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文史哲 Odyssey

[시인을 찾아서3] 신경림(申庚林)

작성자이보|작성시간06.03.02|조회수533 목록 댓글 0
신경림       




신경림[申庚林]시인.

1936. 4. 6 충북 중원~.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恨)과 울분을 노래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석상〉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곧 건강이 나빠져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휘문출판사·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한때 절필하기도 했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원격지〉(동국시집, 1970. 1)·〈산읍기행〉(월간다리, 1972. 8)·〈시제 詩祭〉(월간중앙, 1972. 12) 등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초기시에서 보여준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막연하고 정체된 농촌이 아니라 핍박받는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했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 農舞〉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우리들의 북〉(1988) 등을 펴냈고, 그밖에 평론으로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창작과 비평, 1972. 6)·〈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마당, 1982. 6)·〈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오늘의 책, 1984. 3) 등을 발표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92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농무』(1973), 『새재』(1979), 『달넘세』(1985),『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4) 등
장시집: 『남한강』(1987)
기행문집: 『민요기행·1』(1985), 『민요기행·2』(1989)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시의 이해』(1986)


문학주의자 선언한 신경림

『文學이야기』


신경림(71) 시인은 요즘 바깥 출입이 부쩍 줄었다. 3년전 정릉의 단독주택을 떠나 인근 아파트로 이사온 직후부터다. 오랜만에 찾아갔더니 거실 한 귀퉁이에 놓인 ‘만해문학상’ 수상 기념 액자의 유리가 깨져 있었다.

 외손자(초등4),외손녀(초등1)의 재롱이 그의 등을 타고 넘은 흔적이다. 액자 안의 한용운은 유리가 깨지나 마나,웃고 있다. 분홍 크레용으로 액자 여백에 긁적인 낙서가 오히려 해탈의 문자같기도 했다.

“하루는 손녀 녀석이 망치로 유리를 깨버렸지 뭐야.” 아이들이 장난치다 유리가 깨지면 어떡하나 하는 노심초사는 오히려 손녀의 망치질에 말끔히 가신 셈이다.

 시인의 눈동자가 전보다 더욱 동안(童眼)으로 보이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신경림의 동안이 보는 것은 부쩍 죽음이다. 손주들과 정겹게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아가는 것의 회한과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눈빛. 세속의 인연을 흐르는 강물처럼 흘려버리려는 그의 다짐이 빛나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시력 60년을 태워 불꽃처럼 아름답고,눈부신 다짐이다. 산다는 것의 기억 이전에도 그런 빛이 있었을 것인가. 노시인의 요즘 심경을 가장 잘 드려낸 시가 2003년에 발표한 ‘낙타’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 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누군가 있어서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고 낙타로 다시 오리라는 다짐,지금의 내가 아니라 낙타로 존재하고 싶다는 삶에 대한 처연한 대처는 인간이 마지막 흘리는 눈물처럼 차갑고도 뜨겁다.

 그런 그가 근자에 ‘문학주의자 선언’을 했다. 민족문학 진영의 좌장격인 그가 순수문학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을 테지만 시대가 악하거나 선하다고 해서 인간이 시대를 닮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실상 신과 악을 주재하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의 의지임을 그는 최근작인 ‘용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성당 앞 골목에서 아이들이 개미떼를 짓밟고 있다.(중략)//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내가 개미가 되어 거대한 존재한테 짓이겨지는./(중략) 우리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우리의 존재와도,우리의 생각과도 우리의 증오와도 우리의 사랑과도 그밖의 우리의 아무 것과도 상관이 없는 그 거대한 존재를 향해,오오 주여,용서하소서,끊임없이 울부짓는./천년을 만년을 그렇게 울부짓기만 하는.//누가 누구를 용서하고,무엇 때문에 용서하는지도 모르면서.”

과거,사실주의 진영의 시인들은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사회 정의는 실현되고,어떻게 해야 우리가 모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다시 그의 눈동자로 돌아오면 그는 짐짓 한 시대의 시작과 종결을 봐버린 동안을 끔벅거릴 뿐이다.

시대를 향한 질문들은 그 눈가의 깊은 주름을 닮듯,절대자를 향한 질문으로 바뀌었으니 그가 문학주의자를 선언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문학을 하려면 결국 문학주의자여야 해. 시로 사회변혁을 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야. 민중시는 나름대로 한 일이 있지만 그러나 시로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시로 한 일일뿐,민중시도 결국 문학주의자들의 역할이고 소임이 아니겠어? 내가 말하는 문학주의자란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오히려 반영하자는 것이지. 그 시대의 질문이자 대답이 곧 시야.”

그와 함께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한 후에 가끔 들린다는 허름한 호프집에 들었다. 원탁 테이블 곁으로 푹신한 소파가 한 개,그리고는 등받이도 없는 보조의자가 빙 둘러져 있었다.

 푹신한 소파를 권했지만 그는 “난 푹신한 것이 늘 어색해”라며 사양했다. “문학주의자가 거창한 것은 아니야. 아무래도 여생이 많지 않으니까 다른 쪽에 낭비하지 않고 시에 집중하려는 것이지,딴 뜻은 없어. 옛날에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좀 여유있게 살고 싶은 것이지. 집회나 모임도 꼭 가야될 것이 아니면 빠지고. 시에 집중하고 싶으이.”

<국민일보>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박서강 기자




1970년대 민중시 실험의 의미와 한계


               ─ 신경림의 경우를 중심으로

                                           윤여탁(서울대 교수)


Ⅰ.

신경림의 강연을 두어번 들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선생은 경험이라는 말과 민요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가장 최근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평론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문학 연구자들의 관점에서는 “문학 연구자들은 작가들의 후일담이나 작품이 창작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로 받아넘겨진다.

물론 이 말은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소위 ‘의도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작품 자체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즉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작품에 실현되고 있는 실체를 중심으로 평가하여야 하는 것이지, 작가가 이런저런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형상을 표현했다는 설명에 맞추어 읽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신비평가들은 작품의 내적인 특성, 즉 시를 예로 들면 제시된 시 자체에서 운율, 이미지, 비유, 상징 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막상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이 신경림론을 쓰려고 하니, 이처럼 문학 작품의 내적인 자율성에만 충실한 분석을 하기에는 많은 장애가 가로놓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인의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고, 일찍이 시인들의 창작 노트를 편집하면서 시인의 창작에 관한 고백을 여러 편 읽었고, 1970년대 시인들의 시론을 정리하는 자리에서는 시인이 아닌 시론가로서 신경림이 시를 보는 관점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바 있다.  

아울러 이 글을 쓰면서도 이미 시인이 쓴 여러 편의 산문을 읽게 되었다. 또 북한산을 내려와 구기동 언저리에서 만난 얼굴, 등록상표인 소년같은 미소를 간직한 얼굴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나 자신이 분석 대상으로 하는 시인에게서 자유스럽지 않으니, 작품에 대한 분석도 이런 나에게서 자유스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 제목부터 부정적인 함의(含意)로 출발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정말 시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처럼 197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인가? 어떤 점이 그런가? 만일 그렇지 안다면, 어떤 점이 그런가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이 글은 신경림이 1980년대 이전에 발표한 시, 특히 시집 ?농무?와 ?새재?에 수록된 작품을 중심으로 살피고, 이런 시적 성취를 뒷받침하는 일부 시론도 같이 분석할 것이다.

 이는 이번호 특집이 1970년대 문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 두 시집의 간행으로 1970년대 신경림의 위상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두 시집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실험 정신, 즉 민중 의식의 시적 형상화와 장편 서사시의 새로운 시도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Ⅱ.

신경림의 시에 대해서는 시집 ?농무?가 간행된 초창기부터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일찍이 백낙청은 “보아라 이런 詩集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마음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백낙청, ?발문?, ?농무? 증보판, 창작과 비평사, 1975, 110면.>고 그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런 평가는 1960년대 현대시의 난해성이나 비민중적 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현장과 현장의 정감을 형상화”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구중서 외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 비평사, 1995, 49면.>하는 방법을 통하여, 시가 우리와 나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런 평가에 작용하는 긍정적인 근거들은 주로 그가 영문학을 전공하였지만, 이런 외국 문학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쉬운 우리말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우리의 농촌 현실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한글전용  <윤호병, ?치열한 민중의식과 준열한 서사의 힘 ?? 신경림 시의 구조적 특질?, ?시와 시학?, 1993. 봄, 134면.>을 하면서 알기 쉬운 시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한글전용이라는 시어에 대한 평가는 재고(再考)를 요한다. 즉 신경림은 대부분의 시어를 한글로 구사하고 있지만, 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제목에는 한자를 많이 쓴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농무?와 ?새재?(창작과 비평사, 1979)의 제목을 보면 쉽게 확인된다.

 특히 문학의 다른 갈래에 비하여 시에서 제목은 텍스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한글전용이라고 규정될 수 없다.

이 점은 신경림의 시세계가 우리 전통의 한시 자체가 아니라 한시가 추구한 시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그가 일찍이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개척하고자 했던 송강(松江)을 비롯한 옛시인들의 영향과 근대 시인으로 향토적인 방언을 많이 구사한 백석(白石) 등이 추구한 시세계를 동경하고 사숙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즉 그는 근대 학문을 했지만, 그 근대 학문의 영향보다는 자신이 몸소 체험한 삶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으며, 영문학이라는 대학에서의 학습보다는 다양한 독서체험 중에서 접한 숱한 한국 문학의 유산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은 그의 시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자연 세계나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의 삶과 관계 속에서 읊어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객관화하여 전해주고 있지만 남의 이야기만이 아닌 우리와 나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시적 기법은 전통적인 시조나 한시의 기법인 선경 후정(先景後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 대상에 의탁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신경림의 시는 앞의 관점에서는 리얼리즘을 확보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으며, 후자의 관점에서는 서정시의 미학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서정시라는 큰 갈래 속에 리얼리즘시나 순수 서정시, 모더니즘시 등이 포함된다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있다.


밤 늦도록 우리는 지난 얘기만 한다
산골 여인숙은 돌광산이 가까운데
마당에는 대낮처럼 달빛이 환해
달빛에도 부끄러워 얼굴들을 돌리고
밤 늦도록 우리는 옛날 얘기만 한다
누가 속고 누가 속였는가 따지 않는다
산비탈엔 달 빛 아래 산국화가 하양고
비겁하게 사느라고 야윈 어깨로
밤 새도록 우리는 빈 얘기만 한다
                ?? ?달빛?의 전문

광산 가까운 산골 연인숙에서 만난 우리들의 모습. 지난 얘기, 옛날 얘기, 빈 얘기를 하면서 밤을 지샐 수 있는 우리네의 모습이 가을 달빛과 산국화와 어우러져 이 시에는 그려져 있다.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무엇인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부끄럽고, 가난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런 모습은 달빛이 비치는 밤이라는 시간, 산골 마당이라는 공간, 달빛에 비치는 하얀 산국화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전달되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 시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정서이자 서정시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시적 기교는 ?갈대?와 같은 초기시에서부터 드러나며  <윤여탁, ?서정 단시의 갈래적 속성과 전통?, ?시 교육론?2, 서울대 출판부, 1998, 187~188면.> 최근에 발표된 작품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작과 비평사, 1998)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의 시세계를 이루는 체험이 사실적인 표현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작동되어 새로운 시적인 형상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즉 신경림의 시세계 중에서 사실적인 이야기의 전달은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서정시의 은근함을 통한 정서적 감동의 전달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달빛?이나 ?갈대?와 같은 시세계가 정서 전달의 측면에서는 보다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신경림의 1970년대 시에서 당대 농민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들이 현실 반영이라는 리얼리즘의 성취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지만, 독자의 정서적 감동에는 같은 정도의 성취를 이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문학이 1970년대 현실을 떠나 좀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런 시세계를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의 독자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1970년대 민중시 일반에 대한 평가에도 적용되는 사항으로, 이런 시가 민족?민중의 당대 현실을 잘 반영하고 형상화하고는 있으나,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과 1970년대 민중시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에 상응하는 형상의 창조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경림의 시 역시 이런 1970년대 민중시에 대한 현대적?현재적 평가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Ⅲ.

1970년대 신경림의 시 작품에 대한 또다른 평가는 서사시적 이야기 문학을 서정시에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점은 신경림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나 해방 정국에서 서술시를 실험했던 임화, 박세영, 백석, 이용악, 김상훈, 최석두 등과 같은 전대 문학 전통에 빚지고 있으며, 가깝게는 박봉우, 신동엽 등이나 동시대적으로는 김지하, 고은, 이시영와 같은 선후배들과 짐을 나누어 맡고 있었다.

이런 중에 그의 시 작품이 돋보이는 점은 앞 부분에서 말한 서정적인 시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에 주목하여 그의 시적 성취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구중서 외 엮음, 앞의 책.>

아울러 이런 평가의 관점은 이야기를 내포한 서술시인 ?농무?의 단계에서 서사시 ?새재?로, 다시 ?남한강?(1981)이나 ?쇠무지벌?(1985)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시적 편력이 결코 성공적이라고만 평가할 수 없다. 서사시 ?새재?에 보였던 전형적 인물 창조가 이후 작품에서는 민중 일반으로 확대되면서 구성상 유기성을 상실하고 주제가 산만하거나 분산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윤영천이 신경림의 시적 성취를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새재? 이후의 장시 시도가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지적한 점은 타당하다.
    

서사시가 지향하는 서사 갈래의 요건과 서정 갈래의 요건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방황은 이미 ?농무?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를 쓰는 단계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가 전달하는 농민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삶과 그들의 고난은 알 수 있으되,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말만 있고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데 머물고 있다. 그의 초기 대표적인 작품인 다음 시는 이런 측면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낄낄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農舞?의 전문

훙겨워야 할 ‘농무’는 이제 아이들이나 처녀애들의 구경거리일 뿐, 농민들 스스로의 신명풀이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이 답답하고 고달프게 느껴지고 원통하게도 생각된다.

 힘겨웠던 농사일들을 잊어버리고자 했던 예전의 농악놀이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 기반인 농사를 포기하고서 실없는 사람처럼 위장하여 행동할 때만이 ‘신명’이 난다.

 따라서 이 즈음에 나는 신명은 뿌리뽑힌 자의 신명이며, ‘우리’라고 표현했지만 우리 모두의 신명이 아니다. 그 행사에 참여한 몇 사람만의 신명이다.

그리고 이처럼 비교적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농무?는 시적으로 형상화된 이야기와 사건이 전달하는 정서는 있으되, 그 정서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후기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의 이야기나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며,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점은 우리 교과서에 수록된 근대시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라는 상황을 이해할 때에나 설명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맥락에서 훨씬 후대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가 독자들에게 보다 감명 깊게 다가온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신경림의 1970년대 시가 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는 1970년대 민중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고 그것도 살아 있는 서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이나 정서는 이야기에만 의존함으로써 그 한계를 스스로 노정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갈대?가 보여주었던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의 깊이도, 후대 서정시가 보여주었던 그리운 추억의 그림자도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달리 말하면 시의 리얼리즘적인 성취는 보여주지만 서정시의 정신적 높이와 인간적 감동의 깊이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이제는 병풍으로 표구화되어 박제화(剝製化)되어 버린 풍속화 한 폭을 보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경림의 1970년대 이야기를 전하는 농민시, 민중시는 서사를 추구하였지만, 서정성의 구현에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일찍이 단편 서사시를 추구하면서 서정성을 구현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만 일제 강점기 프로시나 해방정국의 정치시의 전철을 밟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쉽고 친근한 시를 통하여 전대 모더니즘시의 난해성을 추문화하고, 가난한 생활의 탐구를 통하여 현실 모순을 전경화(前景化)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의 시적 현실주의를 실현했다는 측면에서는 서정성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미흡했던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Ⅳ.

신경림 시의 또다른 특징은 민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여러 시론에서 반복적으로 힘주어 주장되고 있다. 윤여탁, ?창작 방법으로서의 민중시론? 참조.
그는 1970년대 이후 ‘민요연구회’를 조직하여 민요 발굴과 보급에 힘썼고, 민요 기행을 하면서 ?민요 기행?(1985, 1989)이라는 산문집을 2권이나 출간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요를 실험하는 시를 ?달 넘세?(창작과 비평사, 1985)라는 시집으로 집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민요 탐구는 1970년대 민중시에서부터 시작되어 이후의 서사시에 많은 민요가 삽입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민요 탐구는 등단 직후부터 10년 가까운 공백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1956년 등단 이후 낙향하여 생활을 하면서 겪은 농촌 체험과 떠돌이 체험이나 이렇게 접한 농민, 민중들의 삶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찾았던 방법이었던 것 같다.

 민중의 삶을 추구하다가 보니 민중들의 노래 형식인 민요를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시적 형식 추구는 1970년대 시 일반에 두루 나타난다. 여기서는 이런 점에 대해서 평론가들과 시인 자신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다음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목계장터?의 전문

이 시는 방랑과 정착의 이미지를 나름의 자연 대상, 즉 강, 구름, 바람과 산, 들꽃, 잔돌이라는 표상물을 통하여 이 시대 민중들과 시인 자신의 운명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적 형상을 위하여 민요의 운율이라고 할 수 있는 4음보격을 주로 구사하고 있으며, ‘하고’, ‘하네’, ‘라네’ 등의 어미를 반복적으로 구사하여 어감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고 있다.

 또한 나름대로는 이런 시어의 반복과 의미상 대구적인 표현을 통하여 민요적 형식 김대행은 민요 형식을 병렬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은 다른 관점에서는 반복과 대구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적 시도는 ?어허 달구?같은 짧은 시와 장편의 서사시에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특히 서사시에서는 삽입가요의 형태로 여러 민요가 구사되고 있다.

 그러나 서정적인 시에서의 이런 실험은 그리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즉 민요의 사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적 효과에는 어느 정도 도달하고 있지만, 민요의 정서적 시세계나 운율 의식에는 미달이며, 민중에게 다가가는 민요의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기만 하다.

 민중이 향유하는 민요와는 전혀 다른 전문 시인의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신경림도 ?목계장터?가 민요시가 절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거나 이를 반복한다고 해서 민요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특히 노래로 불려지는 민요의 특성과 눈으로 읽히는 시의 특성 사이의 거리를 메꾸기에는 활자로 된 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민요는 민중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는 것이며, 시는 신경림이 쓴 것으로 농민이나 민중들이 아니라 농민과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서 읽은 문학 작품이다. 이처럼 신경림의 민요시 창작은 그 향유 체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다른 기반과 어울리지 않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시인 세대에 체득(體得)되어 있는 민요의 운율을 복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독자 대중에게 그것은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어릴 적부터 서양 음악의 리듬에 익숙한, 그리고 자유시의 외형적인 리듬 없음에 익숙한 대중들에게는 전통적인 리듬이 오히려 낯선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1970년대 신경림의 민요를 추구했던 시도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역시 일부 전문가들이나 이런 리듬이 체득되었던 구세대의 향수(鄕愁)이자 복고 취미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이런 민요 탐구는 일찍이 1920년대 민요조 서정시 운동에서 일본을 모델로 하여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들이 민요라는 민중들의 전통적인 시가를 복권하려는 과정에서 보여준 한계를 보여준 것과도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 부흥 운동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김소월이 나왔고, 이후에는 박목월, 신경림의 우리 시어 탐구에는 긍적적인 성과도 인정된다. 이 자리에서는 이런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만을 주목하고자 한다.

즉 그의 민요 부활 노력은 이미 민요 세대가 아닌 우리 현대시 독자에게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현대 사회에서 사망 선고가 내려진 한시나 시조 부흥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외로운 복고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신경림의 창작적 경향은 이런 모색을 극복하고 새로운 우리의 운율, 이미 자유시라는 내적인 운율에 익숙한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1990년대 시 창작은 이런 방향 전환의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1990년대 이전에 민중시를 썼던 시인들이 최근에 보여준 창작적 전환 특히 서정 단시의 창작이라는 작업과 서정성 회복 노력과도 연결된다.

Ⅴ.

신경림은 다른 시인들에 비하여 비교적 많은 시론을 쓴 시 이론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만큼 그의 시에 대한 생각은 여러 자리에서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고 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시에 대한 시평보다는 자신의 시 창작 경험을 설명한 글을 중심으로, 그의 1970년대 민중시와 민요시 창작의 이론적 기반을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그의 1980년대 초반까지의 시론들을 모은 첫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전예원, 1983)의 1부에 수록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와 ?시와 민요?, ?시와 이데올로기?, ?시정신과 역사정신?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신경림 시론의 핵심은 민중시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민중시는 민중들이 처한 현실이나 삶이 시로 이어지고 형상화되어야만 살아 있는 시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시는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민중의 끈질기고도 꿋꿋한 생명력밖에는 없습니다.”(45면) 여기서는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의 해당 면만을 표기한다.

라는 생각을 거듭거듭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등단 이후 아직까지도 민중들의 삶이 살아 있는 현장을 직접 경험하면서 체득한 체험의 시학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민중 속에 들어가 보면 이런 진실은 쉽게 알 수 있으며, 이를 바르게 시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 시가 나아갈 바라는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동안 우리의 시인이 자신들의 이웃과 연결 없이 고립된, 소외된 상태에서 시작하여, 오로지 자기 고백에 만족하거나 자포자기적인 궤변을 낳았다고 우리 근?현대 시사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전대의 모더니즘이 보여주었던 난해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난해시는 민중적 기반을 잃은 것이며, 본질적으로 민중 경멸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우리의 시가 이처럼 어려운 시가 아니었다고 전제하고,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되어야 하며, 이런 시는 민중의 사랑을 받는 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민중의 사랑을 받는 즉 민중과 삶을,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한글을 전용하여 시를 쓸 것과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는 시를 쓸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불건전한 대중 가요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가요의 제작과 보급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신경림은 이런 점들을 주장하면서 민중의 시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함을 아울러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참으로 훌륭한 시라면 나아가서 일반 민중의 사상과 의지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시인이 올바른 역사인식, 올바른 사회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중략) 시는 역사의 주체요 민족의 중심세력인 민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54~55면)라는 말로, 민중을 시의 주체로 간주하는 민중시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민중시론을 주장하고 불건전한 가요에 맞설 수 있는 시를 창작하고자 했던 1970년대 그의 노력들이 현실 반영의 관점을 배제하고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우리는 그의 시 작품을 통하여 살폈다.

 그리고 이런 점은 서정시가 결국은 형상화 대상의 정서도 중요하지만 이를 향유하는 독자들의 정서도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신경림 시론의 또다른 핵심적인 내용은 민요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일찍이부터 민요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시 창작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활동은 앞에서 거론한 시론뿐만 아니라 ?왜 민요운동이 필요한가?라는 글에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같은 생각에서 앞에서 밝힌 바처럼 그는 1984년 ‘민요연구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민요 기행을 통해 민요 채집에도 힘썼다. 그 성과가 두 권의 ?민요 기행?(한길사, 1985, 1989)과 시집 ?달 넘세?(1985)라는 창작적 실천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신경림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대중들이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 대개 겉멋이나 위선, 감상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비슷한 맥락에서 전통적인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는 우리의 시를 어떻게 하면 바르게 되살릴 수 있을까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하여 독자가 시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 신경림은 “첫째 독자는 시인의 목소리 속에서 자기의 가락을 찾고자 한다. (중략) 둘째 독자는 시속에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자 한다. (중략) 셋째 독자는 시속에서 참 삶의 길이 어떠한 것인가 암시를 받기를 원한다.”(65면)고 밝히고 있다.

를 분석하여 이에 적합한 시를 창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본디 시가 민중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민중과의 일체감을 잃고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고, “집단적 민중의 참여와 공명 및 민중적 보편성”(66면)을 회복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대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민요적 바탕을 되찾는 것이라는 처방을 내놓고 있다. ‘보는 시’가 아닌 ‘읊는 시’로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더라도, 시인이 민중과의 일체감을 확보하는 길은 민요의 바탕, 민요적 가락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무가의 계승이라는 점도 언급하는데, 무가의 원시성이나 비합리성보다는 주술적인 성격과 예술적 성격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무가의 절실하고 간절함은 정신적으로 오늘의 시속에 이어져야 할 것이며, 무가의 예술성 또한 그 주술적인 측면이 배제된 채 현대시 속에 되살려지면 현대시 소생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될 것”(67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민요 가락을 계승하고 있는 민요조의 시는 민요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인식이나 검토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로 전통적으로 민요조를 실험한 시인들이(김소월, 김안서를 제외하고) 글자 수를 맞추는 일이나 조선조 양반들의 음풍농월의 흉내나 번역에 그친 점을 반성하면서, 숙명주의, 체념주의, 패배주의적인 사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민요 계승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경림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삶에서 연역적으로 추출한 체험의 시학, 민중의 시학을 주창하고 있으며, 이런 시학의 실천 방법으로 민요적 바탕의 회복이라는 전통의 계승, 발전이라는 시학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시론을 스스로 실천하고 발전시키는 중심의 자리에 위치한 시인이었다. 적어도 우리 근?현대시사에서 이런 모색을 철저하게 한 몇 안되는 뛰어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이런 주장과 창작적 실천이 그가 원래 의도한 것처럼 실현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적어도 1970년대의 시적 성취로 많은 전제를 인정해야 한다. 그 단적인 예로 독자에 주목했지만, 그의 창작적 실천은 독자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관계로, 어느 정도는 실패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Ⅵ.

어떤 문학 작품이나 그 평가는 이를 읽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개인의 요구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사회와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여 창작되게 된다. 아울러 인간 본연의 요구, 즉 보편성의 실현이라는 요구에도 부응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많은 대중적인 문학 작품들은 현실 사회와 독자들의 요구에만 부응하다보니, 그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독자 대중에게 외면을 당하게 된다.

이런 딜레마는 문학이나 예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겪는 고민이다. 이런 측면에서 1970년대 신경림의 민요시, 민중시 실험은 당대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이를 요구하는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의 독자 대중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느냐는 점에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더구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후기 산업 사회의 요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글은 이런 점을 고려하여 지금 이 순간의 관점에서 1970년대 신경림 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재고하여 보았다. 이 과정에서 당대로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신경림의 시적 모색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같이 살필 수 있었으며, 이 시대 우리의 시문학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암시받고자 했다.

 인간, 보편성, 독자 등등을 고려해야 하는 문학의 지향에 대하여…….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2005-09-09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2005-09-09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2005-09-09



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2005-09-09



길음시장 / 신경림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팔도 각 고장에서 못살고 쫓겨온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인 장거리
예삿날인데도 건어물전 앞에서는 한낮에
윷이냐 샅이냐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경로당 마당에서는 삼채굿가락의
좌도 농악이 흥을 돋군다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덩달아 두레삼도 삼고
늙은 씨름꾼은 꽃나부춤에 신명을 푸는데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라도 시작되면
일 나간 아낙들이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미지기로 놀던 상쇠도 중쇠도 빠지고
싸구려 소리가 높아지면서
길음시장은 비로소 서울이 된다

 

2005-09-09



목계 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005-09-09



길 / 신경림


길을 가다가
눈발치는 산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갈대 서걱이는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산길을 가다가
산길 강길 들길을 가다가
내 손에 가득 들린 빨간 열매를 본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울어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2005-09-09



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2005-09-09



장미에게 / 신경림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홀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둣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순등에 뚜렷한데야.
2005-09-09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신경림
- 2001년을 보내면서


어지러운 눈보라 속을 비틀대며 달려온 것 같다
긴긴 진창길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한 한 해였던가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일년 내내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높은 데서 벌어지는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발길질에
드러나는 그들 무능과 부패에
더러운 탐욕과 위선에

분노하고 탄식하고 규탄하기에도 지쳐
이제 그만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싶었으나

우리가 탄 이 거대한 열차가
그들의 난동에 달리기를 멈추면 어쩌나
철교가 무너지고 철길이 끊겨
어느 산허리를 돌다가 산산조각나면 어쩌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너무도 초조해서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남북 사이에 낀 짙은 먹구름에
멀리 밖에서는 쉴 새 없는 전쟁과 폭력의 울부짖음

창 너머 먼 하늘의 별을 보며
잠 못 이룬 밤이 또 얼마였던가

이제 지는 해를 향해 서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으니
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
많은 것을 쌓았으니

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끌고 가는 것은
큰 몸짓과 잘난 큰 소리가 아니라는 걸

추운 골목의 쓰레기를 치우는 늙은 미화원의
상처투성이 손을 보아라
허름한 공장에서 녹슨 기계를 돌리는
어린 노동자의 투박한 손을 보아라
새벽 장거리에서 생선을 파는
머리 허연 할머니의 언 손을 보아라
비닐 하우스 속에서 채소를 손질하는
중년 부부의 부르튼 손을 보아라

열사의 천막 속에서
병사의 다리에 붕대를 감는 하얀 손을 보아라

해가 지고 있다
내일의 더 밝은 햇살을 위하여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2005-09-09



가난한 사랑의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2005-09-09



집으로 가는 길 / 신 경 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2005-09-09



어느 장날 / 신경림


엽연초 조합
뒤뜰에
복사꽃이 피어 밖을 넘보고 있다.

정미소 앞, 바구니 속에서
목만 내놓은 장닭이 울고
자전거를 받쳐 놓은 우체부가
재 넘어가는 오학년짜리들을 불러세워
편지를 나누어 주고 있는 늦오후

햇볕에 까맣게 탄 늙은 옛친구 둘이
서울 색시가 있는 집에서 내게
술 대접을 한다.

산다는 일이 온통 부끄러움뿐이다가도
이래서 때로는
작은 기쁨이기도 하다.
2005-09-09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2005-09-09



간이역 / 신경림


배낭 하나 메고
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리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2005-09-09



만남 / 신경림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던 날
미움과 노여움 속에서 헤어지면서
이제 우리 다시 만날 일 없으리라 다짐했었지
그러나 뜨거운 여름날 느닷없이 소낙비 피해
처마 아래로 뛰어드는 이들 모두 낯이 익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 손에 밴 기름때 한결같고
묻지 말자 그동안 무얼 했느냐 묻지 말자
손 놓고 비 멎은 거리로 흩어지는 우리들
후줄근히 젖은 어깨에 햇살이 눈부시리
언제고 다시 만난 걸 이제사 믿는 우리들
메마른 허리에 봄바람이 싱그러우리
2005-09-09



겨울숲 / 신경림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낮달도
낮달이 들려주는 얘기와 노래도
한없이 시시하고 맥없을 게다
골짜기 낮은 곳 구석진 곳만을 찾아
잦아들 듯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메마를까
바위틈에 돌틈에 언덕배기에
모진 바람 온몸으로 맞받으며
눕고 일어서며 버티는 마른 풀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허전할까
2005-09-09



비에 대하여 / 신경림


땅속에 스몄다가 뿌리를 타고 올라가 너는
나무에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때로는 땅갗을 뚫고 솟거나 산기슭을 굽돌아
샘이나 개울이 되어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들고
먼 데 사람까지를 불러 저자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심술이 나면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으로 물고 할켜
나무들 줄줄 피 흘리고 상처나게 만들고 더러는
아예 뿌리째 뽑아 들판에 메다꽂는다
마을과 저자를 성난 발길질로 허물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을 거친 언덕에 내팽개친다
하룻밤새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나무들 열매 맺고
사람들 새로 마을을 만들 게 하는 너를 보고
사람들은 하지만 네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좇아 만들고 허물고 다시 만들면서
너보다도 더 사나운 발길질과 주먹질로 할퀴고 간
역사까지도 끝내는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다
2005-09-09



강(江) / 신경림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2005-09-09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