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
1880년대의 파리의 예술동향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이었다.
상징주의는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구조적 갈등 속에서 탄생했으며 이는 서구 문화가 르네상스 이후 지향해온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에서 나온 태도였다.
상징주의의 뿌리는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탐구했고 이성중심의 예술에서 탈피하여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직관적인 느낌을 풍부한 색채와 보다 충동적이고 자유스러운 데생으로 표현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인 관념과 과학에서의 맹신에서 비롯된 기계적이 된 일상을 대신하여 감정과 욕망의 표현 감각과 꿈과 신화의 시각적 표현이 목적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미학적 한계점인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의 단순한 시각화는 신화와 몽상의 주제로 바뀌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인상주의에서 결여된 인간의 조건과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는 미술은 부활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상징주의 문학이 먼저 대두되는데 보들레르는 correspondence의 소네트에서 향기, 소리, 색채는 감각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전달한다고 했다.
보들레르는 미술은 눈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이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상상력에 의해 표현된 미술은 본질적인 내적 실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은 상징주의 문인들은 대중적 물질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의 관습적 질서는 예술을 파괴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묘사보다는 감정의 강렬함을 묘사하는 단어로 선택했듯이 화가들 역시 자연을 모방 해야하는 부담에서 자유롭게 되어 색채와 선 , 형태로 보다 광범의한 미적 감각을 시사할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 이집트, 원시미술, 중세, 근동, 그리고 민족미술의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 보다는 직관과 감정에 의론해서 감각의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감정과 내재된 관념을 찾으려 했다.
점차 비물질적 세계를 동경하고 개인적인 충동과 경험을 중시하여 도덕성을 개의치 않고 더 내성적이고 탐미적으로 혹은 데카당 하게 되었다.
고갱이 상징주의의 리더로 떠오른 이유는 회화의 독자적인 언어인 형태와 선, 색채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고 그런 점에서 그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상징주의의 기수가 된 것이다.
초기의 상징주의 화가들은 독자적인 회화를 찾지못하고 전통적인 상징의 형태와 문학적 또는 신화적 주제를 탐구했다. 귀스타프 모로, 퓌비드 샤반느, 오딜롱 르동이 주요 상징주의 화가들이며 이들은 주제에서는 변화를 추구하나 형태, 색채등에서는 아직 전통적인 고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형상에 치중했으나 아카데미즘의 진부함에 빠지지 않과 신화나 원형 내면의 세계를 강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나타내려 했다. 이들은 특히 Fomme Fatale의 이미지를 담은 여성을 표현하여 다소 시대적인 남성중심사관을 나타냈다. 모로의 [살로메]등이 대표적인데 여성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리가 강해지는데 대한 거부감이자 나약한 남성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모로는 이외에선 상징주의 작가들의 전형이 될만한 작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양식을 샤세리오로부터 전수 받았다.
그러나 문학 철학 고고학 신지학등의 관심에서 비롯된 전부는 그의 회화에서 정교하고 이국적인 신비의 분위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올페우스]는 그의 첫 살롱 출품작으로서 고전의 전형에도 분위기가 주는 죽음, 고통은 상징주의를 대신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상징주의 작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퓌비드 샤반느는 일상사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이상화된 고대의 옛 문명을 상기시키며 따라서 아카데미시즘의 틀 안에서 새로운 미술 개념을 소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인 화가들은 전통적 상징을 사용하고 있으나 르동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르동의 미술은 꿈과 상상 무의식의 신비의 세계이며 작가 자신에 의해 창조된 이미지가 사용되어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상징주의자였다.
모로 Moreau, Gustave (1826.4.6~1898.4.18)
|
|
샤반느 Pierr puvis de Chavanes (1824-1898)
모든 확실한 개념에는 그것을 옮길 수 있는 조형적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개념은 뒤죽박죽이 고 혼탁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면의 눈에 순수한 상태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엉킨 것을 풀어놔야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술작품은 알 속에 동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혼란한 감정속에서 태어나며 이러한 감정세계에서의 사고를 그것이 눈 앞에 확실하게 나타날 때까지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가능한 한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 다음 그것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장면을 생각해 낸다. 이야기 중심의 내용보다 시각 언어에서 받은 분위기 추구하였으며 회화의 주제를 근대적인 것과는 딴판으로 기독교적인 것, 고대 향수의 우화적인 요소에서 따오기도 했다.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듯한 부동의 포즈와 그것을 감싸는 차분한 그리고 때로는 단조로운 색채, 화면의 평면성과 그 속에 자리잡은 단순화된 형태, 명상적인 리듬을 타고 큼직하게 잡힌 구도 등, 요컨대 자연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등의 그의 상징주의 그림의 특징이다. |
|
르동 Odilon Redon(1840-1916)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이라는 색판화에 대해 "제목이란 모호하고 불확정적이고 혼란스럽고 애매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 그의 작품은 1880년대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거의 석판화, 에칭, 목판화였다. 사람얼굴을 한 곤충이나 꽃, 떠있는 눈, 잘려진 사람 얼굴, 꿈 환상에서 볼 수 있는 홀린 것 같은 형상이 등장하여 소위 '공상적 주관성' 이라 칭해졌다. 1898년경부터 양식적 변화가 시작되었는 데 흑백 대조가 밝은 색채로 대치되었으며 파스텔, 수채화등을 사용하고 신화와 종교적인 주제, 꽃 등 낙천적이고 즐거운 환상의 세계표현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시작을 르동으로 보는 이유는 "나의 독자성은 가능하다면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는 법칙에 적용시켜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과 같이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그의 주장 때문이다. 르동의 환상적 세계는 뿌리없는 황당무계가 아니며 그의 환상의 씨앗은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었다. 그는 무의식을 중시하였으며 환상적 상징적 세계의 조형적 실현을 하였다. |
|
앙소르 James Ensor (1860-1949)
보쉬와 브뤼겔의 후예답게 괴기하고 환상적이며 풍자적인 그림을 그린 그는 거미, 조개, 박제 동물, 해골인간 등 동화이야기를 상상력으로 결합시킨다. 그는 인간의 허위와 도덕성의 문제 환기시키고자 하였으며 급격한 산업화에 반대하여 순수한 사회를 동경했다. 이러한 현대적인 종교화에서 시니컬하고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반영됨을 볼 수 있다. |
뭉크 Munch, Edvard (1863.12.12~1944.1.23)노르웨이의 화가. 뢰텐 출생. |
야수파
"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의 전시를 보고 '야수들 사이에 있는'라고 하는데서 용어가 유래되었으며, 야수파의 대표작가 마티스는 '수단의 순수함으로 복귀하려는 용기,이것이 바로 야수파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야수주의는 급작스럽게 태어났다기보다는 인상주의적 감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보다 강렬한 감동에 대한 목마름에서 출발한다.
중류계급의 고상함과 아카데믹한 꾸밈 그리고 암시적이지만 모든 것을 숨기는 아르누보적 우아함등의 판을 치던 시대에 마티스,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죠르주 루오, 라울 뒤피 및 군소 작가들은 대담하고 다시의 화면에서 거의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한 표현을 위해 직접성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야수파들은 세기말적인 슬픔과 내성 그리고 상징주의 문학의 탐미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인상주의의 직접적이고 기쁨에 찬 자연의 포옹을 재생시키는 한편 후기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는데 만족했다.
이들은 모두 색채를 이전의 낡아빠진 묘사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야수파는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의 색채를 통해 표현적 감정적 힘을 표현하고 과거의 전통을 깨는 것이다. 야수파는 넓은 추상적 색면을 중요시하여 묘사적 기능에서 조형적 자유를 추구했다. 따라서, 넓은 색면을 점차 추구하여 장식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세잔의 색면과 다른 것은 세잔은 보다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그 의미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색채 사용이 고흐의 고정을 계승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야수파는 양식적인 변화에 주력하여 내용보다는 형태왜곡, 추상적 색채가 패턴화된 화면이 형태를 이루고 그림은 장식화된다. 일종의 조형적 표현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야수주의의 형성에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뉠수 있는데 파리 국립 미술학교 귀스타브 모로를 중심으로한 마티스, 마르케, 망갱, 퓌이, 샤투파로 알려진 블라맹크,앙드레 드랭 그리고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에츠.뒤피,브라크이다.
야수파 화가들은 반고흐와 고갱의 작품 속에서 예술의 본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야수파의 색채의 항연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1904년과 1906년에 전시된 세잔느의 회고전이 야수파 화기들의 전향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야수파 화가들은 강한 개성과 기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화가들이었다. 야수주의의 일관된 특성을 추출해 내기란 매우 힘든데, 이론가와 이론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색채의 강렬함이다. 오직 순색조에만 의존하고 각 색조간의 직접적인 대비,거친 터치,종래의 투시법, 양갑, 명암법을 무시하고 색조의 뉘양스,전조를 묵살한다. 또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표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주의는 명암과 광선의 효과를 색채에 의해 묘사하려 하였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색채 자체에서 광선이 배어 나오기를 원했으며 광선이 색채의 조화 및 광휘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야수주의 1907-1908년 주요 화가들의 관심이 색채로부터 입체감,양감,중량감,선으로 바뀌어지면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드랭과 블라맹크의 작품은 1908년 부터 색채가 어두워지고 구조적으로 변하며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유지했던 화가는 마티스와 뒤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티스 Matisse, Henri (1869.12.31~1954.11.3)프랑스의 화가. 북(北)프랑스의 카토 출생. |
|
드랭 앙드레 드랭은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파리의 작은 화실에 다니고 있었는 데, 그는 마티스의 매우 실험적인 작품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 후 마티스와 고갱의 작품을 감사하면서 고갱이 추구한 화품, 즉 전통적인 원근법을 없애 버리고서 화면을 응축시켜 장식적인 단위가 되게끔 한 것을 보고 그의 작품의 기풍을 확립하게 된다. 타오르는 강렬한 빨강, 초록, 노랑의 풍경화를 전시하면서 자연적인 외양에 의존하지 않고 상상력에 기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1905년부터 그는 볼라르가 의뢰했던 템즈간 시리즈에 열중하였으며 다양한 빛의 특질과 떠도는 안개의 짙고 옅음을 날카롭게 표현했는 데, 블라맹크와는 달리 개성과 주관이 합치된 인상파의 재해석쯤으로 이해하면 좋다. 또한 위의 작품에 임할 때의 그의 색채에 대한 표현은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조화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이후의 드랭은 야수파의 표현은 아니었다. |
|
블라맹크 특히 블라맹크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멋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원시적인 충동과 물결치는 색선과 강렬한 색채들을 이용한 충동적 작품을 남겼다. 그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그의 회화와 조각에 결정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1906년 앙데팡전 이후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물감이 회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제 선택과 구성은 확실히 인상파에서 연원하고 있으며 실로 그의 구성요소의 배치방법은 피사로와 인상주의와 매우 가깝다. |
입체파(Cubism)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 입체파의 탄생
“자연을 원통형·구체(球體)·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 “색채 속의 면(面),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 《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構築的)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球體)·삼각추(三角錐)·원통형·입방체(立方體)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立體:Cube)란 최초로 비평가인 R.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奇矯)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브라크).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明暗)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데 에브로의 에스파냐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直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2. 분석적 입체파
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非構成)’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 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顯在)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 그 자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 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 존재로서 정착시킨 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
3. 종합적 입체파
1912년 입체파는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지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입체파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 팡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파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입체파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靑騎士)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파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파에서 종합적 입체파로의 전환에 미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사실 J.그리스의 경우 후년의 피카소, 브라크에 비하여 입체파에 몸바친 경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입체주의자로는 보통 슐레머, 바우마이스터를 들고 있다. 운동으로서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
피카소 1920년대부터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피카소는 입체주의 그림과 장엄한 고전양식의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신고전주의적 기법의 드로잉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내었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작품 또한 아주 다양한 데 다소 해학적인 대규모 조각과 함께 초현실주의 조각도 제작 하였으며 <게르니카> 같은 갈등의 이미지들을 그렸는가 하면 평온한 아름다움을 주는 섬세한 에칭과 축제분위기로 가득찬 장식회화도 제작하였다. 1947년부터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대부분 자신을 풍자하는 작업을 하였다. |
|
후앙 그리 피카소와 브라크 외에 이들의 큐비즘 미학을 이들보다 오히려 대중에게 잘 전달했던 작가로서 후앙 그리가 있다. 그는 1912년 경에 분석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주고 큐비즘 운동이 약해지기 시작한 1914년 경에 종합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준다. |
|
레제 레제는 입체파 미학을 기계미학의 추구(운동감)를 위해 도입한다. (인체를 튜브형태로 묘사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을 "튜비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
|
들로네 들로네는 1909년 경의 에펠탑 연작에서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지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에 그려진 <창>시리즈와 <해, 달>연작에서는 비구상 계열의 순수 색채 회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뽈리네르는 들로네와, 또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보여준 쿠프카나 피키비아 등의 작품경향을 일컬어 <오르피즘>이라 부른다. ) 오르피즘은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말로 (자신의 싯구에도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색채의 율동성과 색채의 프리즘 효과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오르피즘은 그래서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혹은 순수색채적 큐비즘이라 불려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