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 뜨기 / 조이섭
잎새뜨기는 바다나 강에서 선박 전복 등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 생존하기 위한 수영법이다. 물에 반듯이 누운 채 팔을 길게 머리 위로 뻗은 다음, 공기를 많이 들이마시고 힘을 최대한 빼면 호흡이 가능하다. 이렇게 잎새뜨기 자세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골든 타임을 기다릴 수 있다.
절체절명의 때에 이르면 동물도 잎새뜨기를 한다. 어린 바다사자가 해변에서 동무들과 노느라 한눈을 파는 바람에 범고래에게 붙잡혔다. 범고래는 잡은 바다사자를 곧바로 먹지 않고, 산채로 새끼들에게 던져준다. 새끼들은 바다사자를 물었다 뱉었다가 장난을 친다. 사냥놀이 겸 학습일 테다. 그러나 당하는 바다사자는 고통과 공포로 죽을 맛이다.
계속되는 범고래들의 공격에 바다사자는 모든 걸 포기하고 움직임을 멈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바닷물 위에 부유하는 바다사자를 보고 범고래 새끼들은 흥미를 잃고 멀어져 간다. 바다사자로서는 엄청난 행운이다. 아마도 범고래들이 식사를 마친 후였나 보다.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바다사자는 살그머니 눈을 떠서 주위를 살피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가 살던 해변을 향해 헤엄친다.
무사히 도착한 바다사자는 어깻숨을 거푸 쉬면서 자신이 도망쳐 온 바다 한 번 바라보고, 온몸에 난 상처 한 번 내려다보며 만감에 젖는다. 사지에서 벗어난 어린 바다사자는 오늘의 횡액을 전 생애를 걸쳐 가장 귀한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 이 소중한 경험에서 비롯한 삶의 의지로 성체로 자라나고 자손을 퍼뜨릴 것이다.
바다사자는 바다의 꼭대기, 물과 공기가 맞닿는 표면에서 동작을 멈추었다. 잎새뜨기를 하는 사람처럼 긴 호흡으로 자신의 폐에 한껏 공기를 들여 마셨을 테다. 그러고는 손과 발은 물론, 고개를 까닥 않고 호흡마저 멈추었다. 생과 사의 경계인 임사臨死에 이르러 영혼만 남겨두고 자기 육신을 바다에 내맡겼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잎새뜨기로 살아남을 확률을 셈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위급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애自己愛의 발로이며 생에 대한 애착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길 때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어 매진해야 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런가 하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덤벙거리거나 아우성치기보다 차분히 견뎌야 할 때가 있다. 살려고 바둥거릴수록 심연深淵에 빠져든다.
바다사자의 삶에 대한 사랑에 못 미치는 인간들의 사례가 적지 않아 안타깝다. ‘이번 생은 틀렸다.’라면서 쉽게 자포자기하는 행태다. 그것은 바다사자의 잎새뜨기와는 결이 전혀 다르다. 바다사자의 행동에는 희망이 있지만, 자포자기하는 사람의 앞길에는 절망뿐이다.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리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난 최소한의 의무마저 망각한 무책임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사주경계四周警戒에 실패하여 범고래에게 붙잡힌 바다사자와 같이 이 시대에 절망하는 젊은이들도 허물이 없지 않았으리. 그리하여 크고 작은 고통에 맞닥뜨렸을 때, 바다사자처럼 욕심을 버렸던가. 아니면, 그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라. 있다고, 해 봤다고, 해 봐도 안 되더라고, 항변하는 그대에게 한 번 더 묻는다. 바다사자의 잎새뜨기처럼 냉철하게 기회를 기다리다가 해변을 향해 죽기 살기로 헤엄쳐 본 적이 정말로 있었던지를.
울울창창한 숲에서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긴다. 나무는 혼자 쓰러지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나무가 넘어가며 주위에 멀쩡하게 서 있던 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린다. 심지어 작은 나무는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한다. 애먼 나무가 벼락 맞는 꼴이다. 그대가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하는 그 자리에 숲속의 나무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 그대의 나약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속수무책인 채로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모·형제·친구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생명을 마치 비치볼 다루듯 하는 범고래의 무자비한 장난에 직면해서도 정신을 차리고 살아내는 바다사자의 자기애를 배워야 한다.
그러는 나도 마냥 큰소리칠 형편은 아니다. 젊은 시절,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았는데도 미리 겁을 집어먹고 아우성치며 살았다. 하찮은 경쟁이나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평판에도 목숨이 걸린 듯 매달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서야 할 때 비실거리며 물러서고, 구부려야 할 때 성급하게 튀어 올랐다. 그러나 미리 포기하고 남의 그림자에 숨어들지는 않았다. ‘퇴근해 들어오는 아비보다 손에 들린 치킨에 먼저 눈길을 빼앗기는 새끼들’ 때문이라 변명하면서도 깨진 옹기 조각처럼 투박하게 살아냈다.
이제는 그 새끼들도 제 삶을 찾아 모두 떠났다. 평형이다, 자유형이다 해서 오기 부려가며 물 튀기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남은 생을 여적餘滴이라 하여 그냥 버릴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면 예술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육신은 물 위에 부유浮游할지라도, 정신은 바닥으로 침잠沈潛해야 한다.
잎새뜨기로 살아내다가 바다사자 아닌, 검은 옷 입은 사자를 만나면 긴 숨 한 번 들이쉬었다가 그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