 아이러닉한 처지에 놓여 있다.  잘 쓰기 위해서는 그는 동시에 창조적이면서 비판적이어야 하고,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어야 하며, 열광적이면서 현실적 이어야하고, 정서적이면서 이성적이어야 하며, 무의식적으로 영감을 받으면서도 의식적인 예술가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현실세계에 대한 것임을 내세우면서도 그것은 虛構인 것이다.  또한 예술가는 현실을 참답게 또는 완전히 묘사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면서도 현실이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모순에 차 있으며, 끊임없이 生成의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 진실된 묘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작품 제작이 끝나자 즉시 허위가 되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예술가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 자신의 작품에서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그의 아이러닉한 위치에 대한 의식을 작품 자체에 짜 넣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소설이라면 단순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저자와 서술, 독자와 읽는 것, 문체와 문체의 선택, 허구와 그 사실과의 거리등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할 무엇을 창조하도록 해야 하고, 그러한 결과 우리들이 그 작품은 예술이면서 동시에 인생이기도한 상반적인 것의 공존으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제요소

  1) ‘순진’ 또는 ‘자신에 찬 무지’의 요소
    체함 또는 가장(simulation)과 아닌 체함(dissimulation), 즉 아닌 것을 그런 척하는 것과 그런 것을 아닌 척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고전적 개념, 즉 아이러니의 근본 -'아닌 척하는 자'의 뜻의'에이른'에서 파생한 '모르는 척하는 것'의 뜻의 '에이로네이아(고의적인 속임)'에서 비롯된다.
  오이디프스가 그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이 바로 그 운명을 실현케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닉한 것이다. 그가 라이어스왕의 미지의 살해자를 저주하는 것도 단지 자기 스스로를 저주했다는 것을 알게 될 따름이라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한 소매치기 당하는 장면을 우리들은 아이러닉하다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속임이 다 아이러니인 것은 아니며, 아이러니 중에는 아마 '체함'이나 '아닌체함'을 내포하지 않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지 않은 체함은 그것이 '간파되게 되어 있다' 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지 않은 체함과 구별된다. 즉 아이러니란 아이러니의 희생자가 반드시 간파하도록 되어 있다. 가장이나 속임의 요소는 전연 없는 듯 보이는 어떤 일에도, 신이건 악마이건,  의인화된 운명이든 간에, 非人間的인 힘의 소치라고 믿는다면, 분명히 그와 같은 힘은 우리들을 꾀거나 명백한 모순을 우리들의 시야에서 감추려는 아이러니컬한(고의적인)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급히 외출하려고 하는데 구두끈이 끊어지면 우리들은 마치 악의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지로 있기나 하는 것처럼 '이럴 때는 꼭 이런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지' 하고 말하기 쉽다.(오델로)  아콘 슈발리에 (Haakon cheval‎ier)는 아이러니의 희생자가 고의적인 조소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혹을 전적으로 없애버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소위 '악마의 농간', '신들의 질투'라고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 기대를 품게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교묘하게 뒤집어 버리는 과정의 뒤에는, 틀림없이 계획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동시에 인간이 아닌 조소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 아이러닉하다고 생각하거나 느낄 수가 있는 것인가? 이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를 '의도적·의식적 아이러니'와 아이러니스트는 없지만, 항상 희생자와 관찰자가 공히 있는 아이러닉한 상황이나 사건의 아이러니, 즉 '무의도적· 무의식적 아이러니'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수영장에 물이 차 있다고 생각해서 마른 수영장 속에 뛰어들음으로써 아이러니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는다.  과오나 무지나 감지하지 못하는 것, 또는 무분별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바로 다이빙 선생이었다면, 또는 풀에 물이 없다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었다면 우리들은 그의 잘못을 아이러니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외양에 의한 속임에 덧붙여 온 것은 맹목적인 자신 또는 천연스러운 不知의 요소이다. 이 때의 不知는 외관은 단지 외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에 찬 不知이다.
아이러니의 희생자는 사정이 그가 순진하게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요소는 오만, 자만, 자기만족, 순진성, 또는 무지 등의 요소가 내포된 천연스럽고 자신에 찬 不知인 것이다. 희생자의 맹목성이 크면 클수록 아이러니는 현저한 것이 된다.  아이러닉한 관찰자가 실제의 상황은 물론 희생자의 不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 현실과 외관의 대조
  모든 아이러니의 기본 특색은 현실과 외관과의 사이의 대조이다. 아이러니스트는 한 가지를 말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 실제로는 아주 다른 것을 말한다. 아이러니의 희생자는 사물은 보이는 그대로라고 확신하는 반면 기실은 그것들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아이러니스트는 외관을 내보이면서 현실을 모르고 있는 체하는 한편 희생자는 외관에 속아서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들이 강아지나 고양이 새끼를 물에 빠져 죽게 하듯이 神들은 배를 가라앉혀서 즐기고, 우리들이 나는 새를 쏘듯이 그들은 한참 일을 하고 있거나 즐기고 있는 사람을 잡아서 졸중으로 쓰러뜨리고. 중이염으로 인간을 퉁퉁 붓게 하는 것은 개구리에 바람을 넣어서 부어오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훌륭한 놀이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러니가 逆說이나 딜레마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현실에 대한 참된 像과 거짓된 像의 대조에 있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쁘게 생기지 않은 여자를 미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추물인 여자를 미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덜 아이러니컬할 것이다. 아이러니는 외관과 현실의 상반 또는 부조화를 요구하는 것, 다른 조건들이 같은 상태에서는 대조가 크면 클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3) 희극적인 요소 - 외관과 현실의 대조에 대한 무지의 희극적인 효과
  아이러니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정서가 맞부딛친다.… 아이러니란 정서적이면서 知的이기도 하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거리감을 두고 냉정해야 한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잘못되는 사람이나 理想에 대해서 고통을 느껴야 한다.  웃음이 솟아 오르지만 입술에서 사라진다. 우리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나 사물은 잔인하게 놀림을 당한다. 우리들은 그 농을 이해는 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아이러니의 객관적인 정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조는 이러한 상반적인 감정을 자아내지 않을 때에는 전연 아이러니컬하지 않다는 결과가 된다.
  희극적인 요소는 아이러니의 형식상의 특성에 내재해 있다.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화는 진실한 또는 가장된, 자신에 넘치는 不知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알면서 스스로 모순된 말을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의도적인 모순의 외관은 웃음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심적 긴장을 자아내게 한다. 다른 한편 아이러니에 대해서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요소는 형식상의 특성이 아닌 우리들이 아이러니의 희생자에 대해서 느끼는 동정심에서만 우러난다. 
  여러 가지 아이러니 가운데에는 희극적인 요소가 적고 고통의 요소가 많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조건이 같다면 아이러니는, 만약 희극적인 효과와 더불어 고통의 효과를 공히 지니고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두드러진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희생자의 견해나 아이러니스트의 가장된 견해의 의의 같은 것을 느껴야 하지만 고통을 자아낼 정도의 동정심은 반드시 느낄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들이 스스로 죄지은 자가 아니라는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느끼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외관과 현실의 대조를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말의 아이러니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장된 의미는 그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4) 거리의 요소 - 관조
거리란 느끼는 바를 불쑥 꺼내려는 충동을 自制하는 것이다. 거리감(detachment),거리(distance),떨어짐(disengagement),자유(freedom),천연스러움(serenity),객관성(objectivity),무감정(dispassion), '가벼움'(lightness),'놀이'(play),온후함(urbanity).등의 말들은 아이러니스트의 가장된 태도에, 또 때로는 아이러니스트나 아이러닉한 관찰자의 참된 태도에 내재해 있다. 토마스 만은 인생이 우리들로 하여금 직면케하는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의 '하이터카이트'(Heiterkeit; 平靜함)의 필요성을 말했다. 아이러니의 가벼움은 인생의 무서운 진지성을 느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 압도당하는 것을 거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정신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이러닉한 관찰자의 개념에도 내재해 있다. 아이러닉한 관찰자는 아이러닉한 상황에 처해서 우월, 자유, 재미를 느낀다.  테는 아이러니는 인간을 "행복 또는 불행, 선 또는 악, 죽음 또는 삶을 초월" 하게 한다고 말한다.  아미엘은 '인간을 진지하게 만드는 감정과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아이러니'를 비교하고 있다. 토마스 만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수정과 같이 말고 평온한 시선',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술 그 자체의 시선인 것이다. 지상의 자유와 平靜 그리고 어떤 도덕주의로도 흐트러지지 않은 객관성의 시선이다.
  높은 곳에서 인간의 소행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아이러닉한 관찰자가 관찰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유로움, 평온, 또는 환희의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그가 아이러니의 희생자의 不知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희생자가 묶여 있거나 덫에 걸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해방되었다고 느끼는 경우에는 구속받고 있으며, 그가 냉정하고 평온하고 웃고 싶을 경우에조차도 감정에 흔들리고 괴로움 받거나 비참하다고 생각되며, 또 비판적이고 회의적이거나 판단을 보류하는데 만족해하는 경우에는 그는 신뢰하고 輕信하거나 순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태도가 현실적이고 의의 깊은 세계를 지닌 사람의 경우, 아이러닉한 관찰자는 그 희생자의 세계를 환상적이거나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들보다도 힘이나 지성에 있어서 열등해서 그 때문에 우리들이 주인공의 구속되고 좌절되고 또는 부조리한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을 갖게 한다면 그 주인공은 아이러니의 양상에 속하는 것이다.(노드롭 프라이)

  이러한 관점에서는 순수한 원형적인 아이러니스트는 神이다. 神은 전지전능하고 超絶的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자유롭기 때문에 특히 뛰어난 아이러니스트이다. 아이러니의 전형적인 희생자는 시간과 사물에 사로잡히고 잠겨져 있으며, 맹목적이고 우발적이며 제한되고 구속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이것이 그가 처해있는 窮境이라는 것을 전연 모르고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이다. 神은 또한 극작가나 소설가로도 생각되고 반대로 작가들은 神들로 생각되며, 그리고 이 경우 독립적인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일이다. 토마스 만은 神과 에술가와 아이러니스트에 대해서
"신의 태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태도이고, 神의 응시는 절대적인 예술의 응시이며, 그것은 동시에 절대적인 사랑이면서 또한 절대적인 허무주의이며 무관심이다"라고 했다.

5) 미적(美的) 요소
  언어의 아이러니에는 항상 美的 요소가 있다. 마치 모든 특유의 요소를 다 지닌 우스운 얘기가 서툴게 전달되면 우습지도 않은 것과 같이, 아이러니도 효과가 있는 것이 되려면 잘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 아이러니의 예술은 그것이 경미하게 나타나는 경우에는, 주로 배열, 타이밍, 어조에 의존하고 더욱 야심이 커질수록 이러한 배려를 포기하지 않는 機智가 풍부한 사람이나 얘기를 잘 하는 사람의 예술과 같은 것이다. 文體的으로 말하자면 그 첫째의 목적은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 수단을 통해서 최고의 효과를 자아내는 것" 즉 멋부림 이다. 인생 그 자체가 제시하는 아이러닉한 사건과 상황은 예술작품의 조화, 간결, 정밀을 나타내는데 효과가 있다. 도둑이 도둑을 맞은 아이러니는 만약 도둑질을 하는 것과 도둑질을 당하는 것이 앞서 말한 소매치기의 예에서와 같이 동시적인 것이라면, 또는 그 도둑이 훔친 돈이 사실은 자기 자신의 돈이었다면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된다.  그러나 소매치기가 그의 집이 밤에 도둑맞는다는 아이러니는 그다지 두드러진 것은 못된다.
  인생은 아이러닉한 사건과 상황을 자아내는가? 문학에서 상황의 아이러니는 가공적이라는 얘기다. 비록 실제의 인생에서 이끌어낸 예라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도 누군가가 그의 머리 속에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건을 생각해서 부적당한 것을 삭제하고 대조를 날카롭게 해서 부조화된 요소를 더욱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또는 희생자의 자신만만한 不知를 고양시켜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의 아이러니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너무나도 순진한 사람에게는 그 성격상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아이러니컬하게 발전된 사람, 즉 아이러니의 감각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키에르케고르) 아이러니의 감각은 아이러닉한 대조를 보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러한 대비를 마음속에서 생각해 내는 힘, 그리고 직면하게 될 때 아이러닉한 대조를 형성할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상기하거나 또는 주의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6) 극적 아이러니와 연극에서의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나 행위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이 작중인물들 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데서 생기는 아이러니(반어)와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관점에 반하여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극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즉, 등장 인물이 작중의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반대의 것을 기대할 때, 등장 인물의 무지와 관객의 인지 사이에 대립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보는 햄릿들은 우리들이 실제로 그 움직임을 보고 말하는 것을 듣는 현실적인 남자들로써 구현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배우로서의 신분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의 不知는 그 자체가 그가 말하는 '일반적인 극적 아이러니'라는 아이러닉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극장 그 자체가 현실세계에서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이 환상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하늘 높이에서 인생관'을 갖게 되는 일종의 아이러닉한 약속이다. 극장 특유의 즐거움은 우리들이 개입하지는 않지만  알아낼 수 있는 어떤 인생의 광경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우리들을 즐겁게 하거나 사로잡을 때 우리들이 우월감에서 '부풀거나 또는 자존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인 공감을 가지고 본다. 그것은 공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고 있다. 흥미를 지닌 관객의 태도 전체가 아이러닉한 것이다. 그와 같은 성격의 관객이 관객이라는 사실 바로 그 자체로써 그는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한 역할로서 또는 배우로서 극작가 또는 연출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로서 실현된다. 극적 아이러니는 관중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한 사람이나 또는 그 이상의 등장인물들이 같이 알고 있을 때 현저하게 나타나며, 특히 아이러니의 희생자가 무대상의 그러한 인물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에는 더 현저하게 드러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찰자라는 관객의 이중역할을 자아낸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만약 관객이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한 등장인물이 미래에 대해서 자신을 갖고 있을 때에는 상황은 아이러닉한 것이다. 
  희곡에 있어서 극작가, 연출가, 배우, 플롯, 관객 등에 대한 등장인물의 필연적인 '무지' 는 잠재적인 아이러니를 성립시키고 극작가로 하여금 그것을 구현하도록 항시 유도하는 결과가 된다. 전체적인 연극적인 상황의 본질은 일정한 '內面化'를 촉진시키며, 제 각기의 경우 그 효과는 등장인물을 아이러니의 희생자로, 관객을 아이러닉한 관찰자로 만든다.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지켜본다는 데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들이 처해 있거나 얼마 후에 처하게 될 궁지에 대해서 또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더욱 큰, 흔히는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일들이 그가 예기하는대로 될 것이라는 희생자의 자신만만한 예측과,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희생자를 되돌이킬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행동의 수레바퀴에 얽매여 있는 맹목적인 가련한 자라고 보는 관객의 견해와의 사이의 대조가 크면 클수록 아이러니는 더욱 강렬하게 된다.  연극적에서는 많은 것을 관객에게 알림으로써 극적 아이러니에 대한 이러한 잠재성을 이용한다.
  그런데 연극은 가장 현저한 효과를 거두기는 하지만 그 효과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다. 반면, 소설에서 소설가는 조작을 할 만한 공간을 더욱 크게 지님으로써 그의 작중인물의 내면 생활을 세세하게 전개할 수 있고 이것을 사건의 외면세계와 대조시킬 수 있다. 

▲ 말의 아이러니, 상황의 아이러니(후기 개념과 아이러니의 제요소를 고려)
  말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스트가 아이러니의 상태를 야기시키는 아이러니이며, 상황의 아이러니는 어떤 일의 상태나 사건이 아이러니컬하다고 보여지는 아이러니이다. 상황의 아이러니는 '자연상태 속에서는'아주 드물게 찾아볼 수 있다. 사물들을 아이러닉컬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이러니의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다듬지 않은 재료'를 머리 속에서 '구성해서'(희생자의 자신에 찬 不知를 희미하게 하거나 또는 감소시키거나 또는 현실과 외관의 대조를 약화시킬 만한 것을 배제함으로써), 인생의 너저분한 것에 대해서 美的인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생긴다.
  '말의 아이러니'(의식적, 행동적 아이러니) 는 아이러니스트가 다른 매체를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 절을 하거나 미소지을 수 있고 아이러니컬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또는 아이러니컬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의 아이러니' 의 목적은 어떠한 매체를 사용하던 간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아이러니는 '언어적'인 것이다. 
  상황의 아이러니는 외관의 배후에는 현실이 나타나게 되지만 어떠한 의미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나타난 현실은 한 가지의 사태로서 어떤 명제는 아닌 것이며, 따라서 단지 그것을 관찰하는 자에게만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우리들은 말의 아이러니를 아이러니스트의 관점에서 보지만 상황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닉한 관찰자의 관점에서 본다. 말의 아이러니는 풍자적이 되기 쉽고 상황의 아이러니는 더욱 순수하게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또는 '철학적' 으로 되기 쉽다. 

▲ 아이러니컬하게 되는 양상의 것들
1) 비꼼(Sarcasm)
  비꼼이 아이러니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만약 외관상의 의미와 현실적인 의미의 양쪽의 힘을 우리들이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의 기본적인 요건이라면 비꼼은 아이러니로서는 거의 존재하지 못한다. 비꼬는 자의 어조는 그의 참뜻을 너무나 솔직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음을 가장할 수는 거의 없다. 비꼼의 기교는 아이러니의 기교와 거의 관계가 없다.

2) 非個性的 아이러니
  대부분의 말의 아이러니는 이 종류에 속한다. 이러한 양상의 아이러니는 대개는 태도의 냉담함과 엄숙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 그 어조는 합리적이고 무심하고 사무적이며 겸손하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말하는 사람의 어조이다. 따라서 안틀어 말하는 것은 흔한 비개성적 아이러니의 형태이다. '비개성적' 아이러니스트는 스스로를 가면으로 은폐한다. 그의 말만으로 또는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그의 말과를 대조시킴으로써 아이러니의 효과를 자아낸다. 비개성적 아이러니스트는 청중이 자기가 얘기하는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나 문맥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어떤 아이러니는 애써 찾아내서 이해하도록 의도된 감추어진 아이러니도 있다. 이것은 물론 우리들이 어떻게 아이러니를 인지하는가 라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외관과 현실의 대조가 아이러니의 기본특징의 하나라면 대조를 지각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를 인지하는데 대한 필요요건이다.  말의 아이러니에서 그 대조는 원문과 문맥과의 대조가 될 것이다.'나는 죠지를 매우 좋아한다'라고 쓰여진 글은 여러 가지 사실의 내용으로써 모순될 경우에만 아이러니컬한 것이 될 수 있으며 그 사실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이러니컬한 것으로 인지될 수 있다. 

3) 자기 卑下의 아이러니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에서도 아이러니스트가 가면을 쓰기는 하지만  그것은 변장 또는 등장인물로서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하는 가면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볍게 믿으며, 진지한 인물로 분장해서 스스로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스트는 스스로를 그의 對話者보다도 덜 知的인 것으로 나타내고 그 對話者의 가장이 폭로되게끔 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다.

4) 순진의 아이러니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스트가 스스로를 바보로 나타내지 않고 그 대신에 아이러니스트와는 전연 다른 것으로 간주되도록 되어 있는 바보나 순진한 자를 제시하는 다른 양상으로 조금씩 변화해 간다. 순진의 아이러니에 있어서는 그 '虛構化'가 더욱 진전되어서 아이러니스트가 아니면서 이 사실을 모르고 아이러니스트의 대신 역을 하는 바보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양태의 유효성은 그것의 수단의 경제성에서 나타난다.  간단한 상식이나 심지어는 단순한 순진성 또는 무지조차도 위선의 복잡한 것을 밝혀내고 편견의 비합리성을 폭로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5)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스트가 완전히 물러서서 무의식적으로 그 스스로를 아이러니화하는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악덕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비난하려는 풍자가는 현명한 체하거나 덕이 있는 체하는 인물로 하여금 자기 모순적인 논쟁을 하게 함으로써 아주 유효하게 그것을 할 수 있다. 
《에리후온》( Erevwon, 사뮤엘 버틀러의 풍자소설,)에서 켈러는 위선적이고 잔인한 것을 좋아하며 이기주의적인 한 목사가 한 어린애를 박해하는 얘기를 하는데 이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가 쓰는 일기장에서 그러한 자신을 특질을 폭로한다.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는, 참다운 사태를 희생자가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천연스럽게 모르고 있는, 극적 아이러니와,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 만만하게 예기했던 것의 정반대를 나타내는 사건의 아이러니 이 두 가지와 다 관계가 있다. 

6) 순수한 부조화의 아이러니
  심히 부조화되고 또는 모순되는 두 가지의 현상이 아주 긴밀하게 대치되어 있거나, 두 가지의 모순된 진술이나 부조화한 이미지를 아무 설명 없이 대치시키는 아이러니다.
  예) 분첩, 분, 화장, 사마귀, 성경, 연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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