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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 놓으리라- 이건 무슨 말인가.

작성자이야기밥|작성시간10.12.05|조회수589 목록 댓글 0

1

오늘 예배를 보면서 명상한 내용이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로마서였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읽으며 묵상을 해 보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로마 12:1)

 

-몸을 산제물로 드린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가. 삶 속에서 이 산제물로 나의 몸을 드리는 체험을 어떻게 해 봐야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한참 묵상을 하였다. 내 몸이 산제물로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 몸이 새로운 사랑몸으로 옮겨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의 과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산제물은 결국 사랑몸으로 변하는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랑몸으로 변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영적예배의 순간이라 하는 것인가. 기도는 그러니까 내 몸이 사랑몸으로, 산제물로 변하는 일종의 영적예배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산제물, 사랑몸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이 아무개 목사의 로마서 읽기>에서 옮겨본다.

 

 예수님은 당신을 아버지께 스스로 바치신 분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그 분의 삶(과 죽음)은 온전한 능동과 온전한 수동의 완벽한 일치였다. 그러기에 아무도 그를 강제할 수 없었지만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 분의 일상은 다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것이었다.

 제단 위에 바쳐진 재물은 이미 자신의 몸과 함께 자유 의지를 신에게 바쳤으므로 더 이상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다. 자기 마음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생각하며 말하며 행동한다.(예수님도 바울도 숨지는 순간까지 언행을 멈추지 않으셨다) 이렇게 살아 있기에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이다.

 '살아있는 제물'이란 개념에는 모순의 통일이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주검과 같은 말이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갈. 2:20)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의 모습이다.(위책 198~199쪽) 

 

2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저주하는 순간 내 몸의 우주는 온전함을 잃는다. 전체성을 잃어버린다. 온전한 우주의 심리 에너지가 고착되지 않고 바람처럼 흐르는 과정에서 비판도 하고 토론도 하고 문제제기도 해야 한다. 이걸 잃어버리면, 비판이건 토론이건, 문제 제기건 아집이고, 고집이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래도 결국 부딪혀 봐야 한다. 수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해보지 않고 저절로 이런 경지를 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이런 경우를 겪을 때 분노없는 분노, 미움 없는 문제제기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지는 한번 터특했다고 계속 되는 것도 아니다. 그때 그때 날마다 새롭게 마음 속 우주는 변하는 것이니 늘 깨어있는 자기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늘 깨어있는 지금 현실에 직면하는 유머러스한 몸의 기운 또한 필요할 것이다. 실험 정신이 역시 중요하다. 무언가를 자꾸 현실에서 실험을 해 보아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쓰기의 실험을 자꾸만 해 보아야 한다.   

 

 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이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19~20)

 

-이 말씀은 또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이대로 살아봐야 하는가.

 우리가 원수를 갚을 수는 없다. 원수를 갚는다고 내가 힘을 쓰면, 그 힘은 말이 원수 갚는다는 핑계로, 정의라는 핑계로 나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결과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이번에 국방장관이 된 관리는 다시 북에서 총을 쏘면 비행기로라도 가서 폭격을 하겠다고 하였단다. 어쩌면 이럴까.

우리가 할 일은 주린 사람에게 먹을 걸 먼저 주어야 한다. 먹을 걸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으로 하여금 떼를 쓰게 하고, 먹고 마시게 하지 않고 먼저 폭탄을 떨어뜨리겠다고 위협을 하니 이땅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저런 사람들을 두고 보는가.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명박 정권의 사람들은 이런 성경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하나님깨서 진노하심이 있을 것이니'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 말씀은 온전한 전체성, 사랑을 잃어버린 목숨(개인이건 단체건간에)은 결국 안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 아닐까. 무너지고 죽는 것도 어찌보면 마땅한 일이다. 때가 되면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 놓는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상대의 머리를 태워버린다는 뜻보다는 그를 부끄럽게 한다는 뜻으로들 읽는다고 한다.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저 불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일까.

 

 -머리 위에 쌓인 숯불은 그렇게 좋은 의미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된 모습이다. 올라가는 성질이 있는 불은 위로 올라가버리면 상대와의 교감이 없어진다. 내려와서 세상 만물을 비추고,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불은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숯불은 상대 원수의 머리를 어찌보면 태어버릴 지도 모른다. 사실 저런 원수의 머리는 숯불로 태워져서 이제 아래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가슴으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놓는다는 말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가. 가슴으로 내려와서 저 전체성을 잃어어린 존재가 하나의 산 제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우는 일종의 숯불이 된다는 말인가.

아,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사랑의 실천은 전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희생양의 산제물을 만드는 강력한 역설적인 의미의 불길이 되는 것이다. 그 불길에 한번 데이고 나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한 사람의 그림자 몸을 산제물로 만들어내는 강력한 숯불의 힘을 사랑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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