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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의 거시기~

작성자미노(강 민호)|작성시간12.03.12|조회수655 목록 댓글 3

 

지증왕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 이다.

재종형인 소지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늙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 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왕이 되었지만

지증왕은 신라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는 503년 그 동안 성행하던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 노동력의 상실을 경계하였고

각 주와 군에 명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농사를 지을 때는 소를 이용하는 우경법을 보급하는 등 농업생산력 향사에 힘썼다.

지증왕 무렵부터 확대 보급되면서 당연히 수리사업도 활발해졌다.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분 출토, 높이 34cm

 

경주 인왕동의 국립 경주박물관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간 어른들은

그 항아리 앞에 선 애들과는 멀리해야 할 토우 형상이 있다.


온 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상은 유독 관람객들의 눈을 자극시킨다.

한 여인이 엉덩이를 내민 채 엎드려 있고

그 뒤로 한 남성이 남성 거시기를 내밀며 후위자세를 취하고 있다. 

토기위에 과감한 표현이 우릴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여인의 얼굴 표정이다.

왼쪽으로 얼굴을 쓱 돌린 여인의 웃음이다.

작은 토우의 얼굴 속에 핀 미소와 웃음은 익살스럽다.

여유만만한 당당함이 신라인들의 성문화를 이르는 표현일까. 

표정과 그 자태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게 보인다.

신라인의 여유와 성적 문화의 자연스러움까? 

곰곰히 되씹어 볼 수록 토속적이고 소박한 향기가 빼어나온다.

 


 

이 자연스러운 자태는  천년전의 신라인의 꾸밈없는 성적 패러다임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인간의 성행위를 표현했지만 부끄러워하지않는 자연스런 표현의 발로이다.

화랑세기 속에 나타난 신라인들의 성적 개방성에

현재의 한국인들도 혀를 내 두를 정도이다.

유교적인 사고 방식을 거쳐온 현대인들이다.

그 토우 앞의 자태에서 얼굴을 빨개질 정도로

민망스럽게 느껴지는 신라인들 성문화의 대담성이다. 

특히 이 항아리 토우에서 대표적으로 느낀다.

성 자체를 해학스럽게 만들고 마는 성적 미학을 만들줄 아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들의 삶 자체임을 알 수 있다.

 그 비밀을 찾아 감상할 줄아는 눈 높이를 높이면 

신라 토우의 진정한 미학과 매력을 알 수 있다.

그 항아리가 바로 이 국보195호이다. 


 

 

남녀의 애정 표현이 리얼하게 묘사된 국보 195호 신라 토우 장식 항아리

 

 

 

지증왕은 노동력도 중요시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들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쌍둥이를 낳은 사람에게도 포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처음에 결혼을 하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말로는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컸다고 한다.

그의 음경의 길이가 자그마치 무려 1자5치 (약45cm)였다.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부감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각 지방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음경에 맞는 여자를 구하려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신부감을 구하려 가다가

우연히 모량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가 큰 개 두 마리가

북크기의 똥덩어리를 같이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저 정도의 똥을 눈 사람이라면

분명히 모든 것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마을로 내려가 그 똥의 주인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이라는 자의 딸이 눈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서 보니 처녀의 키가 7자 5치 (약 2m20cm) 나 되었다.

신하들은 빨리 이 사실을 지증왕에게 알리고 처녀를 데리고 입궁했다.

그리고 지증왕과 맞추어 보니 딱 맞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갈문왕 습보와 조생부인의 아들인 지증왕은

생식기가 1자 5치, 즉 45cm나 되어서

큰 똥의 임자인 연제부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를 잘하는 삼국유사였기에 사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증왕은 어떻게 왕위에 올랐을까?

지증왕은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의 손자이니까, 소지왕(비처왕)의 6촌 동생이다.

비처왕과 이렇게 촌수가 차이나는 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들 법흥왕(원종)에게 있다.

비처왕은 원종을 선혜후와의 사이에서 난 보도를 아내로 삼게하였고 그 덕도 있었지만,

비처왕이 지증왕을 부군으로 삼고 원종을 국공으로 삼았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삼국유사가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후 연제부인을 맞았다고 기록했지만.

지증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예순 네살이였으므로,

왕위를 잇기 전에 법흥왕을 낳았다고 볼 수있다.

또한 증거가 되는 것이 비처왕 때에 법흥왕이 국공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법흥왕이 연제부인의 아들이기에

법흥왕이 보위에 오른 후 연제부인이 태후가 되었다는 기록이 증거이다.

이 처럼 지증왕은 왕위에 오른 후,

연제부인을 맞이한 것이 아니기에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후 있었던

큰 똥의 임자와 결혼한 이야기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허면, 지증왕의 큰 생식기는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

 

남자의 생식기는 오래 전부터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했었다.

이것은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후,

신라의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낮은 사람도 같이 매장하는 순장제도를 없애고,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벌하고,

신라의 이름을 정확하게 한 지증왕의 강력한 권위를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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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쌍코피(임정근) | 작성시간 12.03.12 니꺼는 어째되노. ㅋㅋ
  • 작성자짱Oㅏ(신윤희) | 작성시간 12.03.12 넘길다...패쓰~~~ㅋ
  • 답댓글 작성자미노(강 민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3.15 뭐가요?엉큼 하시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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