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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린이책 공부

어린이와 문학 겨울 토론회를 하고 나서

작성자이야기밥|작성시간09.01.12|조회수184 목록 댓글 0

 

 지난 1월 9일 <어린이와 문학>에서주최한 겨울 토론회에 참여하고 나서 몇 가지 숙제를 얻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앞으로 십년을 주기로 놓고 천천히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해야만 하는 그런 일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내가 얻은 숙제는 다음과 같다. 이건 꼭 나만의 숙제라기 보다는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각자 해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1) 아래 발제문은 나중에 참고하기 바라고, 일단 이 발제문을 읽고 나서 뒷풀이 시간에 김환희 선생님이 신화가 작동하는 시공간을 창조해내는 그러한 실제 예가 되는 작품이 한국이나 외국에서 있느냐. 그런 작품의 예를 들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달라 하였다. 나도 당장 이런 저런 작품을 예로 들기는 어려운데, 아래 발제문에서는 <어느날 오로지는> 한 작품의 예를 들어 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더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마법과 신화의 마법이 서로 맞서고 기대고 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서사가 만들어지고, 그러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에서 감동도 생겨날 것이다. 이걸 주제로 해서 앞으로 또 다른 글을 좀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튼 문제 제기는 고마운 일이다.

 

 2) <마법사 똥맨>과 같은 작품을 교사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권해 주기가 껄끄럽다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역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근대 제도권 교육 안에서 살아가는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생겨나는 많은 갈등도 또한 자본주의 마법을 강요하는 선생님과, 아직도 원시적인 신화의 마법이 몸에서 하나의 에너지로 작동하고 있는 아이들 사이의 치열한 싸움판, 이게 곧 학교 현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어떻게든 그려내고 거기에서 근대 제도권 교육의 문제를 밝혀내고 거기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보는 자리로 계속 옮겨가며 치열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재미있는 숙제를 얻었다. 비평글을 쓸 수 있는 하나의 문제를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을 두렵게 하는 마법사 똥맨과 같은 작품들이 지금 과연 얼마나 있는가도 찾아보면 좋겠다. 학교를 시공간으로 해서 다루어지는 많은 작품들 속에 작동하는 교사와 학생과 근대 교육체제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한 검토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것도 역시 신화의 마법을 중심으로 하는 탈자본의 상상력, 기존의 경쟁교육, 일등주의 교육, 지적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학벌주의 주술이 작동하는 근대 교육 현장에 대한 치열한 비판적인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역시 이 문제도  흥미로운 숙제이다.  

 

 3) 논픽션 문학에 대한 공부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이 문제도 고민을 해 봐야 겠다. 결국은 창작이다. 논픽션 문학에 관심을 가진 글쓰기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몇 사람이라도 찾아서 실제 글쓰기와 연구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체력이다. 과연 내가 이런 모임을 해 나갈 체력이 될까도 생각 중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론 체력보다는 사랑일 것이다. 논픽션 문학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부족하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4) 출판 대안운동 이야기를 잠깐 하였는데, 사회를 보는 장주식 주간이 출판 생협운동 이야기를 하였다.이것도 좋은 이야기이다.하여튼 출판 운동쪽으로도 무언가 대안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지금 당장은 하기 힘들다. 앞으로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좋겠다. 무언가 탈자본의 신화적인 상징이 통하는 실제 시공간을 창조해내야 한다. 그게 중요하다.

 

아래는 토론회에서 발제한 글이다. 일단 여기 옮겨 놓는다. 여러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다.  

 

 


 탈자본의 신화적 상징이 작동하는 어린이문학 운동의 길 찾기


 1


 지금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성장이 후퇴하면 그대로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성장 신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계속되는 성장과 발전이란 패러다임은 결국 자연이 감당해내기 힘든 극점에 이르고 말았다. 자연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하다가 언젠가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이르는 그 지점에 우리는 벌써 들어서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는 누가 보더라도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떻게든지 이윤율의 상승을 통해서만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데, 이윤율의 상승이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파괴와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하자 요즘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에 버금가는 야만적인 파괴(비정규직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같은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를 통해서 이윤율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사회 전체가 달려가고 있다.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사람들의 내면 심리에 늘 일종의 도박 심리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좀더 자본을 늘리고 선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고, 결국 그런 경쟁이 하나둘 겹치고 확대되다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개인의 욕망은 더 커지고, 회사나 기관의 욕망도 계속 확대되는 것이니 두 욕망이 모여서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극점에서 욕망의 풍선은 터지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에서 벗어나는 탈자본의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자본을 함께 나누며 공생하는 신화적 상징이 작동하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안을 지금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깊이 있게 논의를 해 보아야 한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 발전과 더불어 대중의 관심을 받는 대중문예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대중 문예가 된다는 건 달리 말하면 문학이 시장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오덕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았을 때, 지금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한 가지 아주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오늘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훼손된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 아동문학은 양적인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 못지않은 그림자도 드리우고 있다.

 90년대 이후 아동문학 판이 대중문예의 길을 걸으면서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고,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돌아보며, 우선 우리 내면에 쌓여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우리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쟁점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 토론회는 이런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2


 며칠 전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이란 책을 놓고 동화 공부하는 사람들과 인터넷 채팅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이 토론을 위해 읽은 책에 아, 여기에 바로 아동문학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19세기 막바지인 1870~80년대 당시 북미지역에서는 대륙횡단 철도가 놓여지고 버팔로 사냥꾼들이 들소 떼를 죽여 새로운 기관차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단다. 이때 버팔로를 마구 살육한 또 하나의 목적은 들소 사냥을 하던 인디언들의 식량을 빼앗아서 그들을 인디언 보호 거주지역으로 몰아넣으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인디언 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내면의 신비체험을 중시하는, 환상적 경험을 강조하는 종교가 유행을 하게 되었단다. 이런 종교의 유행은 버팔로의 살육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이 참 궁금하였다. 버팔로의 살육과 내면의 환상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종교가 유행을 한 것이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상상력이 개입하고 있었다. 

 어느 원시부족들이나 마찬가지로 인디언 부족들도 종교적으로 유지되던 그들의 사회질서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던 동물계와의 관계를 아주 중요시했단다. 버팔로는 그들에게 종교적으로 먹이를 공급해주는 일종의 조상신과 같은 중요한 상징이었는데, 그 상징이 강요된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살육을 당하고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팔로라는 종교적 상징이 사라지자 그들이 믿었던 종교는 갑자기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종교적 상징이 사라지자 인디언들은 결국 사회와의 건강한 소통의 통로를 잃고 내면으로 자꾸만 칩거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환각제를 통해 환상을 경험하며 심리적 구원의 수단을 얻는 피요테 종교, 메스칼 종교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신화적 상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에너지를 깨워 상징이 작동하는 현실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신화적 상징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관리하는 하나의 통로로  사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선생님의 구실을 한단다. 그런데 사회 집단이 제공하는 상징이 효과가 없고, 또한 그러한 상징이 그 사회집단의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은 분열되고, 혼란을 겪으며 상징의 병리학이라 할 만한 것에 직면하게 되어 결국은 환각제에 의존하는 방법으로 내면의 구원 수단을 삼는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위 책. 110~112쪽 참고)

 

 동화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린이를 위한 신화이다. 그러니까 동화 작가는 아이들이 사는 현실의 삶 그 어느 곳에,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상징이 작동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징이 작용하는 시공간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곳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사회와 건강한 소통의 길을 찾지 못하고 내면의 세계에 칩거하는 삶을 살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신화의 상징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3


 이번 토론 글을 준비하면서 올해 나온 어린이 청소년 작품들을 쭉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작품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오늘 우리가 처한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이 빚어내는 삶의 모습을 풍자하고 비판한 작품이 눈에 띄어 그 이야기를 먼저 해 보기로 한다.


 <어느날 오로지는>이란 작품을 보니까 원시 자연의 시공간에서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던 오로지가 극도의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하는 자원사냥꾼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었다.

 원시자연의 기운을 가진 샘물을 마신 자원사냥꾼들은 모두가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져 갔다. 그러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 왔다. 납작해진 사람들은 납작해진 얼굴을 감싸 쥐고 통제 칩이 시키는 대로 유령처럼 거리를 해매 다녔다. 몸은 점점 납작해지는데 통제 칩이 시키는 대로 허우적대며 자원사냥꾼의 삶을 살아가다 북풍 속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버들어머니가 나타난다. 이 버들 어머니가 빙그레 웃더니 두 팔을 높이 쳐들자 지금까지 불던 바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센 바람이 불어 자원도시를 모두 날려버렸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바로 이 자원도시는 오늘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토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맞아 신문에 실린 신년 대담 글을 읽어보았다. 월러스틴 교수가 오늘의 자본주의 문제를 진단하는 말을 여기 옮겨본다.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앞으로 20~30년 안에 안정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지고 다른 종류의 세계체제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썼던 글들에서 수차례 설명한 얘기이지만, 자본이 부담해야 할 세 가지 기본비용은 인적 비용과 투입 비용, 과세 비용이다. 모든 자본가들은 꾸준하게 상승하는 이 세 가지 비용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비용 부담이 너무 많은 데 반해 생산으로 얻을 수 있는 잉여가치는 너무 줄어든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가 균형 상태에서 과도하게 이탈해 일시적으로라도 다시 균형상태로 회복할 수 없게 됐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체제보다 나은 체제나, 또는 더 나쁜 체제를 갖게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한겨레 신문. 1월 1일. 8면)


 그렇다. 이제 이 자원도시가 상징하는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는 결국은 대체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오로지는>이란 작품에서는 이 자원도시가 새로운 체제로 대체되는 신화적 상징의 대상이 아쉽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원도시가 일거에 바람에 의해 날아가는 일종의 멸망, 종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 다음에 오로지가 죽음의 긴 터널에서 깨어나 다시 원시 자연의 상태가 회복되는 결말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 자본주의 이후 체제에 대한 새로운 상징의 시공간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언가 자본주의 마법과 신화적 마법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전체성을 회복하는 탈자본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시공간이나 인물이 드러나지 못하였다.

 자원도시의 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동화가 결국 끝에 가서 책을 덮고 났을 때는, 새로운 상징에 대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내면으로 도피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역설의 논리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마법과 신화적인 마법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서사가 발생한다. 이게 곧 판타지 문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동화 문학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신화적 상징의 발견과 창조가 중요하다. 동화는 상징 작용의 힘을 갖고 있고, 그 상징이 작용하는 시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 곧 글쓰기라 할 수 있겠다.

      


 4

 

 얼마 전 창비와 보리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홈쇼핑에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아동문학과 출판의 상황을 놓고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오덕, 권정생의 문학을 놓고 볼 때, 이전 아동문학은 분명 오늘 우리 상황과 다른 점이 하나가 있었다. 이오덕, 권정생의 문학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아동문학 판에는 탈자본의 상상력이 살아 있었다.

 탈자본은 자본을 반대하는 반자본과는 다르다. 탈자본의 길이란 자본의 독점이 아닌, 자본을 함께 나누는, 자본을 나누어 조금씩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길에 서면서 공생하는 삶의 길을 말한다.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는 자본을 나누고 함께 공존하는 적어도 탈자본의 상상력, 자발적 가난의 상상력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상징으로 우리의 무의식에 존재하였던 창비와 보리 같은 출판사들이 홈쇼핑 시장에 책을 내다 팔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아, 무언가 건강한 상징의 대상을 하나 잃은 기분이 들었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어린이와문학협의회, 글쓰기 연구회, 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운동 단체들이 2000년대 이후 들어서면서 건강한 상징의 힘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200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이들 출판사와 단체들은 실제 우리에게는 하나의 상징의 효과를 발휘하는 대상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실제 상징의 효과를 발휘하던 대상이 마치 버팔로가 살육을 당해 갑자기 사라지자 상징의 병리학을 앓게 되었던 옛날 사람들과 같이, 나 또한 상징의 대상이 힘을 잃어가는 경험을 하면서 그렇다면 우리 아동문학 판에 어떻게 새롭게 탈자본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을 재발견하고 창조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답을 놓고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중에,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자본이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 내면의 문제를 더욱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이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징의 대상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오덕, 권정생 문학 이전까지는 탈자본의 상상력을 갖고 함께 공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상징의 대상들이 존재해 있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대중문예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아동문학은 양적으로 성장을 한 면은 있지만, 결국은 자본의 논리에 훼손되면서 탈자본의 상징 대상을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경쟁과 자본의 독점만을 추구하는 성장신화에 갇혀 상징의 병리학을 앓고 있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렇다면 상징의 대상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 것인가. 상징의 대상을 회복한다는 건 다시 말하면 세계관의 문제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한 작품이 얼마나 치열하게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가를 맨 앞에 놓고 논의하는 비평정신의 회복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비평정신이 작동하는 문학 시스템에 대한 실제 대안을 우리는 지금 찾아봐야 한다.

  

 5


 얼마 전 <어린이와 문학> 월례 토론회에서 김은영 선생이 사회를 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주례사 비평이란 말이 한 때 유행했는데, 요즘은 전속비평가란 말이 또 유행이란다. 그 말을 들으면서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다. 비평가나 연구자, 독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어느 출판사나 조직, 학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이 열심히 문학공부를 하고, 운동도 하고 하는데, 결국은 교묘하게 얽힌 보이지 않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출판사나 조직의 영업을 위해서 뛰는 영업사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 차원의 임무를 맡은 정식 영업 사원이야 상관이 없겠지만, 연구나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결국은 인맥과 조직의 그물에 갇혀 결과적으로 영업을 위해 뛰는 논리를 개발하고 자기들만의 자본과 권력의 아성을 쌓아간다면 그건 좀 문제이다. 전속 비평가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고, 이게 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현상이라 보면 좋을 것이다.


 출판사와 관련을 맺으면서 기획위원이나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는 운동 조직과 관련을 맺고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조직이나 출판사에서 실무 일을 맡아 뛰는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 소개하는데 일조하는 건 좋은 일이다. 당연히 그런 일은 누구든 맡아서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획편집자의 자리에 설 때와, 비평가의 자리에 설 때는 좀 구별을 하는 자기 내면 무의식의 심층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만든 책,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일에 대해서도 비판과 풍자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비평가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획자의 자리에 있을 때와 비평가의 자리에 설 때를 구별할 수만 있다면 그런 전속비평가란 말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속비평가란 출판사의 영업을 위해서 뛰는 영업사원 비평가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하여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고, 이것도 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는데서 생겨나는 하나의 현상이니 그러려니 하자. 그런 현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없어지는 문제도 아니고, 그걸 억지로 없애려 든다고 한다면 그 또한 내 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티만 보는 행위로 역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전속비평가란 말이 갖는 문제점은 짐작이 가는데, 그렇다면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런 전속 비평가가 설 수 없는 판을 열어 난상 토론을 유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지속적인 쟁점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 만들기가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어린이와 문학>에서 달마다 하는 월레토론회나 연수, 강좌, 세미나의 온갖 형태들은 바로 이런 기능을 담당해야만 한다. <어린이와 문학>이 바로 이런 치열한 담론토론이 가능한 신화적인 상징이 작동하는 시공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 권력, 탈자본, 탈영토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잡지매체는 늘 존재해야 한다. 어린이문학 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서 출발한 <어린이와 문학>같은 잡지는 그래서 오늘과 같이 자본의 독점을 꾀하기 위해서 무한 경쟁을 내세우는 마당에 더욱 존재 가치가 있다. <어린이와 문학>이 출발할 때 권정생 선생님이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때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이 기억난다. 출발이 참 좋다는 것이다. 아동문학하는 사람들이 돈을 냈다는 건, 스스로 자발적 가난의 길을 걸었다는 걸 상징하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의 길이란 물론 하나의 상징이다. 빈곤한 삶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도 비판의 화살, 풍자의 화살을 날리는 탈 권위, 탈 권력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일종의 상징의 약속이다. 우리는 지금 앞에서도 많이 말했지만, 아동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신화적인 상징의 공간이 작동하는 시공간을 어떻게든 현실 삶의 곳곳에 창조해내야 한다.


6


 앞에서 출판사 이야기를 잠깐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언가 관념의 이론에만 그칠 게 아니라, 실제 대안을 찾아서 몸으로 살아봐야 할 때이다. 얼마 전에 출판업에 종사하는 분의 이야기를 잠깐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예전하고는 달리 책을 찍어내서 출판사에서 최소한의 이윤을 남기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일단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든다는 것이다. 초판을 다 찍어서 팔아도 기본 비용이 안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요즘은 이윤은 고사하고 출판사의 생존 자체를 놓고 힘겹게 싸워야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보다 먼저 아동문학이 대중문예의 길을 걸어,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면서 아동문학 판이 양적으로 성장을 해 온 일본의 아동물을 둘러싼 출판시장을 일본 사람들은 한마디로 겨울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얼마 전에 우리 아동문학이 처한 문제점을 생각하다가, 혹시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아동문학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떤 대안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일본의 아동문학현장에서 오래 동안 활동을 한 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이 경제 위기를 겪은 지난 1990년대 이후에 아동문학 하는 사람들이 이 자본의 논리와 아동문학의 관계를 놓고 어떤 치열한 쟁점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느냐, 그런 예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이런 질문을 해 보았는데, 일본과 같이 아동문학 연구가 활발한 나라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인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실제 예를 찾기가 힘들었다.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김영순 선생을 통해서도 물어보았지만, 역시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의 아동문학가들도 시원한 답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어서 물어본 질문이 있다. 90년대 이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일본 아동문학을 둘러싼 출판 문학 환경이 겨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때 <일본 아동문학> 잡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동문학의 어떤 문제를 놓고 치열한 쟁점 토론이나, 대안을 찾는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도 아쉽게도 <일본아동문학>이란 잡지에서는 작품이나 어떤 중대한 쟁점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이 또한 놀라운 답이었다.


 어쩌면 지금 일본 아동문학 판이 겨울의 시대를 맞이한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문제가 물론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에서도 오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 원인의 한 면에는 일본 아동문학가들이 이제는 긴 운동 기간을 거쳐 오면서 각자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더 이상 타자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그림자를 건드리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토론의 풍토를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들이 지금 겨울의 시대를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 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작품이 나오고, 더 많은 연구 내용이 발표되고, 외국의 이론을 번역해내고 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일본 아동문학 현장의 모습에서 참고해 볼 점은 있다. 각자 자기 영토의 자리에서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러한 연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치열한 담론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는 쟁점토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쟁점 토론의 장을 <일본 아동문학>과 같은 오랜 운동의 역사를 가진 잡지가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러한 역할을 하는 신화적인 공간을 일본 아동문학 판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경우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론 가야할 것이다.


 7

 

 오늘 토론회에서는 무언가 실제 대안이 되는 길을 제시해 보면 좋겠다. 앞에서 출판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렇다면 자본의 논리에 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출판구조에서 벗어나는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하는 대안출판사의 존재도 필요하다. 자본의 확대 재상산을 위해 굴러가는 출판의 논리를 한 번 더 뒤집어서 자본의 확대 재생산보다는 자본을 공동선의 목적을 위해 쓰는 사회주의방식의 출판사에 대한 대안도 한번 꿈꾸어 볼 수가 있다. 자본주의 유통구조나 선한 소비 운동의 형태를 통해 책을 팔되, 거기에서 나오는 이윤을 아동문학동네를 위해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권정생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혀서 받은 인세이니 그 인세는 어린이들의 삶을 위해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며, 인세 전부를 북녘 어린이들의 삶에 쓰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 개인의 숭고한 헌신에 기대는 수도 물론 있겠지만, 여럿이 함께 참여하는 아동문학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린이의 삶에 기여하는 방법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꼭 이윤을 남겨야만 굴러갈 수 있는 출판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을 나누면서도 굴러가는 형태의 출판운동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런 발상을 해 보면 어떨까도 싶다. 이런 발상은 물론 이미 출판동네에서 다 실험을 해 본 것이니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아동문학 판에서는 아직 이런 실험이 이루어진 적은 없지 않나 싶다.

 

 자본을 나누는 출판운동을 하는 데는 꼭 자본이 당장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일예로 어느 작가가 대안출판운동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원고를 하나 써서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원고를 갖고 일반 아동문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을 공모하는 것이다.

 이런 원고가 있으니 여기에 얼마의 돈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최소한의 비용을 독자들에게 도움을 받아, 일단 책을 만들어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책이 일단 초판의 부수에서 소화가 되었다고 하면 책을 만드는데 든 비용은 다시 돈을 낸 독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만약에 책이 더 팔려서 최소한의 이윤이 남는다면, 그 이윤은 탈자본의 상상력, 자발적 가난의 길을 걷는 방식으로 다시 재분배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어떤 새로운 운동에 쓰일 수도 있고, 힘든 사람을 돕는 일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출판 상황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러한 어려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너무나 한 가지 자본주의 유통의 방식으로만 모든 출판의 논리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러한 출판 대안운동이 일어난다면 규모는 아주 작은 출판의 형태를 유지할 수가 있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인세를 받아 생활하는 것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 아동문학이 더 이상 발전해가기 힘든 데에는 출판 편집자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한 자기 존중감이나 희망을 갖지 못하는 데서도 원인이 있을 수가 있다.

 한 권의 책을 내고 나면, 그 책이 자본의 경쟁을 유발하는 유통시장에서 팔려서 최소한의 이윤을 창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극도의 이윤을 추구하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 그래서 편집자는 책을 끊임없이 이윤을 창조하는 상품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접근할 수밖에 없는 삶을 강요받는다.

 

 그러니까 주어진 시간 안에 자본의 순환을 위해서 책은 일정량을 내야만 하고, 그러한 책을 내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가 담긴 책을 만들어내는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판에 종사하는 편집자들은 늘 소모적인 시간의 톱니바퀴 안에서 굴러갈 수밖에 없다. 편집자들이 자기 공부를 하며 토론을 즐기고, 거기에서 작가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원고를 다듬는 그러한 절대 시간의 과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유명 팔리는 작가에게 편집자들은 더욱 집착을 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작가 나름대로 한 작품을 쓰고 나면, 편집자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토론을 거치면서 자기 검토의 시간을 가져도 좋겠는데, 이런 절대 시간을 누릴 편집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 또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빠른 시간의 싸움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톱니바퀴 구조에서 느린 시간의 속도를 즐기면서도 책을 만들어내는 탈자본의 신화가 작동하는 대안출판사가 이제는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대안운동을 하는 출판사들이 하나가 아닌 다중의 중심으로 도처에  존재한다면,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면서 쌓은 여러 가지 전문지식을 오히려 나중에 나이가 먹으면서는 대안출판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접목을 하면서 편집자의 삶에 다시 새로운 비젼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안출판은 일종의 놀이로 얼마든지 해 볼 수가 있다. 긴 시간의 흐름을 갖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작업 자체가 모두가 참여하는 놀이판이 될 것이다. 작가가 한 작품을 써주면, 그 작품을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꼭 이 작품에 돈을 투자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원고를 읽게 하고, 그 원고를 읽는 과정에서 감동이 있으면 독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자본의 일부를 보내줄 것이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독자의 의견을 작가는 듣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의 작품이 독자와 소통하면서 그 시대 독자의 무의식에 작동하는 신화적인 공간을 다시 발견하는 기회를 작가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자가 보내준 돈으로 하나의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 냈을 때는 그 책이 태어나는 과정 자체가 빠른 자본의 회전이 가능한 시간을 요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자본주의식 독점의 형태와는 다른 매우 흥미로운 상징의 힘을 가진 책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한 책이 다행히도 많은 독자에게 읽힌다면 그 책이 가져오는 수익은 다시 공동선을 위하여 쓰면 된다. 자본의 독점을 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출판사는 스스로 가난의 길을 걷는다. 그렇기 때문에 출판사를 유지하는 기본비용은 많이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대안출판 공간을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 현실에서 상징이 작동하는 시공간으로 창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실제 대안이 작동하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앞으로 진지한 토론을 벌일 필요가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자본의 논리가 개입을 하면서 우리 아동문학 판은 양적인 팽창을 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다시 맞이할 십년의 시간을 하나의 주기로 볼 때, 십년 후의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아동문학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는 자리에 선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십년 전 당시 자본의 논리가 개입된 아동문학현장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고 난 다음에, 어떤 실제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을 실천하였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자본의 논리에 서로 얽혀서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는 자리에서 더 이상 치열한 논쟁이 없는 판을 유지하며 그냥 십년을 보낸다면, 또한 새로운 자본주의 대안 체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 어떤 운동을 하지 못한다면, 지금 일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 아동문학 판은 그야말로 혹독한 겨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자본의 독점을 지향하며 자본을 선점한 출판사들이, 교육산업을 앞세워 성장신화를 내세우며 회원을 모집하고 아이들에게 자사에서 만든 책만을 읽게 하여 다른 자본의 이입을 막는 폐쇄적인 자기 재생산 기반을 가진 일부 대형출판사들만 몇 살아남을 수도 있다. 

 결국 작은 군소 출판사들은 자본의 독점 논리에 굴복하여 책을 만들어서 다시 대형 출판사에 지형을 싼 값에 파는 일종의 하청의 단계로 전락할 위험성도 있다. 


 올 한 해는 매우 힘들 거라고들 한다.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가보라는, 새로운 실험을 해 보라는, 새로 태어나 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 신호를 거부하지 말고 즐겁게 맞이해야 한다. 그게 순리다. 생태계에는 다 바람처럼 한 시기 조류가 있는 법이다. 기운이 성하면서 어느 하나가 천하를 다 가지려 하면 스스로 존재 기반 자체가 허물어지며 힘이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계의 자본을 혼자서 다 먹어 치우려는 게걸스런 금융자본이라는 괴물이 그만 꽈당하고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자본을 독점하려는 기운이 너무 강해 결국 지구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고 말았다. 생태계는 전체성이 허물어지면 그만큼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고, 엄청난 혼란이 따르게 되어 있다. 힘들수록 어둠만을 보지 말고 빛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생태계 안에서는 다시 전체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자본의 독점에 맞서 자본을 나누는 탈자본의 상상력으로살아가려는 새로운 생명운동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명운동의 분기점에 서 있다.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탈자본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돈이 없어 안 되는 일은 없다. 사랑이 부족해서 안 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이렇게 믿는다. 


 8

 

 우리는 아동문학하면 창작의 영역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아동문학운동을 벌인 나라들에서는 아동문학의 영역으로 논픽션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만 하더라도 논픽션을 하나의 중요한 문학 장르로 여기고, 비평가들이 논픽션 작품을 놓고 활발한 연구와 토론을 하고 있다.


 청주에서 지역운동을 하는 한 분이 있다. 이 분이 한번은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였다. 만두 가게를 하나 열어볼 작정이라고 하였다. 웬 만두 가게를 하느냐 하였더니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였다. 손 큰 할머니 만두라는 그림책이 있는데, 자신이 그러한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만두 가게를 하나 운영해 볼 작정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노인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데, 노인들이 시간은 많은 데 일자리가 없어 너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인복지 운동의 차원에서 할머니들이 만두를 빚고 파는 만두집을 하나 차려볼 작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 손 큰 할머니 만두집을 차려서 그 가게에 가서 만두를 먹어보았다. 가게를 둘러보는데, 가게가 매우 흥미로웠다. 벽에 사진이 붙어 있는데, 그 사진에는 할머니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가게 방에 쭉 일렬로 앉아 만두를 빚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만두 빚는 사진 밑에는 할머니들이 작업하는 시간이 쓰여 있었다. 할머니들은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만두 빚는 작업을 하였다. 오전반은 아침에 모여 두 시간 동안 만두를 빚고, 오후 반 할머니들은 오후에 두 시간 동안 만두를 빚었다. 할머니들의 노동은 이렇게 하루 두 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빚은 만두는 가게에서 일반인들에게 팔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윤은 할머니들이 함께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메뉴를 할 수가 없어서 만두 종류는 김치 만두 딱 한 가지였다. 김치 만두를 쪄서 주기도 하고, 국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좋은 재료를 쓰고, 인색하지 않으니 맛도 좋고 가게 분위기도 좋았다. 


 이 세상에는 온갖 만두집들이 있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운영하는 이름난 만두 체인점들도 많이 있다. 자본주의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가게들이 많이 있는 것이고,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이러한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꾀하는 자본의 운영 형태만 너무나 비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생태계가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성장신화를 요구하는 세상의 한 편에, 이렇게 탈 자본의 상상력으로 운영하는 신화적인 시공간이 작동하는 공간이 함께 존재해 있어야 한다.


 문학은 바로 이렇게 실제 신화적인 상징을 몸으로 살아가며 우리에게 탈자본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여기에도 글의 옷을 입혀 아이들에게 읽혀야 한다. 이게 바로 논픽션의 영역이다.


 언젠가 책을 편집하는 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청주에 가면 할머니들과 같이 만두 가게를 하는 분이 있다. 그 분의 삶이 바로 오늘 우리 삶에 더불어 살아가는 신화적인 상상력을 제공하는 분들이니, 글쓰는 작가들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분의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써 책을 내는 작업을 한번 해 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나중에 편집자에게 들어보니 작가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창작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실제 삶에서 탈자본의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논픽션의 형태로 쓰는 작업에 대해서는 작가들이 별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논픽션 문학의 시대를 여는 아동문학운동이 지금 아주 절실하다. 논픽션 문학이 활성화되지 않을 때는 아동문학 판이 급격하게 재미만을 추구하는, 재미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대형자본의 먹이사슬 구조에 걸려들 위험성이 있다. 아니면 지식을 강요하는 학습물이 아동물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성장신화가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에서 문학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학습을 위주로 하는 교육산업은 점점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위기로만 볼 게 아니라 오히려 학습 교양의 대상물을 건강한 논픽션의 영역으로 다시 개척해 나가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논픽션을 하나의 문학영역으로 인정하며 거기에 비평과 연구를 통한 토론의 장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어느 시대든지, 특히 우리와 같이 분단 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늘 정치의 장벽과, 성의 장벽이 함께 존재하는 법이다.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제도에 대한 탐구를 요구하는 정치의 장벽과, 우리 내면의 은밀한 문제로 인식되지만, 결코 한 개인의 인간성의 문제가 아닌 제도가 강요한 측면도 있는 성과 사랑과 에로티즘의 문제, 가족주의의 문제도 이 자리에서 아동문학과 관련하여 토론을 해보면 좋을 것이다. 일단 십년을 한 주기로 봤을 때, 앞으로 우리가 열어갈 십년의 아동문학운동은 어느 길을 향해 가야할지, 큰 틀에서 논의를 한 다음에 그 길을 찾아가는 세부적인 각론의 치열한 토론은 이후  <어린이와 문학>에서 잡지 지면이나 토론회를 통해 계속 이어가면 좋겠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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