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6펜스 / 변경운
오랜만에 남편과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했다. 연극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하고...18년 전에 데이트 하듯이.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왜 이제 와?”
아들과 딸이 한마디씩 했다.
‘쟤네들은 누구지?’
아주 잠깐 낯설었다.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시간여행이었나. 아니면 그만큼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었나.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똑같이 아이들 밥 먹여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하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에서 번쩍하는 느낌이 일며 가슴까지 내려왔다.
‘아~! 설렘이 없구나!’
그때부터인 것 같다. 삶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은. 일상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지고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지인들과 술을 마셔도, 로맨스 영화를 봐도 그냥 지나가는 일상에 불과했다. 이것은 삶에 대한 권태기인가 싶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일상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삶에 대한 권태기.
‘달과 6펜스’를 읽었다. 고갱의 인생에 대한 소설이다. 40살이 된 주인공은 회사도 가정도 다 버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리며 살아간다. 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미친 놈, 나쁜 놈. 그 소중한 가정을 버리다니.”라며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것이 부럽고 용감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말만 들어도 설렘이 느껴지는 단어 ‘자유’가 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해 보고 싶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고갱같은 예술적 기질도 용기도 없다. 이때부터 날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달을 찾는 꿈을.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차를 타고 가는데 아들이 내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취미가 없으세요?”
“어?”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설문조사지 같은 게 나오면 늘 있었던 취미, 특기란. 그곳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고민이었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그것을 못 찾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책 읽기!”
“독서 말고요. 책은 어머니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으시는 거 알아요. 아빠는 낚시에 테니스에 골프까지 맨날 취미 생활하시느라 바쁘시고, 저도 사진 찍으러 다니고, 가을이도 피포페인팅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만 취미 생활이 없으신 것 같아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독서논술지도사. 어느새 직업이 되어 읽고 싶은 책을 읽기보다는 수업을 해야 하는 책을 읽어내느라 고군분투하고, 책이 주는 감동을 갖기보다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일에 매달려 15년을 살아왔고, 일, 살림, 육아만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얼 찾아야 할까. 고갱처럼 6펜스도 없이 달만 보며 살 자신도, 그럴만한 달도 내게는 없었다. 2년 동안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2년간 사춘기 소녀마냥 헤매고 다녔다. 채워지지 않는 허함이 내 가슴에 온통 휘몰아치고 이것은 사춘기인지 갱년기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기복이 심해졌다. 6펜스가 희망 없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플루트를 배우게 되었다. 생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차가운 은색 플루트를 들고 있는 나는 웃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바쁘게 준비를 하고 플루트 연습장으로 차를 몰고 갈 때는 저절로 흥얼거림이 나왔다. 성탄절에는 병원 로비에서, 복지관에서 공연하며 설렘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성합창단에도 들어갔다. 보면대 앞에 앉아 어릴 때 합창단에서 불렀던 수선화를 다시 부르며 행복했다. 결혼식 때 말고는 평생 입어볼 일 없는 드레스도 입었다. 하늘거리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킬힐을 신고 공연장 무대 위에 섰다. 꽃다발을 들고 와 준 남편, 아들, 딸이 낯설지 않았다.
설렘을 주는 달, 없어서는 안 될 6펜스. 내 인생에 달도 6펜스도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 동안은 내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 나이 46살이 되어서야 내가 추구하는 삶은 ‘설렘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내 삶 구석구석에는 설렘이 가득했었다는 것이다. 학생들과 매번 다른 책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설렘이고, 냉장고 속 검은 비닐봉지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열어보는 것도 설렘이고, “아들! 딸!” 하고 부르는 것도 설렘이었다. 매일 하는 요리도 설렘이고. 오랜만에 만나서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며 회포를 푸는 지인들과의 술자리도 설렘이고, 아침에 헤어졌다 저녁에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는 남편도 설렘이었다.
내가 잠시 잃어버렸던 내 삶의 원동력, 설렘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