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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프로포즈 / 노영선

작성자글길_김지성|작성시간26.06.17|조회수4 목록 댓글 0

황당한 프로포즈 / 노영선

 

1979년 12월 30일 14시 30분. 우리는 서울 역촌동 어느 지하 다방에서 만났다. 그는 가죽 잠바를 입었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키는 훤칠했고 하얀 얼굴에 새까만 눈썹이 눈길을 끌었다. 쌍꺼풀진 눈은 선해 보였다. 우선 첫인상부터 맘에 들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그래, 바로 이 사람이야”하고 소리 지를 뻔했다.

나는 스물여덟 살에 사고로 오른손가락 셋을 잃었다. 이런 내가 배우자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시집보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선을 스무 번 남짓 보았다. 심지어 다리가 하나 없는 법조인을 만난 적이 있었고 아이가 딸린 상처한 남자와 선을 본 적도 있었다. 나는 여러 차례 만남을 거치며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그러다 나이는 서른으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좋은 사람이 생각났다며 자기가 알고 있는 총각을 만나보라고 하셨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와 한동네에 살면서 이모라 불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했다. 그의 성장 과정을 봐온 어머니로서는 착한 성품에 성실하고 자상한 그가 사윗감으로 괜찮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열 살 연상인 형님 한 분만 계셨고 춘천의 한 제조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선을 본다는 것도 못 할 일이었고 그만한 남자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이면 어떻고 부산이면 어떠랴, 주말부부도 각오하리라.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었다. 그는 주말이면 춘천과 서울을 오갔다. 세 번째 만남 이후였다. 무작정 은행으로 가 오백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다. 24개월 납입하는 조건에 매월 납입액이 167,500원이었다. 통장의 주인은 강00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도장도 만들었다. 당시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이어서 남의 이름으로 통장 만드는 일이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내 월급은 16만 원 남짓이었다.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무모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나는 기도했다. 부디 강00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2년 후 적금을 함께 찾게 해달라고.

1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 그를 배웅하기 위해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동행했다. 내 핸드백에는 통장과 도장이 들어있었다. 다방에 그와 마주 앉은 나는 감정을 다스리며 말문을 열었다.

“00씨 올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께 남편 될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00씨를 처음 만난 순간 제 반려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은 제가 어제 은행에 가서 강00님 이름으로 오백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이 적금 통장과 도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눈이 더 커졌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결혼해서 2년 후 이 적금을 찾기를 원합니다. 모든 결정권은 00씨에게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가 대답했다.

“아니 노 선생님 정말 무섭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저는 노 선생님께 결혼에 대한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 통장과 도장은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적금을 해지할 수는 없었다.

2월 중순 설날이 다가와 그는 남원에 사는 형님을 만나러 갔다. 나와의 결혼문제를 진지하게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후 그가 어머니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형님의 반대가 예상외로 커 도저히 결혼을 진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양가 집안의 차이도 커서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고. 물론 내가 장애를 지닌 것도 거절의 이유였다. 그에게는 형님이 부모와 같은 존재여서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편지 온 사실을 숨겼다.

그해 삼일절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여동생과 함께 춘천을 다녀오라 했다. 어쩌면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을까. 여하튼 어머니는 그를 사윗감으로 나는 남편감으로 점을 찍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설레는 마음으로 춘천 가는 버스를 탔다. 어머니로부터 우리가 춘천으로 떠났다고 소식을 들었는지 그가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춘천 호반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 선생님 이제 서울로 돌아가시지요. 터미널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일이 꼬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터미널까지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서로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 선생님도 앞으로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말을 듣고 내 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집을 나서기 전에 왠지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 가져간 성경책이 있었다. 그에게 성경책을 주면서 말했다.

“저는 00씨가 저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을 만나보세요. 이 책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함께 찾고 싶었던 적금 통장이 어른거렸다. 동생은 내 오른손가락 두 개를 붙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틀이 지난 토요일 아침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사위 삼으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주말에 서울에 다녀가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결별을 선언했던 그가 서울에 오겠단다. 믿어지지 않았다. 늦은 시각에 그가 우리 모녀 앞에 나타났다. 집 근처 식당에 마주 앉았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이모님, 그저께 노 선생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노 선생님이 주고 간 성경책을 머리에 베고 누워서 생각해보니 이모님과 노 선생이 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마음이 내내 억눌렀어요. 이 결혼을 방해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 인생의 1라운드는 순조롭지 못했으나 2라운드만큼은 노 선생과 한번 잘살아보고 싶습니다.“

내 곁에 앉은 어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 오른손가락 두 개를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5월에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는 한 사람 월급만으로 살기로 작정했다. 첫 목표가 5년 안에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었으니 그 신혼살림이 얼마나 빠듯했는지 모른다. 2년 후 적금이 만기 되어 은행으로 가는 길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어두컴컴한 마장동 어느 다방에서의 황당한 나의 프러포즈에 놀라던 그의 모습 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마련한 오백만 원은 우리 부부의 종잣돈이 되었고 목표했던 내 집 마련의 꿈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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