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쓸개 없는 여자의 '병캉스' / 전성옥
나무의 팔이… 잘려나갔다. 드디어 잘려나갔다. 병든 가지, 그 가지가 온몸을 못 쓰게 하기 전에 잘려나간 것이다. 다행이다.
집 뒤편 온천천 둔치, 나이 든 벚나무 하나가 두 해째 병을 앓는 중이다. 처음, 맨 아래쪽의 커다란 가지 끝에 작은 버섯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오래된 나무에 흔히 자라는 구름버섯이겠거니 했다. 눈 밝은 누군가 따가겠구나 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본 그 버섯은 달랐다. 딱딱하고 건조한 구름버섯과는 달리 무르고 축축했다. 희끄무레하고 누르스름한 색이 섞인 버섯,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이 버섯들은 나무의 진액을 빨아대며 화락화락 번져나갔고, 해면처럼 푸석해진 나무의 팔은 퀴퀴한 냄새를 내며 검게 썩어들어갔다.
한 해가 지나자 버섯들은 나뭇가지의 팔꿈치를 넘어갔고 머잖아 겨드랑이까지 올라갈 기세였다. 산책길에 그 나무를 볼 때마다 내 팔이 가려웠다. 조바심이 났다. 잘라주어야 할 텐데, 저 버섯이 나무를 온통 삼키기 전에 가지를 잘라내어 나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텐데, 관리자가 어서 빨리 발견해야 할 텐데….
***
지난해 늦여름, 담주머니를 잘라냈다. 오십 년 이상 나의 일부였던 그 ‘몸 조각’을 떠나보냈다. 참 오래도 앓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복통, 한번 시작되면 열 시간가량이나 사람을 괴롭히는 그 극심한 복통을 동네 의사 말만 믿고 단순 위경련이겠거니 하고 참았던 게 무려 이십여 년이었으니 말이다.
수술을 맡은 내 담당의, 나보다 살짝 젊은 그녀는 처음 나를 보고는 혀를 찼다. 작은 담주머니 안에 공깃돌만 한 돌이 네 개 반이나 들어앉아 있단다. 그 탓으로 내 담주머니는 늘어지고 담도는 녹아내리는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간까지 상할 지경이란다. 산통보다 더 하다는 그 통증을 어찌 그리 오래 견뎠냐는 의사, 단순 복통인 줄 알았다고 답하는 환자. 묻는 이는 답답하기 짝이 없고, 답하는 이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의사는 나를 앉혀놓고 어쩌고저쩌고 걱정을 하고, 이렇다저렇다 겁을 주고 또 이러저러할 수도 있으니 원망 마라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를 수술실로 데리고 갔다. 두 시간쯤 뒤, 다행스럽게도 나는 무사히 ‘쓸개 없는 여자’가 될 수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나 병실에 혼자 누웠다.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이거, 너무 괜찮은 것 아니야?’ 2인실인데 저쪽 침대는 환자가 없으니 1인실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방안에 가만있기만 하면 때맞추어 삼시 세끼 밥을 준다. 이불과 옷은 원하는 대로 바꾸어 덮고 또 갈아입을 수 있다. 간호사와 의사가 수시로 들어와서는 괜찮냐 물어도 준다. 무엇보다 완벽타당한 이유로 집안일과 회사 일에서 벗어났다. 심각한 병이 아닌 이유로 병원에 누워있는 이건 호캉스, 아니 ‘병캉스’다. 주위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다. 진짜로.
좀 더 누릴 수 없을까. 수술 전, 세 밤을 자면 집에 갈 수 있다 의사가 말을 했지만, 혹 더 있을 수는 없을까 물어보려는데… 이게 사인이 잘 안 맞는 느낌이다. 오히려 보호자 없는 환자가 딱한 모양인지 삼 일이면 퇴원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세상에, 남의 심정도 모르고. 그래도 수술인데 한 일주일 누웠다 가라 그렇게 말해주지.
***
온도조절이 잘 된 병실, 등에 닿는 매트리스의 뽀송하고 찹찹한 촉감. 누구의 시선도 없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 조용하고 편안하다. 똑똑똑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 무심히 듣고 있다. 머릿속으로 떨어지는 모스 부호 같은… 신호음. 똑, 똑, 똑 작은 발이 걸어가는… 소리.
그렇구나, 이제 무엇 하나는 이 편안한 눕자리에 함께 눕지 못하는구나. 장기 하나가, 나의 작은 무엇 하나가 나를 떠났네. 저렇게 작은 발소리를 내며 나에게서 멀어지네. 그래 이십 년쯤 전에도 하나가 갔었지. 그때는 왼쪽 난주머니를 떠나보냈었지. 온천천 둔치에서 버섯앓이를 하는 벚나무처럼 자꾸만 멍울이 맺히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잘라서 보냈었지. 거기서 세월을 또다시 이십 년쯤 되짚어간 그즈음에는 여섯 개인가 일곱 개의 유치들을… 새에게 보냈었지. 모래를 두드리며 예쁜 새 이를 달라고 부탁도 했었구나.
나보다 먼저 이승의 강을 건너간 그들, 한동안 ‘나’였던 ‘나의 조각’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강 저 너머 둔치 어디쯤, 새끼손톱 반만 한 내 유치들이 올망졸망 모여앉아 옅은 주황색 햇살 아래 까륵까륵 웃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십여 년의 시간을 두고 난주머니가 가고, 또 이번에는 담주머니가 갔으니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밀린 인사를 하느라 한참 부산하겠다. 어느 시간 동안 같은 몸에서 보냈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인사는 익숙하고도 서먹할 수 있겠다. 긴 세월의 안부를 한참 묻고, 아직 여기에 있는 나의 안부도 진지하게 묻고 또 상세하게 답을 하며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먼저 보낸다. 유치를 보내고, 머리칼을 보내고, 손발톱을 보내고, 장기를 보내고, 사용한 세포까지 하나 남김없이 보낸다. 먼저 출발한 그들, 사전답사하듯 일찍 간 그들은 뒤에 올 부분 부분들 그리고 마침내 올 본진을 위해 그 낯섦을 털어내고 익숙한 것들로 채워놓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다른 무엇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무엇은 꽃으로 가고 무엇은 나무 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 새에게 보낸 유치들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도 있겠고.
‘병캉스’, 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장소가 병원인지라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생각들을 하게 한다. 너무 누워있었구나, 링거대를 붙들고 운동 삼아, 구경삼아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병동 전체가 조용을 넘어 적막하다. 간 췌 외과 병동이라 중환자가 많고 이승 끝에 겨우 걸터앉은 이들도 더러 있는 까닭이다. 어느 병실의 살짝 열린 문 안에서 이곳이 아닌 아주 낯선 곳의 공기가 느껴진다. 조금 열린 저 문을 닫아주는 게 좋을까, 더 열어주는 것이 나은 것일까.
짧은 병캉스, 이 아쉬운 휴가가 끝나면 온천천 둔치 벚나무에게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팔 하나를 잘라낸 너는 이제 아프지 않냐고, 나도 담주머니를 잘라내었지만 견딜만하다고. 한자리에 계속 있는 너는 조그만 나를 본 적 있냐고, 혹시 너에게로 가지는 않았냐고. 내년에는, 버찌가 익으면 오랜만에 먹어보겠다고, 입이 까맣게 되겠지만 나도 버찌를 먹어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