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기 전
해외여행은 뭐 하러 가느냐는 게 평소 지론이었다. 사업가나 예술가 들은 새로운 아이템을 얻기 위하여 나간다지만 일반인들은 해외에 나가봐야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도 구석구석 볼 데가 수없이 많다. 혹시 나라 안을 다 본 사람이라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생겼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 할까? 하는 호기심에서 나가 볼 수도 있겠지만 국제시대라는 미명하에 공연히 나가 봐야 돈만 없앤다는 생각에서이다.
해외여행을 부추기는 건지, 나가서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편히 보라는 뜻인지 요즘 TV에서도 세계 곳곳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나라 아주 오지의 각 가정을 방문해서 음식 체험까지 하며 제대로 구경을 시켜 주고 있다. 좋은 경치를 보고 평소 먹어 보지 못한 맛난 음식을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치가 눈에 항상 남아 있지를 못한다. 그 음식 맛이 입속에서 항상 여운으로 남아 있지를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때뿐인 것이다. 요즈음은 너도 나도 해외에 갔다 오니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나도 어디 갔었지’ 하고 기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무스탕 트레킹을 다녀온 것은 지난해 퇴직예정자 교육을 갔을 때 어떤 강사가 “퇴직 전에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꼭 다녀와야 한다.” 고 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남편을 위하여 살림 하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준비물이나 여행 일정에 대하여는 미리 인쇄물을 받아서 큰 어려움이나 설렘은 없었다.
여권 | 분실 대비해서 한 부 복사해 놓는 것은 기본 |
비자 | 네팔공항 입국 시 비자를 직접 받아야 하는데 입국 서류를 작성하여 대금 수납하는 곳에서 25달러와 사진 1매를 내면 노란 영수증을 해 준다. 그것을 가지고 여권과 제출하여 입국심사를 받으면 입국 절차가 완료 된다. |
환전 | 한국에서 100달러로 환전해 가서 네팔 현지에서 가이드에게 루피로 환전(100달러 이하는 금액을 다 받을 수 없음) |
가방 | 캐리어의 짐은 모두 카고백에 담아 현지 포터들이 가지고 동행하는데 도중에 비를 만날 수 있어 반드시 비닐 봉투에 담아야 한다. 그날그날 트레킹 하면서 필요한 물품은 아침에 배낭에 따로 담는다.(현금, 상비약, 간식 등) |
의류 | 침낭은 현지에서 지급하는 것을 쓰면 된다. 방한복1개, 내복, 바람막이 2개, 동절기상하2벌, 춘추상하2벌, 털모자, 챙모자, 넥워머, 마스크, 속옷, 양말, 핫백, 선글라스, 스틱, 후레쉬 |
약품 | 소염진통제, 아스피린, 선크림, 립크린, 밴드, 외상연고 |
기타 | 수건, 치약, 칫솔, 샴푸, 린스, 화장지, 보온통, 간식 |
주의 | 탁송화물은 1개(20kg내), 휴대폰 예비 배터리는 반드시 휴대 액체로는 휴대 안 됨 |
출발
보통 해외여행을 가면 두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는 2018. 5. 4. 13:30 출발 대한항공 KE695편인데 10:30까지 2터미널 G카운트 앞으로 모이란다. 두 시간도 적어 세 시간 전까지 오라니, 우린 두 시간 전 까지 가자고 하니 아내가 안 된단다. 하라는 대로 하자는 거다. 그렇지 단체가 움직일 때는 리더의 말을 잘 따라 주어야 한다.
다행히 동네에서 공항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어 수월했다. 그걸 이용해서 공항에 도착하니 10:10이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왔겠지 했는데 이미 모두 도착해 있었다. 항상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제일 늦게 도착한다는 원리가 이번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먼저 호주에 갈 때 우리는 한 시간 이상 줄 서서 수속 밟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줄이 다 끝 날 때 쯤 와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공항을 많이 이용해 본 사람일 것이다. 해외에 자주 나가다 보면 그런 여유로움이 생길까?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고 또 여유 있게 하여 안전을 도모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줄 서서 시간 때우며 기다리는 게 싫은 것이다. 이것이 해외에 나가기 싫어하는 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13:30분에 출발하여 17:50분 에 도착하면 4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건데 기내방송에서는 6시간 20분 정도 걸린단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한국과 카트만두의 시차가 3시간 15분이란다. 3시간 15분을 벌었다고 해야 하나?
낮 동안 비행을 해서 밖을 좀 볼 수 있을까 기대를 많이 했다. 땅에 있을 때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저 높은 곳에서 밑을 보면 무엇이 보일까? 얼마나 경이로울까? 늘 궁금했었다. 몇 번 비행기를 탈 기회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낮에 비행을 할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와 보니 좌석은 왼쪽, 가운데, 오른쪽 3열로 배치되어 있고 나의 좌석은 그중 가운데 열에 있었다. 더구나 그 가운데 열 3개의 좌석 중에서도 또 가운데라 밖을 감상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화장실 드나들기도 불편한 자리였다.
하늘높이에서 대자연의 장관을 감상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또 수시로 난기류를 만났다며 창문커버를 닫으라고 해서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난기류와 창문 덮개를 닫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의아했다. 덮개를 닫으면 확실히 비행기 안이 아늑해서 잠을 자는 사람이나 비디오를 보는 사람에게는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난기류를 통과할 때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정도의 진동을 느껴야 했다.
조종사나 항공기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에 있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았다. 항공사 전무의 갑질에서 승무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고, 승무원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해 주는데도 승객들 중에는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어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친절이나 미소가 진정성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점심으로 늦은 기내식을 먹고 양치질을 하기 위해 화장실을 갔는데 칫솔 치약이 준비되어 있었다. 치약 칫솔을 미리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영화가 골고루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다. 비행시간이 짧으면 괜찮지만 몇 시간씩 비행을 하려면 이정도 준비는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비디오 두 편만 보아도 3시간은 훌쩍 가버리니 웬만한 거리는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식사하고 비디오 두 편 정도 보다보면 눈 붙일 틈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예 신문을 가지고 탔는데 그걸 꼼꼼히 읽다 보니 거의 세 시간 정도가 걸려 비디오 한 편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다.
카트만두 공항은 인천 공항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었다. 준비하시는 분이 카트만두 공항에 입국해서 작성하는 서류를 미리 주었기에 준비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제출하면 되는 줄 알고 비행기 안에서 옆에 사람이 작성할 때 내 것을 보여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도 작성해야 했다. 그건 작성 견본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걸 보고 그대로 베껴 쓰면 되니 별 어려움은 없었지만 우왕좌왕 하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공항 내에는 두 군데의 업무 줄이 있었다. 두 명이서 하는 줄이 있고, 네 명이서 또 무언가를 하는 줄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네 명 쪽의 첫째 줄에 섰다. 한 참을 서 있었는데도 우리 줄은 줄어들지를 않는 반면 네 번째 줄은 사람이 없었다. 그 쪽으로 얼른 가니 담당자가 손을 저으며 두 명 쪽을 가리켰다. 혼잣말로 “뭐라고 하는 거야” 하고 있는데 창구에서 나오더니 건너편으로 데리고 갔다. “왜 그러는 거야” 하며 자신의 업무가 끝났다는 줄 알고 우리 일행이 저 쪽에 있다고 가리키며 가려
고 하니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왜 그러느냐며 자기 쪽으로 오란다. 처음 줄 섰던 곳으로 오니 더 이상 말을 않고 가 버렸다. 우리야 뭐가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니 신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잠시 후 신 교수가 이 줄이 아니라 저쪽 줄이라며 그 사람이 데려다 준 쪽으로 가자고 하여 모두 그리로 옮겨서 다시 줄을 서야 했다. 전에는 이쪽에서 비자대금을 받고 입국심사까지 했었단다. 이제는 두 명이 업무를 보는 줄에 비자대금을 내면 위 영수증을 내준다. 그다음 네 명이 업무를 보는 쪽에 와서 줄을 서 있다가 여권과 영수증을 제출하면 입국심사를 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담당자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 준 것인데 자꾸 입국심사 쪽으로 오니 그도 엄청 답답했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난 후 외교부에서 문자를 보낸 것을 받았다. 네팔은 테러 위험 1급 국가이니 주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각종 위험 상황 발생 시 어떻게 대처하라는 안내문이 영사관 연락처와 함께 자세히 적혀 있었다. 세월호 당시 재난에 대한 대처방법이나 훈련 안내 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경주 지진 때도 한참 후에 안내 방송이 나와 피해가 더 커졌다고 한다. 그 이후 지진이 발생했을 때 문자가 신속히 도달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심지어 연안부두에서 화재가 나 그로 인한 먼지가 많이 발생했으니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하였다. 재난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이렇게 했었는지 몰라도 해외 여행객들에게 까지도 재난에 대비한 매뉴얼을 만들었는가 보았다.
네팔 당국도 그걸 알 것이다. 그래서 대비하느라 그런지 원래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업무가 무척 느린 것 같았다. 입국심사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공항에 나오니 어두운 밤이었다. 신 교수가 인사를 하면서 우리의 가이드 삼뚝 이라고 소개했다. 아내도 전에 안나푸르나 왔을 때 안면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금잔화 비슷한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하나씩 각자 목에 걸어 주었다. 네팔 식 환영 인사란다. 공항에 와서 이렇게 꽃목걸이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기야
우리가 무슨 귀빈도 아닌데 이런 대접을 누가 해 주겠는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우리도 합장하며 나마스떼라고 인사했다.
가이드가 준비한 승합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명색이 수도라는데 도시 정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질서가 없었으며 어떻게 사고 나지 않고 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더구나 우리와 정 반대로 우측 운전대에 좌측통행이라 더 헷갈리는 것 같았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교통경찰이 수신호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 같았다. 제복을 입어서 경찰인가 보다 하지 아주 후줄근했다.
한 무리의 남녀가 걸어가고 있는데 오른쪽 백미러에 한 여자가 살짝 접촉이 되는 것 같았다. 운전사도 흘끔 쳐다보더니 그냥 진행을 했다. 뒤에서 그 여자가 뭐라 하며 차를 손으로 치는 소리가 났다. 운전사는 모른 체 하는 건지 상관이 없는 건지 운전을 계속 해 나갔다. 그것으로 끝인가 보았다.
골목골목을 돌아 HOTEL THAMEL에 도착했다. 완전히 시장 통 같은 데를 운전해 온 것이고 다른 차들도 그 속을 비집고 잘도 달렸다. 아내가 차에서 내리면
서 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고 그냥 내렸다. 자기 짐도 가지고 가지 않네 하며 가방을 가지고 내렸다.
가방을 호텔로 가져가려 하니 가이드가 그냥 두란다. 가이드 일행과 호텔 직원들이 짐을 옮겼다. 각자 가지고 가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는지 의아했다.
하긴 그래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또 벌이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 소개가 있었고 각자 인사를 나누었다. 원래 삼뚝이 가이드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의 조카 라주라는 사람이 우리 가이드를 하게 되었단다.
방 배정이 끝나 각자 방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으러 간단다. 짐을 옮겨야 하는데 승강기가 없었다. 종업원과 가이드가 짐을 날라야 하는 것이다. 보통 한 사람당
두 개씩인 짐을 4층까지 올려다 주는 것은 무척 힘들어 보였다. 팁을 준다고는 하지만 한 개씩이라도 가지고 가면 수월할 것을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방은 명색이 호텔이지 우리의 여인숙 수준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한참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길을 몰라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배가 고팠거나. 아까 차를 타고 올 때처럼 많은 차들이 그 골목을 거침없이 오가고 있다 보니 부산해서 그럴 것이었다. 길 양쪽에 많은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물건을 살 계획이 없어서 그런지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벼룩시장의 상품 같은 분위기였다.
복장으로 보아 경찰일 것 같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경찰이라면 아마 테러에 대비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범죄예방을 위한 근무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눈길이 갔는데 아무튼 복장은 교통경찰과 마찬 가지로 후줄근한 것이 전체적인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한식을 먹었다. 김치찌개를 시켰다. 맛은 한국에서 먹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밑반찬이 우리 것과 전혀 달랐다. 밥을 추가로 더 주문했는데 자기 것도 다 못 먹고 남기는 사람이 있는 걸 무조건 시킨 것 같아 좋지 않아 보였다. 음식은 억지로 많이 먹을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집에서고 식당에서고 음식을 남기면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자괴감일까? 네팔에 와서 처음 식사라 그런지 아니면 별로 입에 맞지 않는지 일행들이 썩 잘 먹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남은 밥을 내가 다 먹었을 텐데 오늘은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었으니 최소한 30분이라도 걸어야 하겠지만 지리를 너무 몰라서 그런지 썩 내키지 않았다. 누군가 같이 가지 않으면 혼자라도 돌고 오는데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여섯 시간 이상을 날아와 네팔에 있다는 게 전혀 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게 열악하다는 현실만이 앞으로 펼쳐질 일정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첫째 날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1시가 넘었으나 여기 시간으로는 열시니 이제 잘 시간인 것이다. 어쩐지 좀 졸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 네팔에 왔으니 여기 시간에 맞춰야 하는 것이다.
5월 5일 둘째 날이 밝았다. 새소리가 잠을 깨웠는가 보았다. 잠은 잘 잔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네팔의 수도이고 국제공항이 있는 카트만두의 호텔 부근이라는데 번화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섯시부터 아침을 먹는다고 했으니 집에서 하던 대로 스트레칭을 했다. 고산 증에 대한 선입관 때문인지 스트레칭을 하는데도 숨이 좀 가쁜 것 같았다.
그나마 호텔 아침 식사는 할 만 했다. 중국이나 대만에 갔을 때 식단이랑 비슷한 것 같았다. 아직은 트레킹을 시작하는 일정이 아니니까 많이 먹을 필요는 없겠지만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자는 게 나의 지론이니만큼 맛나게 먹었다.
아침을 먹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인데도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열고 있었다. 엊저녁처럼 차들이 많이 다니지는 않아 다행이긴 한데 건물이나 도로 포장 상태 주변의 모든 시설물들의 낙후가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다. 가게들마다 향을 피우는 것으로 보아 아침에 문을 열면서 오늘 하루도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의식 같은 것인가 보았다. 이렇게 일찍 상점들이 문을 연 것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얘기인데 별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처럼 집에서 아침을 해 먹는 문화이면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사러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출근시간이 되어 가는지 점점 차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긴 한데 먼지가 많이 날려 자연스럽게 눈이 찡그려졌고 숨 쉬기가 불편 하였다.
무척 많이 걸어 온 것 같았는데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서니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나왔다. 반가웠다.
짐을 챙겨서 복도에 내놓고 방 정리 하는 팁으로 1루피 지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마 내 생전에 처음 팁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고작 1루피 가지고 그걸 바라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더 놓기도 그랬다. 1루피씩만 놓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더 놓는다고 누가 잡아 가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상거래 질서를 위함이라고 하면 합당한 이유가 될 것 같았다.
어제 우리를 태워다 주었던 승합차가 와서 다시 카트만두 공항으로 이동했다. 어제 보다도 훨씬 복잡했다. 아마 출근시간이라 그런 것 같았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 까지는 소형 비행기로 이동한단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 내에서 작은 비행기가 상당한 소음을 내며 이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비행기라고 공항이 있고 탑승 수속 절차에서부터 마지막 탑승장 까지는 버스로 이동을 하였다. 버스를 타고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활주로였고 거기에는 영화에서나 보았던 바로 그런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런걸 타고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짐을 각자 가지고 와서 탑승해도 될 것 같은데 화물운반차로 가져 와 따로 싣는 것 까지 할 건 다 하고 있었다. 특히 이건 경비행기라 화물 무게도 16kg이하라야 한 단다. 탑승 수속을 하면서 혹시 무게가 초과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훨씬 못 미쳤다.
Yeti Airlines 691편, 좌석은 왼쪽에 한줄 오른쪽에 두 줄로 되어 있었다. 원래는 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른쪽 5C석으로 스님과 같이 앉았는데 왼쪽 옆 한 줄짜리 좌석이 비어 그리로 옮겨 앉았다. 스님이 계속 사진촬영을 하시기 때문에 자리를 비워 놓으면 조금이라도 불편을 덜어 드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창 쪽에 앉으면 밖 풍경을 더 잘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혹시 자리를 옮기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승무원 아가씨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탑승 중 주의 사항을 말하는 것인지, 비행 항로에 대한 설명인지, 아니면 비행 중 펼쳐질 밖의 풍경을 잘 감상하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방송을 했다.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로 해 주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아니면 세계 공통어인 영어로 하던가. 하기야 그때그때 탑승객에 따라 말을 바꾸어 할 정도면 이런데서 근무를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이륙하기 위하여 활주로로 들어섰다. 잠시 후 속력을 내더니 금방 떠오른다. 처음에는 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으로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감돌았다. 점점 높이 올라 공항 주변의 풍경이 그림처럼 보이게 되자 밑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이 정도니 비행기가 추락하면 전원 사망할 수밖에 없겠다는 실감이 들게 했다. 아찔했다.
승무원 아가씨가 쟁반에 사탕과 귀막이용 솜을 가져왔다. 솜을 가지고 양쪽 귀
구멍을 틀어막았다. 소음이 너무 심했는데 훨씬 줄어들었다. 소음이라도 작아야 덜 불안할 것 같았다. 하기야 이미 이 높이까지 떠올랐는데 불안 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아니면 안전운행을 염원하는 기도나 올리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좋은 사탕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입에 넣었다. 단 것을 먹으면 진정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음료수와 커피를 가져왔기에 커피를 선택하였다. 아무래도 커피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무원 아가씨도 가만히 있는 것 보다 이런 거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속 카페! 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구름이 밑에 깔려 있어 밑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는 살짝 겁도 났다. 앞이 보이지 않아 조종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옆 날개, 프로펠러, 하다못해 몸체를 잡아주고 있는 리벳까지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007영화에서는 이런 비행기를 타고 곡예싸움을 하지 않던가! 정말 짜릿한 비행이었다.
그래도 비행기 안에서 창 너머로 아주 멀리 안나푸르나의 흰 머리를 살짝 볼 수 있었다. 완전히 구름 밭 위를 날고 있어서 그야말로 신선이 구름을 타고 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약 30여 분 날아서 도착한 곳은 포카라. 경비행기들이 이륙을 하면서 내는 굉음
과 프로펠러의 강한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여기는 공항이라도 특별한 수속은 없었다. 탑승할 때 이미 다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와 잠시 기다리니 승합차가 왔다. 그걸 타고 HOTEL MILA REPA에 도착하여 방 배정을 받고 짐을 풀었다.
카고백을 하나씩 주었다. 그날그날 필요한 물건은 각자 배낭에 옮기고 나머지는 카고백에 담아 놓으면 된단다. 출발하기 전 준비물 설명서에 있던 내용이었다.
짐을 분리하고 나니 아주 홀가분했다. 캐리어 끌고 배낭 메고 다니려다 보면 이래저래 불편했는데 배낭만 메고 다니면 되는 것이다.
잠시 쉬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상호가 특이했다. 午酒(낮술)! 간판에 친절하게 한글까지 써 놓은 게 반가웠다. 한국사람 누군가가 일찌감치 머리를 써서 진출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한식이었다. 대부분 관광을 가면 이미 메뉴가 정해져 있고 알아서 나오는데 여기는 그때그때 메뉴를 고르는 게 좀 개방적인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가 이 먼데까지 와서 우리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 아닌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견지명은 알아주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앞에 호수가 있고 그 앞에 잔디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두 호텔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의 특기인 식사 후 걷기를 할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아내에게 같이 가자 하니 선선히 따른다. 우리처럼 걷는 사람, 축구를 하는 젊은이들, 가수지망생인지 기타를 연주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청년, 어떤 소년들은 수영을 하면서 한 옆에 빨래를 해서 널어놓았는데 그들은 빨래를 풀밭 바닥에 널어놓는 게 특이했다. 워낙 햇볕이 좋고 건조해서 그런지 잘 마르는 가 보았다.
걷는 중에 몇 번 코리아? 하고 말을 건네 왔다. 예스! 우리의 모습이나 말투를 듣고 알아보는 건지, 대한민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져 알아보는 건지 기분이 좋았다. 앞에 철문이 열려 있는 데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안쪽에는 간이 건물 같은 게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여 있었다. 보아하니 이슬람 사원인 것 같았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아내가 그만 돌아가자고 하여 그러자 하고 발길을 돌렸다. 화창한 오후라 땀도 좀 나는 편이었다. 조금 더 돌아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언제 또 와 보겠는가!
원래 계획에는 중식 후 페와 호수 보팅, 티베트 난민촌 및 데이비드 폭포 관광 후 휴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랑코트라는 곳엘 간단다.
승합차가 한 참 달려가더니 멈추었다. 무슨 일이 있겠거니 기다리고 있다가 안 되겠는지 가이드가 내렸다. 우리 앞에도 여러 대의 차가 서있었고 그 앞 쪽에 보니 사람들이 도로를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이드가 오더니 그 안쪽 주민들이 이 도로로 차량 통행을 하지 못하게 해 달라며 시위를 하는 중이란다. 그 사람들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차를 돌려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차가 점점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교행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사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부딪치기 일보 직전일 때도 몇 번 있었다. 꾸불꾸불 올라가더니 내리란다. 더 이상은 차가 올라가지 못하는 가 보았다.
올라가는 중에도 민가는 계속 있었다. 물을 마시며 한 숨 돌렸다. 계속 올라가니 전망대 같은 게 나왔다. 포카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너무 멀어서 까마득했다.
행글라이더 인지 패러글라이딩 인지 타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현지인들이 무척 세련되었구나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외국 사람들이 개척을 해서 영업을
하는 거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혼자 타는 게 아니라 앞에 한 사람씩을 태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승객인 것이다. 관광 상품인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전망대 앞 까지 날아 왔다가 사라지는 친구도 있었다. 글라이딩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같았다. 공항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계속 날아오르듯이 이륙장 같은 언덕에서는 사람들이 장비를 메고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달음질치면서 언덕 끝에 가서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큰 새와 다르지 않았다. 매인지 독수리인지 그 위 더 높은 곳에서 비행하며 우리처럼 높이 날 수는 없지롱 하면서 뽐내는 것 같았다.
누가 개발했는지 기류를 이용해서 저렇게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요즈음은 아예 날개달린 것 같은 통짜로 된 옷을 입고 언덕에 올라가서 날아 내려오는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았다.
인간이 날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서 현재 비행기까지 태동하였고 달나라까지 갔다 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또 그것을 하고자 하면 기어코 이루어 내는 특성이 있어 문명의 발달을 이루는 것인가 보다.
내려오는 길은 모두 걸어 내려가는 것으로 동의해서 차를 보냈다. 별것 아닐 것으로 생각을 했음인지 트레킹 준비운동을 제대로 한 것 같았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지만 군락을 이루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 주민들이 너무 자연보호 의식이 없다는 거였다. 관광객들이 그런 것인지 현지인들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물을 먹고 버린 페트병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국에서도 환경에 대한 심각성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재활용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지 그렇게 페트병을 방치해 놓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높은 곳에서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지 곳곳을 개간해서 밭을 일구어 놓고 있었다. 관광객을 유치하여 숙소로 쓰려고 하는 건지 큰 건물도 몇 개 있었고 짓다가 만 것도 있었다. 번듯하게 지어 놓은 개인 집도 여러 채 있었다.
그런데 과연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에 다닐까 걱정스러웠다. 어른들이야 필요하면 그때그때 알아서 하겠지만 매일 학교를 가야 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할까?
차나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되겠지만 모두 그런 혜택을 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올라오는 어른을 두 명 만났다. 아저씨 한 명과 아주머니 한 명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고 있었지만 숨을 헐떡이지는 않았다. 원래 숙달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이방인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보리수나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일까?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오르내리며 이 나무에 기대어 한 숨 돌릴까? 이 나무 밑에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담을 나누고 추억을 쌓을까? 돌로 둘레를 쌓아놓은 것을 보면 우리네 느티나무와 같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내려오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보통 큰 산을 가면 내려올 때 더 힘든 경우가 있는데 꼭 그와 같았다. 경사도나 길이가 제대로 훈련을 하게 했다. 그나마 내려오기만 하면 되니 숨은 차지 않았지만 모두들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후시간을 이곳에서 다 보내야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로가에 건물을 많이 짓고 있었는데 한 집을 보니 가족들끼리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한 집에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 짜이라는 차는 커피에 우유를 탄 것 같았다. 그게 네팔 전통차라고 했다. 먹을 만했다.
소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 소를 키웠지만 그 소는 코뚜레를 해도 틈만 나면 달아나 잡아오려면 애 좀 먹어야 했었다. 이 소들은 지금 퇴근 중인 것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풀 많은 곳에 가서 하루 종일 풀을 뜯다가 해가 넘어갈 시간이 되면 집으로 가는 것이다. 이 녀석들은 보아 하니 엄마와 딸 같았다. 차와 오토바이가 수 없이 지나가고 사람 또한 많은데 전혀 개의치 않고 제 갈 길만 가는 것이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페와 호수인 것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우리의 숙소가 있는 곳까지 간단다. 페와 호수 보팅이 이것이었구나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이드가 갔다 오더니 배를 띄울 수 없단다. 비가 좀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부는데다 마감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직 날도 밝은데 이 정도 바람 가지고 배를 띄우지 않는다니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할 것 같은데 규정을 중시하는 건지 그렇게 돈에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호수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오히려 그게 더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호수를 바라보는 카페들은 이미 손님이 꽤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 것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았다. 대부분 외국인들인데 모두 물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왔다. 우리도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네팔 식으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여긴 공연도 하는 모양이었다.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닭고기, 수프, 벽에 발라 구운 빵이 나왔다. 빵이나 닭고기를 수프에 찍어 먹는 거란다. 난 일단 수프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음식 가리지 않는 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두 번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만두는 먹을 만 했다.
비가 무슨 여름 장맛비 오는 것 같았다. 이 비를 맞으며 숙소까지 가야 한단다. 약 10 분 정도 걸린단다. 그 시간이면 아무것도 아니지, 밥도 먹었으니 잘 됐다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걸어가면서 보니 상가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관광지였다. 특별히 살 것도 없었지만 가는 데만 신경을 쓰니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분은 걸린 것 같았다.
5월 6일, 3일째 날이 밝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스트레칭이다. 네팔에 와서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메뉴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카트만두 호텔보다 잘 나온 것 같았다. 어제 저녁을 잘 못 먹은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많이 먹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포카라가 카트만두보다 모든 면에서 더 깨끗하고 나은 것 같았다. 우리로 말하면 신도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오늘부터는 배낭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첫 날이라 무얼 가지고 가야 할지를 몰라 산에 가는 것처럼 기본적인 것을 넣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오늘 저녁에 카고백에서 꺼내 또 담으면 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 필요해도 하루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포카라 공항으로 이동했다. 포카라에서 좀솜까지 또 비행기를 타야 한단다. 어디가나 공항에서는 탑승수속을 밟아야 한다. 일단 국내선이니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행기이니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Tara Air 비행기 표를 나눠 주었다. 이건 지정 좌석도 없단다. 그냥 타는 순서대로 앉으면 된단다. 배낭 무게도 달고, 휴대품, 몸 검사 다 했다. 요즈음은 거의 검색대를 통과하면 끝이지만 여기선 검색대 통과 후 사람이 직접 손으로 몸 검사를 했다.
승무원이 앞에서부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오는 비행기는 오른쪽에 두 줄 왼쪽에 한 줄이 있었는데 이 건 양쪽 다 한 줄 이었다. 조종석 문도 없어 조종사를 다 볼 수 있었다. 오른쪽이 기장 인지 부기장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여자였다. 그래도 사탕과 음료수를 주는 게 신기했다. 사탕을 한 움큼 집었고 솜으로 귀도 틀어막았으며 환타 비슷한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정말 신기했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가 과연 안나푸르나 계곡 사이를 날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기야 작아야지 크면 계곡 사이를 자유롭게 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도 이런 경비행기들이 계곡을 날며 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그 중 적기는 반드시 계곡에 부딪쳐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곤 했었다. 영화지만 갑자기 이 계곡 저 계곡에서 나타나는 비행기들을 보면서 너무 너무 아슬아
슬하여 실제인 것처럼 손에 땀을 쥐지 않았던가!
저 멀리 안나푸르나의 설경이 구름사이로 살짝 보였다. 그냥 눈으로만 보아야지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구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만 해도 신기한데 저 험준한 안나푸르나의 눈 덮인 모습을 언제 또 볼 것인가! 정말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건지 산에 걸려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멋있다!
기가 막히다!!
정말 장관이다!!!
어떤 표현으로도 그 수식어가 모자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중국 베이징시 창평구)이 이 모습일까? 아마 안나푸르나에서 따 간 이름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아마 동영상으로 찍었더라면 현실감이 한층 더했을까? 잠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 명 장면을 영원히 놓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탑승한 경비행기는 안나푸르나의 양쪽 산 사이 계곡을 날고 있는 것이다. 여기 아예 정지하면 안 될까?
갑자기 생각 난 것은, 그러니 등정대원들이 저 유혹에 미련을 떨칠 수가 없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내 기필코 너를 발아래 두리라’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패하면 또 가고, 죽을 고비에 다다랐다가도 ‘너와 같이 잠들면 그만이지 포기는 없다’ 며 또 원정대를 꾸렸을 것이다.
영화 ‘히말라야’가 뇌 속에서 태동했다. 그렇게 크레바스에 추락해 히말라야 지킴이가 되어버린 박영석 대장과 그 일행에게 명복을 빌었다.
우리를 태우고 거의 곡예비행을 하고 있는 이 조종사들도 직접 발로 정복하지는 못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하여 작은 비행기로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을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심취하다 보면 비행기를 설산에 내려놓고 싶은 충동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 앞에 펼쳐진 설산을 향하여 상승을 하고 있었다. 저 산을 넘어 가려는 건가?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가슴을 졸였지만 그 옆으로 돌아서 착륙한 곳은 좀솜이라는 곳이었다.
휴~~~, 무사히 왔구나!
좀솜 공항 활주로에 내리니 바람이 엄청 났다. 모자가 날아갈 지경이었다. 포카라에서 더 이상 좀솜 행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비행기가 워낙 작아 바람에 곤두박질 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곡을 타고 오르내리던바람은 더 세 질수도 있는 것이다.
새들은 그 바람을 이용할 줄을 아는 것이다. 날개를 펴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기류를 타고 유영을 하며 오르 내리고 먹이 사냥을 하는 것이다. 그 하찮아 보이는 새들도 하늘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고 하면서도 대자연 앞에서는 미물에 불과한 것임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솜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열시 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 보다 점심을 빨리 먹고 출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이 모아져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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