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임진왜란의 왜장들은 어떻게 되었나?

작성자leekwandong|작성시간11.06.23|조회수379 목록 댓글 0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직전신장), Oda Nobunaga, 1534.6.23~1582.6.21]
요약
일본의 전국(戰國) ·아즈치시대[安土時代]의 무장(武將).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고 전국전란의 시대에 무력으로 일본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오다 노부나가 갑옷 /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옆. 유슈칸. 전쟁박물관.
본문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이 분열되는 전국시대에는 하극상에 의한 무력세력들이 등장하였다. 무사계급은 보다 많은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다[] 가문도 지방의 슈고 다이묘를 섬기는 작은 호족세력이었으며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기요스 오다가()에서 행정사무를 담당하였던 인물이었다. 1549년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기요스 성[]의 영주이자 오와리국[: ]의 태수가 되었다. 1560년 동쪽의 세력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공격해오자 이를 오케하자마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세력과 무명()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의 다이묘들은 교토로 진출하여 천하를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562년 노부나가는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 1567년 교토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미노와 오미에를 물리치고 이바나 산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교토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천하포무()라고 새겨진 인장()을 사용하였다. 정복한 이바나 산성은 기후 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68년에는 13대 쇼군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막부()의 잃어버린 영지를 회복해 줄 것을 청해 왔다. 이를 기회로 삼아 노부나가는 쇼군으로부터 무장으로 실력과 신뢰받았으며 교토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1568년 9월 기후 성을 출발한 노부나가는 다이묘들의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교토에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쓰러져 가는 무로마치 막부를 재건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나갔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은 아시카가 요시나키는 쇼군의 자리에 올랐고 노부나가에게 답례로 부장군()에 임명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천하통일에 관심을 집중하였기에 부장군이라는 벼슬은 보잘 것없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부나가는 쇼군 요시아키에게 니조 성[]을 지어주고 황족과 막부 권력자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쇼군 요시아키를 이용하여 지방의 다이묘들을 모두 자신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전국의 다이묘들과 전쟁은 계속되었다. 1570년 4월 아사이씨와 아사쿠라씨의 연합군과 전투에서 벌였지만 이들을 정벌하지 못했고 그해 9월에는 이시야마의 난공불락의 성이지 사찰인 혼간지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대패를 당했다. 1572년 교토 진출을 노리는 다케다 신겐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아시이씨와 아사쿠라씨도 정벌하여 모두 자결하게 하였다. 이때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이세의 나가시마 전투에서 철포를 앞세워 승리하였고, 대패를 경험했던 이시야마 혼간지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대부분 다이묘를 정벌한 실력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다이묘를 평정하였으나 아직 추고쿠 지방에는 강력한 모리씨가 남아있었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리씨의 정벌을 명령하였다. 히데요시는 돗토리 정복하였고 1582년 5월 다카마쓰 성을 공략하다가 모리씨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5월 29일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출병하였고 1582년 6월 2일 혼노지[]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날 새벽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는 교토에서 반란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다카마쓰에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사망 전갈을 받자마자 회군하여 미쓰히데를 정벌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근거지였던 오하리와 미노 지방이 비옥한 곡창지대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군대는 다량의 철포를 구입하였고 기동성이 뛰어났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 ·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던 인물로 평가된다.

 
이미지
오다 노부나가 갑옷
442*600, 80kb
오다 노부나가 초상화
330*248, 16kb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풍신수길), 1536~1598.9.18]
요약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일본통일을 이룩했다.
별칭 기노시타 도키치로, 하시바 히데요시
국적 일본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일본 오와리국
모모야마성 / 아즈치모모야마시대. 도요테미 히데요시의 성으로 이 시대의 건축문화는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본문
오와리국[:]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 간파쿠[]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이 되자 후지와라[]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시대를 열었다. 1588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상인으로 유명했던 가문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되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 수 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현재히젠의 가츠라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명나라 심유경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159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고전을 거듭하였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 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등청정), Kato Kiyomasa, 1562~1611.8.2]
요약
일본의 무장(武將).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하여 맹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측에 참전했다.
별칭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나카무라
가등청정의 석상 / 나고야 성에 있는 가등청정의 석상. 임진왜란시에 장수로도 출전했다. 축성술의 귀재로 알려져 있으며 나고야성 공사를 담당했다.
본문

1562년 나카무라[]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명()은 가토 도라노스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6촌간으로,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을 지내며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뛰어난 활약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 등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이후 규슈[]의 히고[] 남부에서 25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울산싸움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西],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갈등을 빚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섭정을 맡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인 이에야스 측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구마모토[] 대영지()의 세습영주가 되어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으며,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다가 1611년 8월 2일 사망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요약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히고노쿠니 우토 성의 영주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이었던 무장이다.
순천 왜성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소서행장이 쌓은 왜성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전라남도 지방에 쌓은 왜성으로는 오직 한군데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이충무공의 전장터이기도 한 이 성은 왜장 소서행장을 이곳에서부터 노량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본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대표적인 천주교도 영주이며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른다. 사카이(오사카 부근)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던 집안의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西)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관을 지냈다. 고니시 류사는 명나라와 무역으로 서양문물을 일찍 접하게 되었으며 독실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그의 차남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1584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혼노지의 변란 이후로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아버지 류사와 함께 세토나이 해의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총책임이 되었다. 1588년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히고노쿠니 우토 성의 영주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1진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포성을 함락하고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대동강까지 진격하였고 6월 15일에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에게 패하여 평양성을 불지르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고 명나라를 정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조선의 이덕형과 명나라 심유경 등과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명나라와 강화를 위한 교섭에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그의 강화교섭 계략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정복야욕을 더욱 자극하였다. 1596년 강화교섭이 최종 실패로 끝나자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 왔으며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격퇴하고 전주까지 무혈입성하였으며 순천에 왜성을 쌓고 전라도 일대에 주둔하였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철군명령이 내려지자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1600년 일본의 정국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이를 저지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미쓰나리에 동조하여 싸우다가 패하였다. 고니시는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할복자결을 거부하고 효수당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석전삼성), 1563~1600.11.6]
요약
일본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침입하였다. 행주싸움에 출전해 권율장군에게 대패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여 처형되었다.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일본 오미
본문

오미[:현재 ] 출생하였고 1572년 13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그를 섬겼다. 후에 중용되어 사와야마성[] 18만 6000석의 영주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오타니요시쓰구[마스다 나가마사[]와 함께 간파쿠[] 도요토미의 대리인으로 조선에 침입하여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를 도왔다.

벽제관전투에서 대승을 하였지만 행주성 전투에 출전하여 조선 권율() 장군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와 화평 교섭을 벌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출정하였는데, 1598년 도요토미가 본국에서 철군 명령을 내리고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내분으로 휩싸이는데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공격을 받고 사와마야 성에 칩거하였다. 하지만 점차 강대해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세를 규합하였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고니시 유키나와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였던 영주들이 대거 참전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되었다. 도요토미의 가신() 가운데 문치파()의 총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3~1655]
요약
일본의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시코쿠, 규슈, 오다와라 정벌 등에 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는 침략군의 감군으로 조선에 침입했다.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본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1585년의 시코쿠[] 정벌, 1587년의 규슈[] 정벌,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 등에 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때는 침략군의 감군()으로서 조선에 침입해 왔다. 즉, 1592년(선조25)에 왜군의 제8진 1만 명을 이끌고 침입, 서울에 입성하여 왜군이 북진한 뒤의 서울 수비를 담당, 이듬해 행주() 싸움에서 권율() 장군에게 대패했을 때 부상을 당하고 철군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왜군의 제2진을 이끌고 내침, 남원() ·전주()를 점령하였으나, 소사평() ·명량() 싸움에서 일본군이 대패하자 퇴각했다. 히데요시의 신임이 두터워 다섯 다이로[]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1600년의 세키가하라[] 싸움에 서군(西:)의 중심 전력으로 출전했다가 대패하여 1606년 하치조섬[]에 약 50년간 유폐되었다가 죽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31~1616.6.1]
요약
일본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초대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세키가하라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의 지위를 합법화했다. 여러 가지 정책으로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했다.
별칭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국적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보물탑 / 일본 도치기현 닛코 도쇼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골이 들어 있다.
본문

아명 다케치요[].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 ·도토미[]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