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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욥기 32:1-2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성자박성룡|작성시간23.05.21|조회수41 목록 댓글 0

욥기 32:1-2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찬송: 1, 25, 70장     교독문: 히 11:1-3, 33-40

 

  욥기는 어렵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욥이 갑자기 인생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당한다.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자녀들은 모두 죽고,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라며 떠나고, 그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져서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다. 하지만 죽고 싶다고 호소해도 죽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이런 현실을 겪을 것이며, 이런 고난에서 과연 욥처럼 인내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많은 성도가 욥기를 읽는다. 왜냐하면 욥기를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어려움에 대한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고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혼란스럽다.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는 지루하며,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도 없어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읽는가에 강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욥기 4-31장에 기록된 욥과 세 친구 사이의 대화를 보면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운 바, 인생이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은 응보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응보의 원리는 나의 고난의 원인을 나의 죄로 돌리며, 그 죄 문제를 회개하고 해결할 때 나의 고난이 해결되어 다시금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욥기는 이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우리의 고난에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말도 되지 않는 논리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못할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욥기는 이것을 말하고 있으며, 성도는 욥기와 함께 전도서를 읽을 때, 인생이 어찌 하늘의 일을 알 수 있느냐는 하나님의 선언(전 5:2)을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원인을 찾기보다는 지금 내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 고난을 견디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요, 결국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고난의 원인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엘리후가 끼어 든다. 엘리후는 세 친구 가운데 이름을 올리지 않은 친구였다. 그리고 욥기 42장에서 하나님께서 세 친구들을 책망하실 때 엘리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 32-37장에서 그의 논지를 편 후에 그대로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굳이 엘리후의 말이 여기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엘리후가 말한 부분을 앞부분과 연결하여 해석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먼저 32-37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엘리후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엘리후의 말에 우리가 생각하는 대답이 있을까? 욥과 세 친구가 갖고 있는 응보의 원리 외에 엘리후가 다른 고난의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먼저 엘리후는 32:1-33:7까지 자신이 왜 이 대화에 끼어들었는가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한다. 여기에서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들 모두에게 공격적인 말투로 대화를 이어한다. 32:2-3을 보면 욥에게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그리고 세 친구에게는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엘리후가 가만히 듣고 있었던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 대해 간단하게 평가한 것으로, 이어서 32:9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욥 32: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어찌보면 교만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어 나오는 말들을 살펴보면 그는 굉장히 교만하고 과장된 어투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2:21-22을 보라.

  욥 32:21-22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하나님을 들먹거리며 그가 앞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과연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욥 33:14-30을 보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설명한다. 이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정당할 때 공의를 회복시키시며(33:26), 생명의 빛을 회복시키신다(33:30)는 것이다. 여기에 엘리후가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엘리후도 여전히 응보의 원리에 갇혀서 욥과 세 친구들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그가 한 가지 더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34:10-30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일견 옳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4:10-12을 보면 그가 무엇을 근거로 말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응보의 원리이다.

  욥 34:10-12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말하면서 “전능자는…사람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는 말을 함으로써, 인간의 고난은 결국 그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에 있어서는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의 생각과 동일하다. 그리고 34:36에서 욥에게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응보의 원리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더욱이 36:22-37:24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런 말도 한다.

  욥 36:11-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완벽한 응보의 논리를 말하는 것을 보라. 순종하면 형통이요, 순종하지 아니하면 망한다는 것은 정확히 응보의 논리가 아닌가! 그리고 이어서 엘리후는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에 대해 말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욥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엘리후도 역시 응보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다. 욥을 평가할 때도 그렇고, 욥의 세 친구들을 평가할 때도 그렇다. 처음에는 참으로 호기롭게 나섰지만, 결국 다른 친구들과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그들을 징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의 응보의 논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기 때문에(36:22-37:24)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다. 엘리후에게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엘리후는 분명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침범할 수 없는 정의와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응보의 원리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논리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불경하다. 욥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그 벌이 바로 그가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 엘리후의 주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앞의 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것으로, 새로운 통찰력이 아니다. 오히려 엘리후는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엘리후의 말은 결코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욥기는 어렵다. 욥의 독백이나, 세 친구들과의 대화의 내용,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엘리후의 연설문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하이다. 여기에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답답하다. 언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이에 대해 대답이나 하실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한다. 하나님께 묻는 것도 포기하고, 불평하는 것도 포기하고, 그저 절망에 나를 맡기며 고난이 끝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고통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견딜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답답하다. 그래서 괴롭다. 우리의 고난에 욥기는 절대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지 못한다. 욥기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욥은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분명히 욥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땅에서는 그 이유를 모른다. 모른채 세 친구들과 엘리후는 욥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욥은 그렇지 않다.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회개할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한다. 과거의 영화를 회복시켜주시지 않아도 좋으니 나의 정당함을 증명해달라고, 그래서 양단간에 말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 내용이 욥기 37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고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욥기는 분명히 우리 성도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하늘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땅에서 각자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소리를 높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논쟁에 참여한 인간들이 욥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본다. 그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경건한 자가 왜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욥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까지 이어지는 대화를 읽고 배우면서 깨닫는 사실 한 가지는 이것이다. 모든 인생은 사람이 잘못했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잘못했든지, 둘 중의 하나에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시기 때문에 잘못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세 친구들과 엘리후는 자꾸 욥이 잘못했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욥기 1-2장을 알고 있다. 여기 어디에 욥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말이 있는가! 없다. 하나님은 욥을 굉장히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칭찬을 받는 인생이 성경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물론 욥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욥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친 비판으로, 분명 입밖에 내면 안 되는 불평을 하나님에게 했다는 데 있다. 왜 정당하게 살아온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가지고 나온 논리이다. 하나님도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나중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욥 4-37장에 나온 욥과 그의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의 대화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그들이 갇혀 있는 논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분명한 것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을 훈련시키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욥이 받는 고난의 원인은 그의 온전함에 있다. 그래서 욥은 생각한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성도들도 생각한다.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단 말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욥을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데, 정작 욥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욥기는 인간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하늘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고난의 원인을 찾아간다 할지라도 세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력을 따라 모든 일에 분명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하고, 간청하기도 하면서 잘못 행동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인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논리를 삶에 대입하여 그 원인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좌절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하나님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고 홀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어느 때는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이것이 현재 인생이 처한 현실이다.

  그래서 인생은 그들의 고난에 대해 절대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능력도, 해석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대한 원인을 말씀하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이해력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다. 말해준다 할지라도 결국 이 불평을 해결해 달라고만 하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주어야 아무 소용이 없지 아니한가!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시면, 그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구원자 되심, 메시아 되심을 깨달아야 하지만, 인간의 무능함으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여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기만을 요청할 뿐인 것과 같다. 복음서 전체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무능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에 대한 이해 능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원인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고난의 원인은 무조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치시기 위해 징계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른다. 모른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욥기를 통해 이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를 감싸고 있어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온 힘을 쏟는 대신 가만히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최선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욥 4-37장까지 욥과 네 친구들이 대화하는 것을 아무리 자세히 읽어도 그들은 해답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욥기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욥 38-4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욥은 회개하고 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그들을 회복시키신다.

  결국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일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실망하지 말라. 욥기를 통해 조용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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