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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고갱

작성자이보|작성시간09.01.16|조회수148 목록 댓글 0



    아를의 여인 '마담 지누'- 고흐 아를의 여인' 밤의 카페에서 술마시는 여자' - 고갱 고흐·고갱…두 거장 고민이 담긴 ‘아를의 여인’ (2002.02.03) 고갱의 작품 ‘밤의 카페’에는 왼손을 턱에 괸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고흐의 유화 ‘아를의 여인’ 속 여인도 왼손을 턱에 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어스타일, 옷차림, 길쭉한 콧날까지 모두 똑같다.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고갱이 불러온 마담 지누라는 매춘부를 모델 삼아 같은 시각, 같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기 때문. 1888년 11월초, 프랑스 남부 아를시에서 고흐가 세들어 살던 ‘노란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갱은 모델의 오른쪽 얼굴이 잘보이는 문앞에 앉았고, 고흐는 반대로 모델의 왼편 얼굴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렸던 것. 고갱과 고흐―.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1888년 10월말부터 12월까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의 우정과 정열, 그리고 반목과 갈등을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반 고흐와 고갱’전이 2~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해말~올해 초 미국 시카고에서 69만명이 관람한 전시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온 것.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 최근호는 ‘두 거장을 위한 한 장의 캔버스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전시의 출품작을 지상 비교 전시, 두 거장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8년 2월 먼저 아를에 정착, 남불의 눈부신 햇살에 반한 고흐가 고갱을 불러 가로 6m, 세로 4.5m짜리 작은 아틀리에를 공동사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인상주의 거장 모네의 작품이 1000프랑, 타히티를 다녀와 명성을 얻은 고갱 그림이 250~300프랑 정도에 팔리고 고흐의 작품은 찾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했지만 마흔살 고갱과 다섯살 아래 고흐의 동업은 화기애애하게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안락의자를 준비했고, 고갱은 주방용기를 사왔다. 두 작가는 볕이 좋을 때는 시냇가로 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풍경을 그리기도 했고 궂은 날엔 아틀리에에서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사온 20m짜리 싸구려 캔버스천 한 장을 잘라 나눠 쓰기도 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두 작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흉내내기도 했다. 그 결과 고갱의 ‘가난한 여인들’과 고흐의 ‘붉은 포도나무’ 속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허리를 숙인 자세도 똑같고, ‘아를의 여인들’이란 작품 속 두 여인의 표정과 차림새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손모양까지 흡사하다. 물론 고흐는 다소 밝게, 고갱은 어둡게 배경을 처리하는 등 화풍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거장은 함께 지내기는 너무 개성이 강했고, 달랐다. 고흐는 말이 많았고, 고갱은 과묵했다. 고흐의 그림 속도는 고갱의 2배였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인식차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였다. 고갱은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말고, 생각과 상상도 함께 그려야 한다”고 했지만, 고흐는 반대했다. 아틀리에 안에서 똑같은 모델을 놓고 그려도 고갱은 배경을 카페 풍경으로 바꿔놓지만, 고흐는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식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 이어졌고, 고갱이 12월에 파리로 떠나버림으로써 두 거장의 동거는 2개월만에 끝났다. 파리마치는 “그들이 함께 지낸 기간은 두 달에 불과했지만 미술사를 바꿔놓았다”고 적었다.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작품과 함께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도 함께 전시돼 미술사의 전설이 된 두 사람의 면모를 보여준다. ( 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

    Vincent - Don Mclean

 

고흐와 고갱, 두 거장의 우정과 갈등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9
캔버스에 유채, 57.5 x 74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Vincent Van Gogh, La Chambre de Van Gogh ? Arles, H/T, 57.5 x 74cm
ⓒ Photo RMN-Herv? Lewandowski / GNC media, Seoul, 2007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화가의 자화상>, 1890-91
캔버스에 유채, 38 x 46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Paul Gauguin, Portrait de l’artiste au Christ jaune, H/T, 38 x 46 cm
ⓒ Photo RMN-Ren?-Gabriel Oj?da / GNC media, Seoul, 2007 
 

 

    고갱Gauguin과 반 고흐Van Gogh가 아를에서 두 달간 함께 살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가 꿈꾸는 화가 공동체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고흐는 시골에서 정직하고 소박하게 일하는 화가 공동체를 꿈 꾼 반면에, 
    고갱은 도회적이고 미술시장과 연결된 금전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 
    화가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을 광적으로 기다리며, 
    고갱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자신의 노란 집에 매료되기를, 아를의 풍경을 사랑해주기를 바랬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고갱이 고흐와 함께 살기 위해 아를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되었습니다. 
    테오Tho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고흐를 찾아온 고갱은 
    고흐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타락한 인물로 묘사했고, 
    고흐는 이런 고갱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고갱이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애써 이해하고자 했고 
    <화가공동체> 실현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갱은 계속해서 고흐를 모욕하였고, 
    심지어 그림 속의 인물이 모델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항의라도 하듯, 
    고흐는 자화상과 자신이 닮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귀를 잘랐습니다. 
    나중에 레이Ray박사가 고흐가 귀를 자를 만큼 격렬하게 흥분한 이유를 묻자, 
    고갱은 ‘그림에 대한 의견 차이 문제’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은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갱의 그림이 잘 팔리는 것 역시 고흐를 괴롭히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고갱은 고흐와 갈등을 겪었지만,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의 배경을 가득 채운 노란 색은 고흐의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전 설명 중에서 Gogh -Cafe Terrace at Night,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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