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트레킹
점심을 먹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바로 출발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더 큰 이유는 언제 여길 또 올 기회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운동도 할 겸 보아두자 함이었다. 그래도 공항이 있는 동네라 그런지 전부 호텔과 상점뿐이었다. 바닥은 돌을 깔아 고르지 못했다. 군부대가 2개나 있어 무엇이 다른가 하고 보니 하나는 산악구조훈련 부대였다. 그 부대 뒤 큰 바위산에 CLIMBING 이라고 써 놓아 암벽등반 하는 곳 인줄 알았더니 그 부대원들 연습장이었던 것이다.
호텔 쪽으로 거의 다 왔을 때 밖에 나와 있던 아내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이제부터 트레킹 시작이라 출발하기 전 주의 사항도 알려주고 할 건데 어딜
갔다 오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별로 걱정이 되지 않은 이유가 경험자인 스님과 신 교수님, 그리고 현지인 가이드가 있으니 믿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원래 걷는 데는 자신을 하지만 그동안 연마했던 체력과 꼼꼼하게 챙겨 온 준비물을 가지고 자신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겨우 1km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일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가 맨 뒤 같았는데 어디로 다 간 걸까? 신 교수님이 제일 뒤에 선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아직 뒤에서 오고 있을 테니 정 안되면 기다리면 되겠지?
다리를 건너니 길이 갈라지는데 어느 쪽 길로 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그러고 보니 다리 건너기 전에도 갈림길이 있었다. 거기서 짐을 실은 말을 몰고 가는 포터가 직진 방향 길로 간 것으로 보아 그쪽과 연결되려면 우리도 왼쪽 길로 가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조금 더 가다보니 그 포터도 우리 쪽으로 말들을 몰고 오다가 합류했다.
그 길은 우리가 이용하는 길은 아닌 것 같은데 포터가 왜 그리로 해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가 지나가자 그 말들이 버스를 피하면서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밀어붙이는 것을 보고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시 후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약 1km 앞 쪽에 우리의 일행들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외길이라 길을 잘못들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네팔에 오기 전 사전 지식을 얻기 위해 어떤 사이트에서 보니 무스탕에서는 길을 잃으면 경찰이 수색을 나오는데 그들의 출동 비용까지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것 같았다.
아니 굳이 저렇게 빨리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제 시작인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뭉쳐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간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을 빨리 하고 싶어서였을까?
하사관학교에서 토요일마다 10km 완전군장 구보를 했다. 졸업할 때 측정을 위한 대비훈련을 하는 것이다. 개인 측정이 아니라 부대 측정이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낙오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매 번 낙오자가 생겼다. 그때마다 전우들이 누구는 철모, 누구는 소총, 또 어떤 때는 군장 까지 대신 받아 들고 뛰었다. 그러다 보니 전우애가 싹텄고 측정 때는 모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걸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일정이 대충 그려졌다.
우리가 계속 강을 따라 그 옆으로 난 길로 트레킹을 하고 있는데 이 강이 칼라간다키강이라고 한다. 강폭은 엄청 넓은데 실제 강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디서 공사를 하는지 아니면 물 색깔이 원래 그런지 연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안내지에도 검은 강 칼라간다키강이라고 했던가 보다. 그 정도로 검지는 않았지만….
모자에 선글라스에 마스크에 또 넥 워머를 얼굴에 둘러서 흡사 이슬람 전사 아이리스 대원을 연상케 하였다. 이 차림에 쨍쨍 내리쬐는 햇빛 속을 걷자니 더울 것은 불 보듯 뻔 한데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서 다행히 덥지가 않고 시원했다. 오히려 춥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구나 뒤에서 불어주는 바람 덕분에 걷는데도 훨씬 수월하고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좀솜의 설산 닐기리봉을 뒤로 하며 걷고 있는데 가도 가도 그 흰 머리의 설산이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차량들은 강바닥에 나 있는 길로 달려갔다. 강바닥이 평평하고 물이 많지 않으니 잘 활용을 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없으니 그렇게 사용을 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우리의 카고백을 싣고 요리사를 태운 트랙터도 노랫소리를 크게 틀며 그리로 지나갔다. 트랙터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지형에서 트랙터 이상 좋은 교통수단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강바닥 도로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 위쪽에서는 도로 공사를 하는 건지 채석작업을 하는 건지 포클레인 한 대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감독자도 없고 안내판도 없고 공사현장 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쯤 왔을까? 길옆에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바람 때문에 나간 집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에클로바티 레스토랑이라고 씌어 있었다. 짐은 밖에 있는데 모두들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손을 씻고 먼지도 좀 털고 용변도 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나올 생각들을 하지 않아 들어가 보았다. 차와 먹을 것을 시킨단다. 지금 배낭에 간식거리가 잔뜩 있는데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하기야 이 황량하고 모래바람만 엄청나게 불어오는 허허벌판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업을 하고 있는데 길손들이 팔아주지 않으면 존재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있어서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사람들인 것이다.
고산병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징후를 증명할 현상이 나타났다.
모두들 차를 시키는데 내는 괜찮다고 하니까 같이 간 동료가 우리의 믹스커피 한 봉지를 꺼냈더니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야말로 커피봉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좀솜이 해발 2600m라고 했으니 여기쯤은 100이나 200m 정도 더 높아질 것이었다. 이 커피 봉지만큼 우리의 심장이나 폐도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주의사항을 꼭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분은 될 수 있으면 따뜻한 물을 많이 섭취할 것, 체온을 유지하도록 할 것, 무리하지 말 것 등 모두 간단히 지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만 이러한 환경에서 하루 종일 걷고 나면 온 몸을 씻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겠지만 절대 씻으면 안 된다는 거다.
지금까지 온 이만큼 더 가면 오늘 묵을 호텔이 나온단다. 이제 시작이고 한 시간 반 걸은 건데 벌써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많이 나고, 그 때문에 마스크와 두건을 썼고, 그래서 물을 먹으려 해도 불편하고, 화장실이 없어 노상방뇨를 해야 하니 힘 드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남자야 눈치껏 용변을 본다지만 여자들은 얼마나 애로사항이 많을까 싶었다.
그러한 모든 것 들보다 더욱 힘들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마도 고산증 때문일 것이었다.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견디어낼까 심히 염려가 되었다.
그렇지 우리가 무스탕에 온 이유가 경선 트레킹이다. 오늘부터 바로 실습을 하는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경선을 하면서 가 보기로 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까마득해 보였던 곳도 어느새 다 와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걸음의 매력이다. 옛날 사람들이 한양 길을 걸어서 다닌 것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까끄베니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해발 2880m로 무스탕의 관문이란다.
시간이 일러 저녁 먹기 전 사찰 참배를 한단다. 동네 구경을 하면서 가던 중 현지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자고 하여 일행 한 명이 사진을 찍었는데 돈을 달란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계속 쫓아오며 돈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돈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함부로 찍자고 할 게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초상권이 있으니 당연히 제 값을 지불해야 맞는 것이다.
집집마다 1층은 소 우리인 듯 했다.
아니 어떤 집은 2층에도 소 우리가 있어 보였는데 좁은 계단이 밖에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소들이 거길 통하여 제 집에 드나드는 것 같았다. 여기 소들은 참 착한 것 같았다. 아무 통제장치가 없는데도 절대 나대지 않고 제 할 일을 제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만큼 느긋하고 순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가축들도 그 집 주인 성격을 따라 간다고 하는 말을 어릴 때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키우던 소들은 하나같이 툭하면 도망가서 잡으러 다니느라고 무척 애를 쓴 기억이 생생하다. 쇠말뚝을 박아 매 놓거나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 놓아도 어떻게든 풀고 도망갔던 것이다.
여기 까끄베니는 그 옛날 실크로드가 무역으로 성행할 당시 거점 도시였었다고 한다. 거의 2∼3층 구조로 돌과 흙을 이용한 건축 양식이었다.
무스탕에서는 절을 꼼빠라고 하는데 벽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붉은색은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 흰색은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검푸른 색은 수호신장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기는 샤카파꼼빠인데 참배요청을 하니 문을 열어주어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전각은 현대식 건물로 여러 채 있었다. 동자승이 꽤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행승들을 교육시키는 곳인 것 같았다. 본 전각은 초기 전통 법당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어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행사 때 의식을 봉행하거나 관광객들에게 견학시키기 위해 문을 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일단 외관이 번듯하다고 할 수 있다. 멋들어진 기와에 화려한 단청 그리고 안에 들어가도 엄숙한 분위기에 인자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사시사철 누구든 참배를 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나 성당도 평상시에는 문이 잠겨 있는데 우리가 불자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종교시설은 절처럼 늘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찰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염소들의 귀가행렬을 볼 수 있었다.
마리마다 방울을 달아 놓아 걸을 때 마다 딸랑딸랑 하는 소리가 아주 정겨웠다. 그들도 소처럼 제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무척 귀여웠다. 목동이 따라 다니기는 하지만 사람보다도 더 정확히 출퇴근을 하는 게 아주 기특했다.
신통한 녀석들!
우리도 오늘 첫날 트레킹 일정을 마치고 여기 ANNAPURNA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첫날이라 좀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잘 한 것 같았다.
이제 넷째 날 5월 7일이다. 아침을 먹고 또 출발이다.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을 위하여 무스탕으로 입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크 포스트에서 신고를 해야 한단다. 포스트는 어제 마을 구경을 나왔을 때 바로 그 곳 입구에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나는데 어린 아이가 할머니와 같이 있는 것이 보였다. 경비행기에서 받은 사탕을 몇 개 꺼내서 쥐어 주니 좋아 한다. 경비행기에서 준 것도 있지만 트레킹 중에 간식으로 틈틈이 먹으려고 카고백에서 덜어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초콜릿이나 과자 등도 많은데 그걸 현지인들에게 줄 생각을 못한 것이다. 쉴 때마다 현지에서 사 먹으니 우리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트레킹 코스도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계속 강을 따라 걷는 것이다. 역시 선두는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가다보면 쉬고 있다. 우리는 도착하고 그들은 또 출발한다. 오전이라 그런지 바람도 불지 않고 햇빛도 강하지 않아 걸을 만 하였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돌고 돌아 가다보니 언덕 부분에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현수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 다리를 한 번 건너갔다 올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오토바이가 오더니 거침없이 그 다리를 타고 건너갔다. 아니 그냥 걸어서 건너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다니, 신기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고 왠지 내가 더 섬뜩함을 느껴 다음에 건너가 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산모퉁이를 돌아보니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인부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포크레인이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공사의 흔적들은 모두 구간별로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도로공사를 해 놓으면 편리하긴 하겠지만 이런 트레킹코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여기는 Chhusang(해발 2,980m)이라는 곳이다. 츄상은 나르싱콜라와 칼리간다키가 합류하는 지점이라는데 우리 숙소는 그야말로 강바닥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이 더 이상 불지 않으니까 이렇게 동네가 형성되었겠지만 만약을 위하여 뭔가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강 건너에 있는 캉꼼빠 순례에 나섰다. 강을 건너려면 통나무 다리를 통과해야 한단다. 물이 항상 이 정도로만 있는 건지 아니면 물이 좀 많아서 다리가 떠내려가면 다시 설치를 하면 되는 건지, 하기는 다리를 제대로 놓으려면 엄청난 규모의 대교를 건설해야 할 것이었다.
저 위가 원래 절터인데 돌이 굴러 내려와 아래로 옮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위아래 모두 사찰이었는데 위쪽의 전각은 바람으로 소실되고 아래만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사찰의 기능은 하지 않고 현재는 마을에 위탁을 하여 관리인이 염소를 키우며 방문객만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절 밖 큰 돌담 안에 어린 염소들이 많이 있었다.
2층 구조로 곳곳에 방 같은 게 있었고, 2층에서 미륵부처님의 얼굴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도가 많아 1,2층에서 동시에 법회를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비구니 사찰이었단다.
5월 8일 5일째 날이 밝았다. 어버이 날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했을 텐데 이번엔 여기 오는 바람에 전복장만 작은아들 편에 보내드렸다. 아무렴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 하겠는가.
어제 오던 길과 마찬가지로 강 옆을 따라 계속 길이 나 있는데 이 구간은 제법 도로 공사가 되어 있었다.
사진이 산에 올라 가다가 중간 어디쯤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 난간은 임시 다리 난간인 것이다.
도로로 달려오던 차들은 이 다리 100m쯤 앞에서 다시 강바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요리사들을 태운 트랙터도 우리에게 반갑다는 휘파람을 불어 대며 좀 전에 강바닥으로 지나갔다.
이 밑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도 이제까지 보았던 강물보다는 훨씬 맑아 혹시 물고기가 있지 않을까 살폈지만 없는 것 같았다.
여기 물은 손을 대 보지 않았지만 다른 곳의 물의 온도로 볼 때 너무 차가워서 물고기는 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굴은 아니고 엄청난 절벽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는데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을 오르니 쩰레라는 마을이 나왔다. 마을마다 공동수도가 설치되어 있었고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이 높은 지점에 어디서 이렇게 물을 끌어 대는지 신기했다.
당연히 수돗가 옆집에 들어갔으려니 하고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흔쾌히 화장실을 이용하게 한 그 집에 미안했다. 수돗물에 손을 씻고 있는데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자기 거라는 듯 물을 맛나게 먹으며 쳐다보았다.
이곳을 비롯하여 동네가 있는 곳의 특징이 보였다. 일단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이 있으니 나무가 자란다. 대부분 보리수나무인데 울창하게 자라면 방풍효과도 있고 목재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을 형성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즉 오아시스인 셈이었다.
이제는 여행객들이 늘어나면서 간식이나 끼니를 해결해 주고 숙박시설을 마련하여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이런 계곡을 끼고 도는 길을 이용하여 트레킹코스를 개발한 것 같았다. 그 중간 중간에 마을이 있으니 그들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리라.
차와 간식을 먹고
한 숨 돌렸으니 또 출발!
가이드 라주가 전체 의견을 물었다. 먼지가 덜 나는 길은 좀 돌아서 가야하고 그보다 가까운 길은 먼지가 엄청 많은데 둘 중의 길을 선택하란다. 모두 가까운 길로 가겠다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발목까지 빠지는데 괜찮겠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괜찮단다. 힘이든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이드는 트랙터를 이용하여 취사도구나 요리사 그리고 우리의 카고백을 옮기는데 어떤 팀은 말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 팀은 진보 된 것이다.
그냥 평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첩첩산중 험한 낭떠러지 길을 저렇게 말에 짐을 가득 싣고 다니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나마 말을 이용하는 것은 양호한 것이다. 사람이 직접 그 큰 짐을 끈으로 묶어 머리에 지지하고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말을 살 여유가 없는 것이다. 트렉터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6~70년대 농촌 풍경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오는 동안에도 이러한 계곡은 여러 번 보았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계곡이지만 미국의 그랜드캐넌이 이보다 더 장관일까? 할 정도로 바람이 깎아놓은 계곡은 대단히 웅장하였다. 섬세한 조각품이었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가이드로부터 길을 선택하라며 말로 들을 때는 먼지가 많아야 얼마나 많으랴 했었다. 이제까지 왔던 길도 먼지 투성이였는데 그보다 약간 더 많겠지 했었다. 뭐 그 정도쯤이야 했었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밟을 때마다 풀풀 올라오는 흙먼지는 신발이며 바지 아래를 덮어버렸다. 앞으로 발을 옮기는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어디다 발을 놓아야 하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흙 자체도 진흙성분으로 고운데다 차들이 지나다니며 부숴놓아 아주 콩가루 같았다. 씻지도 말라는데 이 먼지를 과연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구름은 주위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했다.
그나마 여기는 바람이 가장 센 곳 중의 하나로 광풍에 가까워 먼지가 좀 날라 가기를 바랐지만….
이러한 먼지 구덩이 길을 걸어 3,624m 타클람라와 종라를 넘어 3,620m 고지에 위치한 사마르라는 곳에 당도하였다. 마을 입구 수로에서 물이 콸콸콸 흘러 내려오고 바로 옆에는 보리수나무가 저렇게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밑동은 아주 우람한데 가지는 가늘게 쭉쭉 뻗어 있었다. 가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서 집 짓는데 목재로 쓴단다.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니 저절로 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온 몸에 뒤집어 쓴 먼지를 닦아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훌훌 벗고 뛰어 들었으면 좋으련만 머리에 물을 끼얹으며 세수를 하였다. 이렇게만 하여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물이 엄청 차가웠다. 그야말로 만년설이 녹아 흘러 내려오는 청정수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고산병 생각이 나서 아차! 싶었지만 햇볕이 따스하고 기온도 낮지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는 하는데 별 일 없겠지 자위를 해 보았다.
언젠가 TV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알프스의 바위산을 뛰어 다니던 염소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우연히 바위산 위를 쳐다보았는데 그 높은 바위를 딛고 염소인지 양인지 세 마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갑다는 건지, 경계를 하는 건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TV에서 볼 때 보다 실제로 보니 너무 신기해서 가면서도 계속 보았다. 그 녀석들도 똑같은 자세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혹시 어디론가 올라와서 자신들을 잡아가지 않을까 해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너무 불쌍하기도 했다. 저기서 얼마나 불안할까! 뭐 먹을 것은 있는 걸까? 염소야 걱정 말고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여기는 랑충꼼빠로 가는 길이다. 향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었는데 대부분 이렇게 베어진 흔적이 많았다.
진작부터 랑충꼼빠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파드마삼바바와 아티샤 존자가 머물렀던 곳으로 무스탕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란다.
우리나라 금강굴 정도 될까? 오르는 길이 우리는 철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는 돌계단이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은 아주 세련되고 잘 정리가 되어 있는 반면 여기는 거의 자연 상태로 방치되어있다 싶을 정도였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아주 어수선 하였다. 하기야 이와 같은 수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이다. 일단 문헌에서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찾는다 해도 누군가 그곳을 탐험을 해서 확인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길이 나 있어도 오는 자체가 쉽지 않은데 길을 개척하면서 온다는 게 상상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지도하에 수관을 하였다. 스님이 주관을 해서 그런지 신령스러운 장소 덕분인지 집중이 잘 되었다. 보통 산에 다닐 때 절이 있으면 기필코 108배를 하였었는데 여기서는 명상을 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여기서 차를 얻어 마신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려면 상주하시는 스님이 오셔야 하는데 언제 오실지 모른단다. 문을 열어 놓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기로 했다. 숙소까지 몇 분은 말을 타고 간다 하여 우리는 먼저 출발하였다. 지난번에도 그리 했는데 신 교수님만 혼자 남겨 놓아 고생 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내 배 부르면 머슴 배고픈지 모른다는 말이 나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 가고 있는데 트랙터를 불렀다며 모두 타고 간단다. 우리는 그냥 걸어가자고 어깃장을 놓다가 너무 어두워지는 것 같아 트랙터를 타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상보체 마을(3,800m)이란 곳으로 트랙터 타고 오길 잘 한 것 같았다. 숙소인 롯지의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 지고 있었다.
5월 9일 제 6일째 시작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와 있었다.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곳인데 눈이 왔다고 축하 할 일이라며 좋아들 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느라 쳐 놓은 것 같은 천막이 그 축구장 옆에 있었다. 알고 보니 도로공사를 하는 인부들이란다. 얼마나 추웠을까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선 스트레칭을 하고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작은 언덕을 올라갔는데 무스탕으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입구인 해발 4,010m 니이라 고개란다.
저 멀리 남쪽으로 길게 펼쳐진 설산이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산군의 북쪽 티베트 고원이라고 신 교수님이 설명해 주었다.
바로 조 앞인데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올라갔다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니 가이드가 하는 말, 가까운 것 같아도 멀리 있는 거란다. 정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이런 곳에 언제 또 와 보겠는가? 다른 곳은 취소하더라도 저 설산은 한 번 갔다 와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그나마 이렇게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이나마 찍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하겠지! 로 위안을 삼았다. 부부동반 여행을 이런 뜻깊은 행사에 멋진 곳으로 왔다는 자체가 행복 아닐까?
여기도 도로공사가 한참이었다. 돌이 무지 많아 공사자재로 쓰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설산을 옆으로 보다가 어느덧 뒤로 보게 될 때쯤 게미라는 곳에서 간식을 먹었다. 이 집은 화장실이 밖의 길옆에 있어서 그런지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 꼼빠도 그렇고 집안의 문이 있는 곳이면 모두 자물쇠를 잠가 놓은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행객들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했다.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세 그룹으로 나뉘어 가고 있었다. 선두에 서는 십여 명, 우리 부부가 두 번째, 그리고 신 교수님과 두 세 명이 맨 뒤였다.
맨 앞에 선 사람들은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경선을 할 리 없고, 우리와 뒤 그룹에서 해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경선의 효과를 본다면 모두 앞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어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기운이 전해질까 싶어 아내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초청하여 감로수를 부어주며 걸어갔는데 영험이 없어 보였다.
경선의 효과를 보았는지 어느덧 해발 3,820m 닥마르에 도착했다. 이곳은 기이한 모습의 붉은 절벽 아래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우리가 묵을 롯지 앞에는 말들이 먹고 뛰노는 초원이 있었다. 거길 가로질러 가면 좀 빨리 들어갈 수 있겠다 싶어 가다 보니 물이 괴어 있어 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문도 없고 얕지만 담장 같은 걸 넘어 들어갔다. 뭐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신 교수님의 중론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오더니 조그만 주머니에서 무슨 돌을 꺼내놓고 사란다. 무언가 했더니 고무줄로 묶어 놓은 돌 안에 조개문양이 들어 있는 화석이란다. 30루피란다. 무엇에 쓸까! 누가 살까? 아주머니를 생각해서 누군가 한 개 팔아 주는 걸 보았다.
잘 때도 마스크를 썼다. 먼지가 많아서였다. 옷을 입은 채로 침낭에 들어가서 자므로 춥지는 않았다. 며칠 자다보니 익숙해졌는데도 도중에 잠이 깨었다. 왠지 답답함이 느껴졌다. 고산병이 왔나? 마스크를 벗어 봤다. 좀 괜찮나 싶더니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어찌하나 하다가 수관을 해 보기로 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이었다. 다행이었다.
제 7일째 5월 10일이다. 누군가 먼저 일어난 사람이 눈이 왔다고 하는 말이 잠결에 어렴풋이 들렸다. 창문 커튼을 젖히니 아직도 눈이 계속 오고 있었다.
눈이 오면 먼지는 나지 않아서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출발 준비를 했다. 그런데 눈이 오면 트레킹을 할 수가 없단다.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위험해서 안 된단다. 험준한 산악지대도 아닌데 우리가 모를 위험 요소가 있는 모양이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의료시설이 가깝지 않아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을 했다.
차를 대절해야 한단다.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가 불통이란다. 가이드가 전화가 있는 지점까지 갔다 와야 한단다. 문제는 거기 가도 차가 없거나 눈이 계속 와서 차량 통행마저 어려우면 여기서 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 이런 경우가 생길수도 있구나! 이 오지 중의 오지에서 날씨가 큰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 안일하지 않았나 싶었다.
한참 후 가이드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차를 예약 했단다. 차 이용료도 만만치 않았다. 700불이란다. 지금 이용요금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항상 비상대비가 필요한 것이다.
원래대로 하면 오늘 하루 더 트레킹을 해야 하는데 지프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저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며 거기까지 가야 한단다. 나갈 때 보니 정문이 있었다. 어제 들어올 때는 우리가 급한 마음에 초원 쪽으로 오느라 월담을 했는데 원래는 초원에 들어가면 안 된단다. 하기야 우리로 말하면 밥인데 거꾸로 말이 밟아 놓은 것을 먹으라 하면 먹겠는가? 어제 올 때 말들이 우리를 쳐다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프 한 대에 9명씩 타니 바짝 붙어 앉아야 했다. 앞에는 무릎이 닿았다. 길은 울퉁불퉁 꼬불꼬불 한데다 완전 난폭운전이었다. 가이드는 그래도 중국사람 인상이 나는데 이 차 운전사나 다른 요리사 등은 아랍권 사람들을 연상케 했다.
조금 가다 보니 아침 먹은 게 완전히 소화된 느낌이었다. 식후 운동을 하지 않아 부담스러웠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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