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들 사정이 있어 3명이 모여 점을 쳤다.
내게도 시가 찾아올까요? 라는 물음에는 택지취(췌)괘가 나오고,
매일쓰기가 동화쓰기에 도움이 될까요? 라는 물음에는 산뢰 이괘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마무리가 잘 될까요? 라는 물음에는 지화 명이괘가 나왔다.
이 괘를 놓고 경전을 읽어보았다.
먼저 산뢰 이괘를 중심으로 읽었다.
1
산뢰 이괘에서 이는 턱을 뜻한다. 이 턱의 상징이 흥미롭다. 턱은 가만히 보면 위는 고정되어 있고, 아래는 움직인다. 그래서 산뢰이괘에서, 산의 상징인 간괘는 멈추어 있다는 의미가 있고, 아래 진괘의 상징은 움직인다는 의미가 있다. 영락없이 턱의 상징이고, 입의 상징이기도 하다. 입으로 들어간 음식이 턱의 이러한 운동으로 씹어 삼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산뢰이괘의 의미는 무언가를 기른다는 의미, 배양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키우고 배양하는 때가 온 것이다.
동화쓰기를 물었다면, 지금 한창 키우고 배양할 때이니, 이런 기운이 내게 들어왔을 때, 나는 어떤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까? 이런 철학적인 물음, 이런 명상을 해 봐야 한다.
주역은 절대적으로 괘를 뽑은 다음에 일단은 경전의 원문 이해가 중요하고, 그런 다음에 이 원문을 내가 물어본 질문에 가져와서 계속 해서 내 몸과 내 삶을 살피면서 명상을 해 봐야 한다. 있는 그대로 나에게 물어보고 답해보고 하는 시간을 스스로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산뢰이괘는 아래로부터 보면 양음음음음양의 모습이다. 가장 아래와 위 두 양효 사이에 네 음효를 머금고 있다. 이 네 음효는 윗턱과 아랫턱을 중심에 두고 입안의 이빨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이빨이 음식을 씹어 삼켜 몸을 기르는 것과 같다.
아까 경전을 읽을 때도 타인이 배양하는 것(관이)과 스스로 음식을 구하는 것(자구구실)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 어려웠다.
단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관이(觀 頤)는 타자에 의해 그 길러지는 것을 보는 것이고
자구구실(自求口實)은 그 스스로 기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하, 그러니까 기르고 배양하는 때에는 늘 두 가지를 봐야 하는데, 하나는 타인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들을 잘 봐야 하고, 또 하나는 내 스스로 기르는 것을 잘 봐야 한다는 말이다.
한 존재가, 조직이, 나라가 길러진다는 것은 그 기르는 주체가 스스로 기르는 부분과, 누군가 스승이나 현자에 의해서 길러지는 부분 두 부분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부분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 싶어 한다. 내 스스로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를 봐야 하고, 또 하나는 밖의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어떻게 길러지고 있는 가를 보라는 말이다. 독불장군 식으로 혼자서는 기를 수가 없다.
우리는 배앙의 의미를 조금더 넓혀서, 우주적인 천지 만물의 배양까지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천지만물을 키우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산뢰이괘에게 동화쓰기를 물었는데 지금 상전의 말씀을 읽어보니, "군자가 이로써 언어를 삼가며, 음식을 절도있게 하느니라"(君子以愼言語 節飮食)이 부분에서 나도 아하가 온다. 나도 지금 책을 한 권 쓰고 있는데, 무수한 언어를 마구 뱉어내고 씹어먹고 하고 있는데, 언어를 삼가서 절실한 말만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쓰기와 동화 쓰기도 분명 다 도움이 될 것이다. 단 무언가 음식을 씹어 먹어서 내 몸을 기르는 산뢰 이괘를 맞이했다면, 그 먹는 음식이나 씹어내는 언어를 조금 조심해서 절실한 말만을 하고, 먹을 만한 것만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절실한 말이 필요하다. 나의 내면을 쓸데없이 포장하는 말을 가지고는 감동적인 동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글쓰기라고 하는 것, 동화쓰기라고 하는 것도 한 캐릭터를 초청해서, 작가는 이 캐릭터와 함께, 또는 캐릭터에 숨어서 자신 내면의 절실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연기는 매우 절실한 자기 삶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제대로 고백해야 한다. 내 삶을 걸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그러면 누구든 다 읽어줄 것이다. 절실한 고백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안다.
이래서 정이천 선생도 단전에 대한 해석에서 "입을 취한 것은 단지 기르는 뜻이 있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가장 비근하고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말과 음식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존재를 기르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역시 말과 음식이다. 더 무엇이 있겠는가?
초구효에서 맨 아래 양에 대한 효사는
너의 신령스런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입을 벌리니) 흉하다.
이런 의미이다. 여기서 신령스런 거북이란 말이 참 흥미롭다. 거북은 목구멍으로 숨만 쉬고도 먹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동물이니 신령스럽게, 이렇게 스스로 기를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저 윗쪽의 육사효를 바라보고 있으니 흉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밖에서 자꾸 선생님을 구하니 스스로 기르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훙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남이 나를 길러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어찌보면 욕심인 것이다. 스스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이 지나쳐서 남이 나를 길러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하, 길러진다는 것, 기른다는 것에는 일단 나의 내면에 있는 신령스런 거북이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 거북이의 존재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제대로 나를 길러내지도 못하고, 또한 남도 길러내지를 못할 것이다.
자존감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이런 말보다도 이 비유의 말이 얼마나 좋은가? 존재의 내면에는 다 신령스런 거북이가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거북을 발견한다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욕심이 지나쳐서 자신의 능력은 낮게 보이고 더 큰 능력을 가진 세계가 있는 것처럼 늘 위를 향해 쫒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입을 헤 벌리고, 무언가 위를 향해 턱을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초구효의 효사는 참으로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두 번째 음효의 효사를 보면
육이효는 뒤집혀진 배양이라(엎드러져서 기르느니라) 상도에 어긋나니, 언덕에서 배양을 구하여 가면 흉하다.
기를 때에는 여섯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데 두 번째 경우는 자신의 능력이 조금 부족한 걸 알고, 아래 양효의 능력을 보고 아래로 엎드려저서 타인에게 배양을 부탁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음효는 움직이는 진괘에 포함되어 있다. 욕심이 자꾸 발동하는 때인 것이다. 그래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자꾸만 아래로 가서 어떻게 나를 길러 달라 하고, 다시 맨 위에 있는 상구 양에게 가서 또 길러달라 부탁을 하는데, 이렇게 이쪽 저쪽 위 아래로 자꾸만 누군가에 의탁하여 길러주기를 바라다보면 그건 흉한 결과만 온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 위기에 처할 때, 바닥을 칠 때 이렇게 무언가 남에게 의탁해서 나를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럴 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지하는 것 자체는 그럴 수가 있는데, 그 도움과 길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욕심인지를 먼저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이게 힘들다. 자꾸만 욕심이 일어나는 때에 내가 속해 있는 것이니, 이럴 때 남에게 의탁해서 무언가 나를 길러보려 하다가는 엄청난 낭패를 본다는 것이다. 가면 흉하다는 말이 나올 때는 가지 않고 지금 자리라도 제대로 지키면서 나를 돌아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면 흉하다고 하는데, 자꾸만 가서 움직이면 곤란하다. 잠시 중심을 잡고 있으면 시기가 지나고 다시 좋은 때가 올 것이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나를 돌아보라는 말이다. 욕심이 동하는 때에 속해 있을 수록..... 역시 어려운 말이다.
세 번째 음효는 더 험하다.
육삼효는 배양의 올바름에 위배되어 흉하며 10년 동안 사용하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첫째, 돌째 셋째 효는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진괘에 속해 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욕심이 발동한다는 걸 말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길러내려고 할 때, 욕심이 발동하는 때에 속하는 세 효는 모두가 흉한 쪽으로 가고 있다. 이것은 자식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고, 나를 기를 때도 마찬가지고, 욕심이 동할 때를 철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조급해서 되는 것이 없다.
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조급하게 기르려고 하면 오래 가지를 못하고, 나를 즐기지 못한다.
우리가 주역 공부를 하고 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착 가라앉고 꿉꿉하고 음산하였다. 이런 때는 마음도 가라앉는다. 흥을 내기가 힘들다. 욕심이 생기면 내면은 이런 날씨 같아지고, 그러면 오래 자신을 즐기기가 힘들다.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고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는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기를 때에는 늘 이런 시기를 거쳐야 하고 만날 수 밖에 없다.
오늘도 뒷풀이를 6시까지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진솔하게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이런 저런 수다 속에서 나를 길러내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 내가 길러지는 감각의 순간을 느껴야 한다. 사람들 속에서 나를 고백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러면서 나도 길러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관이의 상태이다. 내가 길러지는 바를 보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많이 길러졌다.
2
구상하고 있는 작품의 마무리를 물었는데 지화 명이괘가 나왔다. 이 괘도 참으로 의미가 심장하다.
명이괘는 어둠에 빛이 감추어져 있는 모습이다.
캄캄하고 살기 어려운 때를 만났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참으로 절실한 순간이다. 주역점을 치다 보면 어려운 괘가 나올까봐 무서워서 치지 못할 때도 있다. 나도 이런 때를 많이 경험해 보았다. 그러나 자꾸 쳐 보고 그 괘를 살아보고 하다보면 오히려 어려운 괘가 나올수록 내면의 성장이나, 삶의 의미는 깊어진다. 어려운 때를 통과하면서 정말 변하는 것이다. 삶의 큰 변화나 전환은 어려운 때를 통과해야 한다. 어려운 깜깜한 때를 통과하면서도 내면에 품고 있는 빛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편의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나는 지화명이괘의 상징을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글을 쓸 때 늘 지화 명이괘의 순간에서 시작한다. 도와주는 주변의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혼자 감당해야 한다. 누가 대신 써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안으로 숨기고 있는 빛의 에너지 만큼은 활활 타오르니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이야기꾼은 "군중을 대할 때에 어둠을 써서 밝게"(君子以이衆 用晦而明)할 줄 알아야 한다. 군중에게 다다르는데, 독자에게 다다르는데 어둠을 써서 밝힐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어둠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어둠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어둠을 써서 마침내 밝음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지화명이괘의 효는 양음양음음음이다.
맨 아래 양 초구효의 효사가 참 애절하다.
밝은 빛이 손상당하는 때에, 날아가면서 날개를 늘어뜨리는 것이다. 군자는 떠나가는 데에 3일 동안 먹지를 못하니, 그대로 나아가면 주인이 나무라는 말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석은 자가 위에 자리하고 있어, 빛을 품은 군자가 나아가는 길을 막으니, 날아가는데 날개를 손상당한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자는 떠나가는데 3일 동안 먹지를 못한다고 한다. 이는 지금 이 시절이 너무나 어려운 때임을 알고, 녹봉을 먹지 않고 스스로 홀로 고립되어 궁핍하게 사니, 자신의 길을 가는데, 이만큼 힘이 든다는 것이다. 곤궁함의 극치를 말한다.
작품을 쓴다고 할 때는 먼저 자신의 내면의 빛을 신뢰해야 한다. 내면의 힘을 가진 존재임에는 틀림없는데, 지금 상황이 녹록치가 않은 것이다. 이러니 섣불리 타협하거나 허영을 부리면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홀로 스스로 나가는 길을 가되, 지금 때에는 날개가 손상당할 수 밖에 없는 때이니 그걸 감안하고 이겨내고 지켜내야 한다는 말이다.
아래 말도 흥미롭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손상이 날개를 늘어뜨릴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 손상됨이 분명한데 어째서 보통 사람들이 식별하지 못하겠는가? " 이렇게 답하겠다. 처음 손상당하기 시작하는 때인데, 그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서 즉시 떠나간다. 그러나 세속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비난한다.(720쪽)
인생 고비마다 큰 전환점이 있다. 어느 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자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책을 낼 때마다 나도 느끼는 지점이 있는데, 하나의 책 속에는 그 책을 쓸 때의 그 사람 인생 전체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책을 보면 이 책을 쓸 때의 나의 인생의 쓴맛 단맛이 다 들어있다.
아까도 뒷풀이에서 이런 말을 하였는데, 몸이 안 좋아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숲 속 마을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림이 우연히 찾아왔는데, 이 그림을 어떻게든 책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욕심이 발동하고, 이런 저런 날개가 다 손상되어서, 몸이 더욱 안 좋아진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또 어떻게 이 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때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운명의 시간 같기도 하였다. 이것이 무엇일까. 그때 내 경험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누군가 친구가 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도 친구의 도움을 방아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조심 조심 조심,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계속....... 내면은 밝은 빛으로 가득찬 상태이니 어둠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번째 음효인 육이효의 효사는 더욱 수수께끼 말 같은데, 이 말에 대한 효사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육이효는 밝은 빛을 손상당하는 때에 왼쪽 넓적다리를 손상당하니, 구원하는 말이 건장하면 길하다.
이 말을 두고 정이천은 이렇게 풀었다.
발은 걸어가는 것이고 넓적다리는 정강이와 발의 위에 있어, 걸어갈 때 아주 절실하게 쓰이는 것은 아니고 왼쪽도 쓰기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 손발을 사용할 때는 오른쪽이 편리하고 오직 발로 쇠뇌를 잡아당길 때만 왼쪽을 쓰니, 오른쪽으로 서는 것이 근본이다. "왼쪽 넓적다리를 손상당했다"는 것은 걸어감을 손상당했으나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이다. (723쪽)
그러니까 명이괘는 이런 때에 어떻게 곤궁함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밝음이 상처입은 경우에 해쳐나가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세 번째 경우의 수다.
육삼효는 밝은 빛이 손상당하는 때 남쪽으로 사냥하여 큰 괴수를 얻으니, 빨리 바로 잡아서는 안된다.
구삼효는 맨 꼭대기 상육효와 응하고 있다. 힘이 있는 구삼은 무능하지만 지위만 높은 상육이라고 하는 괴수를 얼마든지 잡아 제거할 수가 있다. 그럴 능력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런 때이니 섣불리 나가서 바로 잡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괴수를 잡을 수는 있지만, 더 나가서 급하게 변혁을 하려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주역경전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어려운 괘를 뽑았다고 두려울 것이 없는 점이, 오히려 어려운 괘일 수록 각 효사는 그 때를 극복해가는 내면의 깊이를 제시하고 있다. 자신 내면의 힘을, 밝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육사효는 더 수수께끼 같다.
육사효는 왼쪽 배로 들어가 밝은 빛을 손상당한 마음을 얻어서 문 앞의 뜰로 나오는 것이다.
다섯번재 음효인 군주는 밝음을 손상당한 주체라 할 수가 있다. 이 다섯번째 군주 바로 밑 자리가 음흉한 마음을 가진 사악한 소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인은 군주의 오른쪽 배로 들어가지 않고 늘 왼쪽 배로 들어간다. 배로 들어간다는 것은 깊이 교제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른쪽이 아니고 왼쪽인 경우는 감추어진 곳을 말한다. 늘 감추어진 쪽으로 들어가서 뱃속 깊이 소통하니 손상당한 군주의 마음을 완전히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 앞으로, 대중 앞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혼란한 때에 사악한 소인이 하는 짓을 상징하는 말이다. 왼쪽 배로 들어오는 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이게 무얼까. 글쓰기를 물었다면, 글쓰기를 할 때 왼쪽 배로 들어와 나를 손상당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묻는다면? 지금 책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이런 것이 있을 것이다. 내 삶에 직면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 내면의 진솔한 언어를 흐리게 하는 그 무엇?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괘이다.
3
시가 찾아올까요에 나온 택지 췌괘는 어떤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땅이다. 땅에 연못을 파면 물이 고이는 취합이 된다. 다 모일때까지 깊이 파야 한다. 다시 땅 위에 연못이 올라가 있다고 해도 좋다. 함께 모이는데, 함께 취합하는데는 종묘를 세우는 일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췌(萃)는 풀초 밑에 군사 졸을 했다. 많은 졸개무리처럼 풀이 우묵하게 무더기로 났다는 뜻이다. 땅에 못을 파서 물이 모이는 것도 취이고, 땅이나 산에 수목이 꽉 들어차 있는 것도 모두 萃가 된다. (대산주역2권. 263쪽)
췌괘의 핵심은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고, 큰 희생을 쓰라는 것읹데, 이 두 말이 다 어렵다.
사람을 모이게 하려면 대인을 얻어야 하는데, 도대체 이 대인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반대로 말하면 대인을 본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의미의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점을 치면서 대인의 의미를 많이 생각해 보는데, 아마도 세상에 고수나 대인은 얼마든지 있지 않을가. 우리는 잠깐이라도 누군가에게 대인이면서 스승이면서 학생이면서 이렇게 변신하는 것이다. 대인을 알아보는 것도 나의 눈에 달렸다. 옆에 아무리 대인이 있어도 내가 그를 못 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대인은 모습을 바꾸면서 존재하니, 순간의 대인을 만나서 그와 소통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시가 찾아올까요? 여기에 대인을 만나라 하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대인은 나의 내면 안에도 있고, 나의 밖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큰 희생을 쓰라(用大牲)는 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췌괘의 시기는 세상 사람이 함께 모이는 것이니 풍성하고 넉넉한 때를 상징한단다. 이런 때에는 가장 진실한 믿음은 제사를 제대로 지내는 것인데, 역시 이런 마음이 곧 큰 희생을 쓰라는 것이다. 풍성한 때에 걸맞게 나를 쓰라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 점을 친 사람이 점심을 샀다. 우리는 잘 얻어 먹었다. 이것도 좋다. 삶 속에서 한번 쏘는 것, 내가 지금 풍성한 때이니 점심 한번 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점을 친 사람은 택지 췌괘에서 초효가 동하였다.
초육효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결말을 이루지 못하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같은 부류들이 모일 것이나 만일 울부짖으면 여러 사람이 비웃을 것이다. 이를 근심하지 말고 가면, 허물이 없다.
이는 무슨 말인가. 택지 췌괘의 효 순서는 음음음 양양음이다.
아래 음은 네 번째 양효와 응한다.
정이천의 해설이 참 흥미롭다.
초육효는 구사효와 올바른 호응관계가 되니, 본래 믿음이 있어 서로 따르는 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는 때에 세 음효(아래 음음음)가 모여 함께 처해서 유함이 올바름을 지키는 절개가 없다. 만약 올바른 호응관계가 되는 사람을 버리고 같은 부류의 사람을 따른다면 이는 믿음은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끝맺지 못하는 것이다. 내란(乃亂)은 마음이 미혹되고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내췌乃萃)는 그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모이는 것이다.
초육효가 정도를 지켜서 그 같은 부류의 음의 세력들을 따르지 않고 울부짖으면서 올바른 호응관계의 사람을 구한다면 모든 사람이 비웃을 것이다. .... 만일 이런 비웃음을 근심하지 않고 가서 올바른 호응관계인 강양한 사람을 따르면 허물이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인의 무리에 들어갈 것이다. (904쪽)
시라고 하는 무리가 찾아올까를 생각해 본다면, 우선 내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인가? 시라고 하는 본질에 대한 믿음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거는 것인지, 진솔하게 대화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뒤풀이에서 오고 간 그 많은 말들 속에 오늘 뽑은 주역괘들의 에너지와 여운이 다 들어 있었다.
주역 공부는 하고 나면 즐겁다.
쉬고 있는 분들 힘들 내서 다음 달에는 만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