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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후기 게시판

경선트레킹명상 후기 - 무스탕의 신비 # 3부

작성자바른생활|작성시간18.09.10|조회수113 목록 댓글 0

짜랑 꼼빠에 갔다. 무스탕 최대의 승원이 있던 곳이란다. 법당 중앙 불단에 두 협시보살과 훌륭한 미륵불 금동상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고 선반에 걸려 있는 것은16인의 조사상과 대형 만달라란다. 점심시간인지 동자승들이 법당에서 공양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이 건물에 본 법당이 있지만 원래 이 앞에 있는 다 허물어진 전각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꼼빠였다고 한다. 




  보이는 것처럼 위쪽 부분은 흔적만 남아있고 지하에는 옛날 탱화가 있단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역사적인 자료를 이렇게 방치해 놓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붉은색의 초르텐들과 로의 순수한 미덕, 지명뿐 사람은 살지 않는 마을 로께가르는 해발 3,884m에 위치해 있었다. 그나마 꼼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꼼빠에서 먹을 수 있었다. 가르꼼빠는 무스탕 최초 꼼빠로 닝마파 꼼빠이며 파드마삼바바가 불교탄압을 예견하고 숨겨둔 “테르마”가 발견된 곳 중의 하나로 유명하단다. 




  법당은 여기도 어김없이 잠겨 있어서 가이드를 통하여 문을 열고 참배를 할 수 있었다. 방명록도 쓰게 했다. 어느 꼼빠나 마니차가 많은데 여긴 특히 더 많은 것 같았다. 엄청 많은 마니차 모두를 옴마니반메훔 염송을 하면서 돌렸다.


  우리 차 기사는 뒤에 가는 꼴을 못 보는 사람 같았다. 앞차에 바짝 붙어 가니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이드를 시켜서 운전사에게 앞차와 좀 떨어져서 가라고 말 하게 하였으나 뭐라고 전달했는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섰다 가라는 줄 알고 아예 정지했다. 잠시 후 출발하였으나 앞 차와 거리가 더 멀어졌고 그 차를 따라 가느라 더 난폭운전을 해야 했다. 결국은 앞 차를 추월했다. 이제 매연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그게 나았다. 아주 확실히 떨어뜨리려는 듯이 마구 달렸다. 걷지 않아서 힘은 덜 드는데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색색이 풍화된 무스탕 계곡이 장엄하게 펼쳐진 역사적인 성벽도시 염원의 로만탕에  지프 트레킹으로 입성했다.


  제 8일째 5월 11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딱푼꾼촉링이라는 곳을 탐방하러 간단다. 관리인을 데리고 가야 한단다. 입장권을 사고 또 얼마만큼을 가니 마을이 나왔고 할머니 한 분을 태웠다. 그 할머니가 열쇠를 가지고 있단다.


  지프가 가다가 멈추었다. 더 이상은 위험해서 올라갈 수가 없단다. 우린 걸어가려고 내렸다. 그런데 뒤에 오던 차가 그대로 올라가 버렸다. 우리 차도 다시 올라 간다며 타라고 하였다. 



  이건 길이니까 차가 가긴 가지만 행정당국이 너무 안일한 것 같았다. 길은 내 놓았으니 알아서 가라는 식인가 보았다. 무서워서 못 가겠으면 걸어가던가. 그동안 한 번도 사고가 안 난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운행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기야 올라올 상황이 안 되면 기사들이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자신들의 목숨도 하나뿐이니까. 올라와서도 어떻게 올라 온 건지 얼떨떨하여 내려 갈 때는 걸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스님이 주의 사항을 단단히 일러 주었다. 여기까지만 올라오면 금방 가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가 문을 열쇠로 열어 주고도 한 참을 내려가고 또 큰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또 문 앞에서 할머니가 열쇠를 떨어뜨려 가이드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해야 했다. 열쇠를 긴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다녀야 안전 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손에 달랑달랑 들고 다니다 놓치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가이드가 내려갈 수 있는 정도니까 주워 왔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여기까지 와서 탐방도 못하고 무슨 낭패란 말인가.

 
  어렵게 온 것에 비해서 규모는 작았다. 산의 한 부분을 ⊏자 모양으로 판 것이었다. 그리고 벽에는 온갖 불상을 벽화로 그려 놓았는데 많이 퇴색되어 있었다. 

그렇지 세월이 얼만데 이만큼 남아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리라. 침상이나 솥을 걸었던 흔적, 또 절구 같은 것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험준한 곳에 이런 수행공간을 마련할 생각을 하였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길 알고 온 것이며, 그때는 지금 보다도 훨씬 험준했을 텐데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더 큰 문제는 어떻게 먹고 살면서 수행을 했을까? 도저히 미루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스님의 주재 하에 수관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일이 염려 된 탓인지, 바람소리가 너무 세서 그런지 집중은 잘 안 되었다.
  스님이 조심하라고

주의를 당부하셨던 것처럼 조심조심 해서 차에서 내린 곳까지 왔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다.
  차를 보내고 걸어 내려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차가 그대로 있었다. 타고 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우린 걸어 내려왔다. 가이드가 걸어가도 약 15분 정도면 내려갈 수 있다고 하였다.
  모두 안전하게 하산을 마치고 안내 할머니를 태웠던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또 이동한 곳은 초셀마을의 종케이브라는 곳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무슨 벌집 같이 생겨 새들의 보금자리인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제법 넓었다. 자그마치 내부는 5층으로 되어 있었다. 각 층마다 조그만 방이 몇 개씩 있었고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적을 피해 와서 살던 피난처란다. 절벽에 굴을 파고 생활을 하여 방어를 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단다. 그러나 공격할 필요도 없이 밖에서 진을 치고 지키기만 하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안에서는 공격을 할 수가 없어 사다리차 정도만 가지면 쉽게 공격 하고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위를 피해 살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보았다. 


  노루벌링꼼빠라는 사찰에 참배를 하러 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 참배를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관리인도 없고 스님이 안 계실 것 같으면 잠가 놓는 게 당연할 것 같았다.


모두 이제나 저제나 법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사진들만 찍다가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있는 법당 앞에까지 올라가서 기다렸는데 우린 아래 요사채 처마 밑 그늘에 있었다.


  첫날 카트만두 호텔에 도착하여 신 교수님이 말씀한 것 중에 가이드네 집에 방문할 거라고 했었다. 거기 가면 네팔 전통주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여기 가옥 구조가 나름대로 편리와 실리를 도모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가운데를 뚫어 놓아 햇빛이 들어오고 내부 탁한 공기를 순환시키게 되어 있었다. 먼지나 비도 들어올 수가 있겠는데 비는 거의 오지 않아서 고려하지 않아도 된단다. 롯지나 민가나 다 똑같은 구조였다.


  우리의 약과와 아주 흡사한 것이 나왔다. 우리가 온다고 하여 특별히 많이 만들었단다. 모두들 맛있다며 잘 먹었다. 전통주로 나온 것은 우리의 막걸리와 똑같았는데 조금 더 색깔이 연했다. 한 잔씩 마셨다. 맛은 괜찮았다. 네팔의 고량주도 나왔다. 중국 고량주와 비슷했다. 몇 잔을 마시고 나머지는 물병에 따라가지고 와서 저녁에 마셨다.


  5월 12일 9일 째이다. 오늘은 무스탕 최대의 띠지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수도 로만탕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라고 한다. 이는 무스탕에서 가장 큰 축제이며 “띠지” 라는 말은 “텐첸”에서 나온 말로 「불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희망하는」 이란 뜻이지만 실질적으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란다. 



  축제내용은 악마를 쫓는 의식이며 무스탕을 파괴하려는 악마를 주인공 도르제조노가 싸워 물리쳤다는 전설에 기원을 두고 있단다. 우리가 일부러 날짜를 맞추어 온 것도 아닌데 딱 들어맞았다고 아주 행운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어디 옆 동네 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머나먼 나라의 더구나 트레킹으로 와야 하는 현지 사정을 감안할 때 다행이란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오전에는 승려교육원 왕궁 꼼빠를 갔다. 왕궁은 건재 하는데 현재 왕은 없다고 하였다. 여기는 대대로 무스탕의 둘째 아들이 출가한 뒤에 승원 장으로 임명된단다. 큰아들은 승계원칙에 의하여 왕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 축제 준비에 승려교육생들이 분주한 것 같았다. 우리도 무슨 행사를 하려면 청소부터 하는 게 기본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두 나서서 쓸고 닦고 바닥에 물을 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박물관을 관람했다. 불을 전혀 켜놓지 않아 후레쉬를 켜야 했다. 외국인들은 현지 스님이 안내를 해 주고 있었는데 우리는 신 교수님이 지식이 해박하여 설명을 다 해주었다. 아주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는데 그냥 바닥에 쌓여 있었고 다른 사료들도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불만 안 켜면 되는 것인가 시설이 너무 열악하여 고 자료들이 잘 보존이 될지 의문스러웠다.


  툽첸꼼빠는 법회를 보는 중인지 아니면 오늘 축제 준비를 위해 예행연습을 하는 건지 엄청 긴 나팔을 불며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외우고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뒤쪽 나무 의자에 앉아서 보고 있는데 우리 일행들이 그 앞에 서있으니 그들의 시야를 가리는 꼴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본격적으로 축제 구경을 한단다. 오전에 돌아보면서 느낀바 이지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축제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축제를 한다 하면 먹을거리 시장부터 형성이 된다. 즉 온통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오락시설도 그에 못지않게 들어선다. 일단은 먹고 노는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고 그다음은 주최 측의 이벤트가 흥을 돋우는 것이다. 


  전국 공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지역 특산물을 딴 미인대회, 가요제 등이 대표적이고 잡기, 만들기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아무튼 흥겨운 한 마당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시설들이 들어서는 낌새를 챌 수가 없었다. 기존 상권을 보호하려는 정책이라고 좋게 생각하면 되겠지만 별 흥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사진은 축제에 참석했던 일행들이 찍어서 준 것으로 왕궁꼼빠에서 승려들이 전통춤을 추는 것이라고 하였다. 좀 다른 것을 하려나 하면 또 이 춤을 추고 조금 더 기다리면 다른 행사를 하겠지 하면서 기대를 하고 관람을 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이 춤만 추었다는 것이다. 너무 실망하였다고 하였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까 그럴 것이고 그들의 축제 내용을 잘 모르니 한 동작 한 동작을 이해 할 수 없고 또 계속 같은 춤만 춰대니 재미가 없을 것임은 뻔한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큰 행사라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오니까 쇠락해 가는 무스탕왕국의 홍보차원에서라도 최대한 전통을 살리려 했을 것이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앞의 큰 산에 성 같은 것이 보인다. 가이드에게 저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옛 왕궁 터란다. 점심을 먹고 나와 고창배씨는 거길 가보기로 했다. 오전에 보았던 현재의 왕궁보다는 훨씬 전략적 요충지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전을 했는지 가보고 싶었다. 
 





오기 전에 호텔에서

몇 번이나 오르는 길을 눈으로 익혀 두었는데도 막상 와 보니 헷갈렸다.    둘이 헤매는 것 보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가서 길을 확보하면 두 번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앞장섰다. 가다보니 거리가 너무 떨어져 뒤에서 보면 따로 따로 가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렇게 하자고 미리 말을 하고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따랐지만 이왕 멀어진 것 그냥 가기로 했다.


  밑에서 보기 보다는 훨씬 가팔랐다. 조금만 빨리 가려 하면 숨이 찼다. 올라가서 보니 깃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 무너지고 무엇에 쓰던 것인지 흙무더기만

삐쭉하게 남아 있어서 주변에 있는 큰 돌로 3층탑을 쌓아주었다. 명색이 왕궁 터라면서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이방인이면서도 아쉬움이 컸다.
  땅 바닥에  조그만 부처님 상이 떨어져 있어 벽의 구멍에 끼워 놓고 잘 계십사 절을 올렸다.


  왕궁 터는 두 개가 있었는데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큰 왕궁 터고 낮은 산에 있는 것은 작은 왕궁 터라고 하였다. 작은 왕궁 터에 와서 그늘이 있기에 수관을 하였다. 여긴 정말 조용하고 시원해서 그런지 집중이 잘 되었다. 한 시간 정도 하였는데 언제 그렇게 시간이 간 줄 몰랐다. 


  내려오다 보니 어제 갔던 가이드네 동네였다. 아직 시간이 일러 좀 더 멀리 괜찮은 곳을 보면서 가려고 대충 눈 그림을 그려놓고 내려왔다.


  위 왕궁 터에서 보니 여기가 왕궁이 있을 만한 장소였다. 그 주변 아래가 곡창지대였다. 그러니까 작은 왕궁은 행정관청이나 곡식 창고 정도이고 큰 왕궁은 왕이 대신이나 가족들과 거처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왕궁을 방어하는 차원에서는 위치가 좋은데 마을에서  작은 왕궁 또 작은 왕궁에서 큰 왕궁이 너무 멀다는 것과 바람이 너무 불어 생활하기가 불편해서 왕궁을 옮기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다.


  작은 강이 흐르고 또 이처럼 상단에도 물길이 있었다.

이 물은 현재 왕궁이 있는 마을로 물을 보내기 위하여 현수교를 놓고 거기에 파이프를 설치하여 물을 건네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물을 보니 발이라도 담기어야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물이 너무 차서 오래 담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여기는 흐르는 물이라 어떨지 몰라도 네팔의 웅덩이에는 거머리가 알을 낳는단다. 알에서 부화한 작은 새끼들이 동물이나 사람이 들어오면 몸 어딘가에 들러붙는단다. 그리고 구멍을 통하여 몸속으로 들어가 피를 빨아 먹다 보면 그 성체는 원인도 모르고 죽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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