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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첩] 바코드 / 허영숙

작성자이보|작성시간07.07.06|조회수65 목록 댓글 2






인연이란 마음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씨앗에서 새로운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진다.
인연이란
이렇듯 미묘한 얽힘이다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바코드

허영숙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 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 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된 것은
새우의 함량이라든가 출고 일자 혹은
숫자로 드러나는 가격에 불과할 뿐
비닐봉지 안에 갇힌
공기의 질량이나 내게 오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줄의 좁은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나를
이 작은 칸 안에 모두 말 할 수는 없다
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걸렸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경북 포항 출생
<시마을> 동인
시마을 최우수작가(3회)
2006년 <시안>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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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바코드’로 상징되는 현대문명은
영악하다. 뭐든지 쓰윽 읽고 지나가면 한 순간에
그 상품을 위하여 투자된 노동이며, 땀방울이며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낸다.
그러나 그 ‘바코드’가
산다는 것의 아픈 질량을,
가슴 시린 추억이며, 기쁘거나
때로 슬픈 날들의 내역을 계산해 낼 수 있으랴.
‘찬 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펑펑 울고 싶었던 그 추운 날의 기억들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바코드화 되어 가는 산업사회에 대한
뒤돌아봄과 푸른 시선이
정오의 풍경을 둥글게 말아쥐고 있다.
햇살, 나를 환하게 찍고 간다.
내 몸의 바코드, 결코 기록될 수 없는....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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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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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7.07 좋은 시, 秀作입니다.
  • 작성자lululala | 작성시간 07.07.06 차갑게 식어 있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둡고 무디게 두리뭉실 잠겨있던 제 감성을 건드린, 오랫만에 제 안에 아직 느낌을 가진 제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참 좋은 시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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