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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의 족보이야기](47) 광산 탁씨(光山 卓氏)

작성자이보|작성시간10.06.21|조회수1,112 목록 댓글 0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봉구황(鳳求凰)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7)광산탁씨(光山卓氏)
2010년 06월 16일 (수) 15:18:27 김진우 sewoora@naver.com

 

 

   
뿌리공원에 조성된 광산탁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 작품명

    빛과 화합(和合)

  • 조각가

    탁 연 하 (한국조각가협회 회원,31세)

  • 작품설명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한 빛은 우리 인류(人類)의 삶의 시작이며 생명(生命)이요, 구원(救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영원불멸(永遠不滅)의 공명(빛)이야말로온세상의 최고의 자산(資産)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본 조형물은 활활타오르는 두개의 핵(核·빛=횃불)이 하나로 매듭지어져 우리 문중의 화합(和合),발전(發展)은 물론,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화합과 무궁한 번영(繁榮)을 염원(念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광산탁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광산탁씨 유래>

고려선종조(1084∼1094)대에 높은 덕망과 학식으로 한림학사와 태사(太師;정1품 최고벼슬)의 벼슬에 오르신 광산군지엽(之葉公, 호 學圃, 시호 文成)을 시조로 모신 광산탁씨는 명문세족으로 대를 이어 번영하였으며 충혜왕조대에 예의 판서와 간의 대부를 지내신 8세 광무(光茂, 호 景濂, 시호 文正:1330∼1410)조와 조선조 세종조대에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 품계) 의정부 좌참찬겸 찬성사(정2품벼슬)로 계실 때 세종대왕에게 조정에서 시금한 일로 「성을 튼튼하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함이 최우선」이라고 간한 9세 신(愼, 호 竹亭, 시호文貞:1367∼1426) 조대에 이르러 가문의 광휘는 절정에 달했으며 두 어른께서는 학문적으로 높이 추앙받아 안동군 길안면 세덕사에 제향되셨다.


병란평정에 공이 크셨던 15세 순창(順昌, 호 松菴:1495∼1594)조께서는 가선대부(종2품 품계)로  훈련대장으로 추서되셨고 17세 상(祥: 1544∼1597)조께서는 임진왜란(선조25년:1592)에 창의군으로 참전, 권율장군을 도와 왜적과 분적했으며 정유재란시 크게 전승을 거두고 전사하신 충절로 1633년 조봉대부(朝奉大夫:조선때 관계로 1485년에는 종4품 하(下)의 문관이었으나 1865년(고종2)부터는 종친의 광성대부도 조봉대부로고침), 호조좌랑(정6품벼슬)으로 증직되셨으며 그의 아들 율(1563∼1597)조께서는 전사하신 부친의 시신을 수습코자 진중에서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니 효자로 명정되셨다.

또한 19세 연(鍊)조께서도 이순신장군을 보좌해 아우 석(錫)-원(鋺)조와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과 수차례 싸워 공을 세우고 당항포 해전에서 순절하셨다. 「만고에 이 탁씨요, 만고에 이 광산이라.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세를 빛내고 후세를 여는 도가 이보다 더함이 그 어느 가문에 있겠는가?」이는 광산탁씨 가문에 대한 한 학자의 평이지만 우리 광산 탁씨 모두의 긍지이기도 하다.

서기1997년9월
광 산 탁 씨 대 종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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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탁씨현대인물>

 

탁금환(광산탁씨대종회장).탁인석(광주시교육위원.2010년교육감예비후보).탁경명(언론인.중앙일보기자출신으로 1980년4월 사북사태의 전모를 밝힌"80년4월의사북"(2007년)펴냄).탁창송(쌀눈쌀정미기개발).탁희송(산림청헬기검사관).탁혜령(대구지하철홍일점기관사).탁숙자(젊은진주사장).탁석산(대한민국50대의힘펴냄).탁경명.탁금선(1974년8월15일 문세광에게저격당한육영수여사부축하여병원에옮김).탁기형(한겨레신문선임기자).탁명환(종교문제연구소장(전).연구소는 1970년 신흥종교연구가인 탁명환(卓明煥)이 설립하였으며 국내외 신흥종교와 이단사이비 종교를 연구하는 민간단체이다. 1994년 괴한에의해 탁명환소장살해).탁지원(탁명환차남.종교문제연구소소장).탁유찬(종친회관리자).탁대학(문경시의회의원,1991년이래 내리6선기록).

 탁시근(초대광산탁씨종친회장,도루코회장),탁나현(전대사), 탁영진(국회 전문위원),탁인상(변호사),탁희준(경제학박사 전 성균관대 교수),탁재용(전 대종회장.흥안실업회장),탁유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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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탁씨 역사인물>

 

광산탁씨를 빛낸 인물은 8세손인 탁광무이다. 그는 성리학이 정착하게 되는 고려때의 인물로 당대 제일로 꼽히는 목은 이색,익재 이재현,삼봉 정도전, 이숭인, 정몽주 등 거유(巨儒)들과 교유했다.

 

9세손 탁신은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했다. 조선초 태조 4년에 출사하여 태종, 세종조 때까지 주요직을 역임했다.

 

사림의 종조인 김종직과 우암 송시열도 그 학문을 높이 인정한 거유로 시호를 문정이라고 했다. 안동의 세덕사에서 그를 배향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인구수에 비해 화려한 문중이다.

 

의병으로 창의하여 명장 칭호를 들은 탁연도 있다. 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아우 탁 석, 탁 원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장군이 있는 한산영 산하 당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경남 통영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돼 있다.

그 외에 박천파의 상계 인물인 탁 평, 이조좌랑을 지낸 익산파의 탁세공 등이 인물이다.

 

이밖에 고려때 광산탁씨의 주요인물을 보면

 

 탁도민(대제학,좌정승), 탁원광(선종부마(사위),참지정사),탁사정(판도판서:판도사의 정3품 장관), 탁종성(대제학:종2품 벼슬로 문형), 탁영(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재신).

 

<조선조인물>

 

탁신(참찬(정2품), 문정공), 탁성(한성부윤:종2품), 탁연(의병장), 탁재윤(추밀원의관), 탁천성(한성부윤), 탁문위(대제학), 탁온(도승지;정3품 왕의 비서실장), 탁순도(황주목사;정3품), 탁연(참찬:정2품), 탁자견(동지중추부사: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탁세형(사간;정3품), 탁용(공조참의;정3품), 탁미립(훈련원 판관:종5품), 탁중보(공조참판:종2품), 탁한성(승정원 도승지:정3품당상관), 탁세복(훈련원 승지), 탁원립(근위장군), 탁만수(형조참판:종2품 차관), 탁창한(공조참판), 탁상옥(형조참판), 탁하귀(공조참의;정3품 차관보), 탁성택(동지중추부사), 탁지엽(근위장군), 탁순택(한성판윤:정2품 서울특별시장).탁중(이조참판),탁관,탁석행,탁운한(병조참판),탁종술,탁경수,탁장호 등

                                                    

                                               

 

                                                        광산탁씨(光山卓氏)


탁씨(卓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남양(南陽),안산(安山),양근(陽根),가평,용인탁씨 등 32본까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이며 현존하는 관향은 광산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지난 2000년 조사에서는 광산탁씨(15,691명)등 총 19,395명으로 조사되었다.

 탁씨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전국책(戰國策)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탁활(卓滑)이며, 그의 후손 태부(太傅:정1품 벼슬로 명예직)를 지낸 탁무(卓茂)는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기원전 6~57년)에 의해 포덕후(褒德候)로 봉해진 사람이다. 그의 후손 탁왕손(卓王孫)에게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은 전한시대의 유향이 기원전(475~222) 전국시대의 제후국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아 집록한 자료이다.


 당시 촉군성도(蜀郡成都) 태생의 사마상여(司馬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국시대에 뛰어난 정치가였던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하여 후에 이름을 상여로 고쳤다고 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기원전 179~기원전 117년)는 자(字)는 장경(長卿)이라 했으며 촉군(蜀郡) 성도(成都, 현재사천성성도군) 출신이다. 그는 말더듬이었으나, 부작(賦作)에 뛰어났다고 하며 경제(景帝) 때는 무기상시(武騏常侍)가 되었으나 경제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양왕(梁王)의 문하가 되었다.

그는 친구 왕길(王吉)이 현령으로 있는 임공(臨邛)에 찾아가 머물러 살기로 했다. 왕길의 소개로 임공의 제일가는 갑부 탁왕손(卓王孫)을 알게 되었는데 탁왕손은 가동만 8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느날 탁왕손의 집에서 연회를 차리고 고을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했다.사마상여도 초대한 잔치에서 이때 사마상여가 거문고로 연주한 유명한 곡이 봉구황(鳳求凰)이다.

 봉구황은 한나라 문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제목은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그리는 마음을 수컷 봉황새가 암컷 봉황을 찾는 것에 비유해 쓴 시의 제목이다.

<봉구황>

봉(鳳)이 고향에 돌아와
황(凰)을 찾아 천하를 날아다녔구나.


때를 만나지 못해서 여태 찾지 못했으나
오늘밤 여기에 올 지를 어이 알았겠는가.


아름다운 여인이 규방에 계시나니
방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어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어떠한 인연이면 그녀와 한 쌍의 원앙이 되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황이여, 황이여, 나를 따라 둥지를 틀어다오
꼬리를 비비며 영원한 짝이 되리니
정을 나누고 몸이 통하고 마음이 하나되니
깊은 밤 서로 따르며 좋게 지낸들 그 누가 알리오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라서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

   
중국드라마 <봉구황>에 출연했던 한국배우 박시연

임공갑부 탁왕손에게는 탁문군(卓文君,원명은 문후 文后)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천하 절세미인에다가 시와 문장, 그리고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7세때 혼례식을 올리고 몇달못가 갑자기 신랑이 죽어 졸지에 과부가 된다. 

탁문군의 오빠 탁문웅의 친구인 사마상여는 손님으로 혼례에 참석했었는데 탁문군의 비극을 듣고 그녀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탁왕손이 연회를 벌릴 것을 사전에 안 사마상여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꾀했다. 가사 중 마지막 세 구절은 사실 탁문군에게 야반도주하자는 요청이었다.

음률에 정통했던 탁문군은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상여의 재화(才華)와 기도(氣度)에 빠지게 되었다.그날 밤 탁문군과 상여는 밤을 새워 사랑을 확인하였다.두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하여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성도(成都)로의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자기 딸이 다른 남자와 함께 달아났다는 것을 알게 된 탁왕손은 크게 화가 나서 자기 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평생 동안 다시는 상봉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원래 가난했던 사마상여는 탁문군을 데리고 성도(成都)로 갔으나 결국은 생활고에 못이겨 다시 임공(臨邛)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조그만 상점을 내어 옷가지 등을 팔아 연명하다가 결국엔 조그만 주점을 하나 차리게 되었다.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간신히 허기만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했다. 탁문군도 손수 손님을 접대하며 술을 팔았고 사마상여는 짧은 바지를 입고 주점 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를 해야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탁왕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다시 수치심이 극에 달하여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친한 친구가 찾아와 탁왕손에게 충고했다.

"자네가 딸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체면을 잃고 있는데 그건 자네의 체면도 잃는 게 아닌가? 사정이 어떻든 자네 딸임에는 부인할 수 없으니 딸에게 돈을 주게나,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

탁왕손은 할 수 없이 훗날 딸에게 많은 재산을 주고 주점을 거두게는 했으나 그래도 딸과 사위의 내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속으로 부유해진 사마상여는 7대 황제 한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궁정문인으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탁문군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한나라 최고의 문인(文人)으로 등극한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금도 사천성 공래현(邛崍縣) 성내의 문군공원(文君公園) 경내에 문군정(文君井)이란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당시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주점을 차렸을 때 사용하던 우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문헌에는 호부상서(정3품 장관)를 지낸 탁득경, 학자인 탁위, 탁종, 탁유, 화가 탁적, 시인(施人) 탁운, 탁자신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탁씨 성을 가진 인물은 고려 경종(976~981) 때의 탁사정(卓思正)으로 알려졌다.그렇다면 탁사정은 광산탁씨 시조의 선조가 된다. 광산탁씨 대종회보에도  탁사정공으로 표현하며 시조 이전의 연원을 추정하고 있다.

 

 

탁사정은 현종 2년(1011년)에 어사중승(御史中丞 :중승은 어사대의 종3품벼슬로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어사대가 사헌부로 바뀌면서 어사중승으로 불렀으며 1308년에는 정3품으로 승격되었고 1401년(태종1)에 집의로 바뀌었음) 이 됐으나 강조(康兆)의 무리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은거하였다.

 탁사정으로부터 시조 탁지엽이 등장하기까지 90여년 동안은 공백으로 있는데, 이는 탁사정이 유배됐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광산탁씨(光山卓氏)의 시조 학포(學圃) 탁지엽(卓之葉)은 고려 선종때(1083~1094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문신가운데 뽑힌 뛰어난 학자로서 한림원 등의 종3품 벼슬)가 되고  뒤에 태사(太師:정1품 벼슬)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제수(除授:추천을 받지않고 임금이 벼슬을 바로 내려줌)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광산(光山)으로 하고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탁지엽(卓之葉)의 맏아들 탁도민(卓道敏)이 선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아본 보문각의 종2품 벼슬)을 재낸후 좌정승(左政丞:종1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둘째 탁도집(卓道集)은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벼슬)를 역임하여 크게 가문을 중흥시켰다.

   
          광산 탁씨(光山卓氏) 시조 문성공(文成公) 탁지엽(卓之葉)의 묘

광산탁씨(光山卓氏)의 시조 탁지엽(卓之葉)은 고려 선종(宣宗) 때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져 종유(宗儒)로 추대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한림원,수문전의 3품에서 4품벼슬로 뛰어난 문신중에 임명함)를 거쳐 태사(太師;정1품 벼슬)에 이르렀다. 탁지엽(卓之葉)의 자는 옥립(玉立), 호는 학포(學圃)이며 광산 탁씨(光山卓氏) 세보에 의하면 그 선계(先系)는 중국인으로 한나라 때 포덕후(布德侯)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탁원광(卓元光)은 대제학(大提學:보문각 등의 종2품 벼슬 조선때는 정2품 벼슬로 문형) 탁도민(卓道敏)의 아들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벼슬)에 이르렀고 선종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의 약자)가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탁종성(卓宗成)이 신종조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이며 종2품벼슬)을 역임하고, 해양군(海陽君)에 추봉되어 공민왕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고려문하부의 4품 벼슬로 사의대부라고도 하며 직능은 습유 등과 함께 낭사로써 '봉박과 간쟁'을 담당함 1356년(공민왕 5) 좌.우 간의대부를 간의대부로 개칭하고 종3품으로 승격함)를 거쳐,탁종성의 증손으로 예의 판서(禮儀判書:예의사의 정3품으뜸 벼슬)에 오른  탁광무(卓光茂)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고려사 4권>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탁씨인 탁사정(卓思政)이 어사중승(御史中丞:중승은 어사대의 종3품벼슬로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어사대가 사헌부로 바뀌면서 어사중승으로 불렀으며 1308년에는 정3품으로 승격되었고 1401년(태종1)에 집의로 바뀌었음)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고려때 중서문하성의 정4품 낭사벼슬)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권 세가(世家) 4권 현종 2년(1011년) 3월 15일과 4월 4일 기록 및 강조(康兆)의 당파로 몰려 유배되었다는  8월 기록내용 부분.

조선조에와서는 탁광무의 아들로 태종때 지신사(知申事:조선초까지 도승지의 다른이름이며 정3품 왕의 비서실장).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 벼슬.차관)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종2품 벼슬 규장각제학은 종1품)을 거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정2품 벼슬)에 오른 9세손 탁 신(卓愼,1367~1426,호는 죽정,자는 자기.겸부이며 정몽주의 문인)이 뛰어났다.

 탁 신은  1389년(고려창왕1)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였다가 조선태조 4년에 출사하여 고향에서 감지(甘旨)를 지내고, 아버지가 병사한 뒤인 1398년(조선 정종 즉위해)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우습유(右拾遺:중서문하성의 종6품 낭사벼슬)가 되었다.

 용담현령(龍潭縣令).좌정언(左正言:봉박과 간쟁을 맡아하던 종6품 낭사벼슬).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 벼슬) 등을 거쳐 집의(執義: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 벼슬)가 되었으나 언관(言官)으로서 태종의 사위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군사를 발병한 사건에 그의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1409년 나주(羅州)에 장류(杖流)되었다.

 그러나 곧 사면되어 1410년 전농시정(典農寺正:전농시는 나라의 제사에 쓰던 곡식을 맡아보던 관아이며 정은 3품 벼슬).성균사성(成均司成)에 임용되었고, 동부대언(同副代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태종때 지신사(知申事).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차관).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지내고,1421년(세종 3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정2품 벼슬)에 올랐다. 경학(經學)에 밝았고,무예(武藝)와 음률(音律)에도 능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무예 ·음률(音律)에도 능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에는 문장가들이 그와 주고받은 글을 남기거나 그를 추억하는 글이 수록돼 있다. 여러 문사들의 글 중 대표적인 것이 김종직의 제탁우죽림정(題卓友竹林亭: 벗 죽림정에게 주다)과 우암 송시열의 과죽정구거유감(過竹亭舊居有感:죽정공 옛집을 지나는 느낌을 쓰다)이다.그는 사림의 종조인 김종직과 우암 송시열도 학문을 높이 인정한 거유(巨儒)로 안동의 세덕사와 성주(星州)의 오계사(梧溪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경렴정집(景濂亭集)

1850년 후손에 의해 간행된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의 시문집인 경렴정집(景濂亭集)에는 아들 탁신(卓愼)의 죽정집(竹亭集)과 증손 탁중(卓中)의 죽림정집(竹林亭集)도 실려 있다.

탁광무(卓光茂ㆍ?∼1409)의 자는 겸부(謙夫), 호는 경렴정(景濂亭)으로 1331년(충혜왕 1년) 국자감시(國子監試:국자감에서 실시한 예부시(禮部試)의 예비시험으로 합격자는 진사로 뽑혔기에 '진사시'라고도함)에 급제하였고,공민왕 14년(1365년) 내서사인(內書舍人:도첨의부의 종4품 벼슬로 1362(공민왕11)중서사인을 고친것)이 된 뒤 이듬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중서문하성의 정4품 낭사벼슬로 좌간의대부를 고친것)를 거쳐 성균관 대제학과 예의판서(禮儀判書:정3품 장관)에 올랐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동문선(東文選)에 여러편의 시(詩)가 전한다. 영의정(정1품 정승)에 추증되고 성주(星州) 오계사(梧溪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세덕사>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와 아들 죽정(竹亭) 탁신(卓愼)의 위패를 모신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세덕사(世德祠,경북민속자료 제37호)는 1987년 임하댐 건설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이밖에 탁순창(卓順昌,1495~1593,자는 덕승(德昇)호는 송암 松菴)은  진사(進士) 탁문상(卓文尙)의 아들이다. 광산 탁씨(光山卓氏) 안동(安東) 입향조(入鄕祖)로 병서(兵書)에 심잠(沈潛)하고 무예를 닦아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그 공으로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었으며 은퇴한 뒤 안동(安東) 와룡산(臥龍山) 아래에 터를 잡아 오계(梧溪)에다 정자를 짓고 유연자적(悠然自適)했다. 

 

 

 

 또한 한성부윤(漢城府尹:종2품 외관직)을 지낸 탁 성(卓誠)은 추밀원 의관(樞密院議官)을 지낸 후손 탁재윤(卓在潤)과 함께 가문을 빛냈으며 근현대의 인물은 안중근의사의 하얼삔 의거 당시 함께 했던 독립투사 탁공규가 유명하다.

   

                                         용계리 은행나무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천연기념물 제175호>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는 나이가 700년으로 높이 37M, 가슴높이의 둘레는 14.5M인 은행나무이다. 은행나무는 한자어로 행자목(杏子木), 공손수(公孫樹), 압각수(鴨脚樹) 등으로 불린다. 원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나무가 수몰되는 것을 염려하여 그 자리에서 15M 높이로 들어 올려 심어 놓은 것이다. 줄기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난 1987년부터 90년까지 4년동안 23억원을 들여 살려낸 대표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는 조선 선조때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한 송암(松庵) 탁순창(卓順昌)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곳에 낙향하여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은행계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친목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지금 은행나무가 있던 용계리 마을은 수몰되어 없어졌지만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해마다 이 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보호해 왔다.

 

<광산탁씨 분파(分派)>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15세손 탁순창(卓順昌)이 광주(光州)에서 안동(安東) 길안(吉安) 오계(梧溪)에 이거(移居)하여 540여년간 세거했으며 세덕사(世德祠)에서 선조를 향사(제사)한다. 탁순창은 5자(子)를 두었으나 막내는 무후(無後)하고 4개파로 분파되어 각지로 산거하게 된다.  

제 1 파- 세영(世英)(어모장군(정3품 당하관)부사맹공파(禦侮將軍 副司孟公派))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성주(星州), 양양, 부산, 강릉 등지에서 살고 있다.  
제2 파- 세형(世亨)(어모장군공파(禦侮將軍公派)) 안동(安東) 구수(九水)를 중심으로 세거
제3 파- 원정(元貞)(관무공랑공파(官務功郞公派)) 안동(安東) 오계(梧溪)를 중심으로 세거
제4 파- 세공(世恭)(이조좌랑공파(吏曹佐郞公派)) 익산을 중심으로 세거

성주(星州)(통훈공파 通訓公派)는 세영(世英)의 2남 홍주(弘柱:통훈대부 通訓大夫))의 증손(曾孫) 선의(善儀)가 성주군(星州郡) 선남면(船南面) 관화리(官花里)로 1690년에 이주하였다. 
1800년에 다시 벽진면(碧珍面) 봉계리(鳳溪里) 정곡(鼎谷)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으며 통훈공(通訓公) 7대손 제린(濟麟)이 헌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관)를 지냈다.

 경남 남해군 남면 당항마을도 광산탁씨 30가구가 모여사는 곳이다.남해에 뿌리를 내린 입남시조(入南始祖)로부터 9세손이라는 탁한신(80)옹에 의하면 광산탁씨는 남해군의 창선에 뿌리내린 시조의 손자가 이곳 당항마을에 옮겨와 정착했다고 한다.

<광산탁씨 족보>

광산탁씨 가문의 가장 오래된 족보는 서기1600년(선조 34년)에 간행된 경자보다. 본문은 현존하지 않지만 족보전문가 백곡 정곤수(1538~1602,초명은 규,곤수는 선조대왕의 하사명,황해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판,서천군에 봉해짐,영의정추증)가 쓴 족보의 서문이 남아 있다. 경자보는 15세손인 탁순창의 아들 세영에 의해 간행되었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 족보 역사로 볼 때 상당히 앞선 것이다.

 

문집에도 족보라 할 수 있는 세보(世譜)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8세손인 탁광무의 글을 모아 편찬한 겸영정집(景濂亭集) 권5 부죽림정집(附竹林亭集)편은 광산탁씨 시조 탁지엽부터 24세까지의 세계(世系)를 수록하고 있다.

 

<겸영정집>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의 당대 최고의 석학 문장가들의 글이 실려 있는 문집으로 한문학사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으며,16세손인 탁세형의 <광산탁씨세보사실>이라는 책의 권두에 실린 한산 이상정의 기해보서(己亥譜序:1779년 추정)가 있다.

 

그러나 실존하는 광산탁씨 서문은 1907년에 통영의 탁진남이 발간한 정미보이다. 그 후부터 12차 족보를 발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산탁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으며 3년마다 실시함.대과)에 5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3명 등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산탁씨는

1985년에는 총 3,676가구에 인구는 15,201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4,891가구에 인구는 15,691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소재지 광산(光山)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때의 무진주(武珍州)이다. 서기 757년(경덕왕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23)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서기 995년(성종14) 관제개혁때 해양도(海陽道) 소속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일명 기양주 冀陽州)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10년 광주면이 되었고 1935년 광주읍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1988년 송정시와 함께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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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한국성씨연구소).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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