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사이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서있다.
“대웅전 편액 글씨는 당대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는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40년 제주도 귀양 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걸었다가 후에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
이 얘기를 두고 많은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추사가 원교 글씨를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도록 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사는 이광사의 동국진체에서 조선 글씨의 習을 보았던 것이고
이광사 편액을 다시 걸도록 한 이유는 오랜 귀양 생활 동안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깨달은 下心의 발로가 아니겠는지.
동국진체라는 이름은 중국의 晋体(왕희지체)에서 나온 참다운 왕희지 글씨에
근본을 둔 조선의 글씨라는 의미다.
어느 한가한 오후,
글씨에 몰입해 있는 안평대군에게 양녕대군이 찾아온다.
양녕은 안평의 글씨를 보고는 “너는 어찌하여 충신인 안진경의 글씨를 쓰지 않고
조맹부 같은 변절자의 글씨를 쓰는 것이냐?” 라고 질타 하니
안평은 "그냥 글씨가 좋아서~"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여기에 나오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바로 동국진체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송설체는 고려 말부터 조선조 한석봉체와 이광사로 정립되는 동국진체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조맹부는 송의 황족으로서 송이 원에 망하지 않았더라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민족이었던 원은 한족인 송의 민심을 보듬고 다스리기 위하여 한족을 관리로 등용하는데 조맹부도 그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대에 벼슬한 조맹부를 변절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
원 왕조에서 한족의 자존심을 걸고 왕희지 글씨를 복원코자 노력했던 인물 또한
조맹부 이었음도 알아야할 것이다.
문제는
당말에서 송말까지 중국에는 번각과 누모본이 난무하여 왕서 위작이
많았는데 조맹부 또한 촉체라 일컫는 그의 송설체를 보면 위작의 왕서로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僞作에 飜刻을 거듭한 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고려 중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유행하게 되고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한석봉체다.
동국진체는 한석봉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겨 왕서를
구현코자 하는 뜻에서 한석봉 사후 150년경 玉洞 李曙에 의해 창안되어
白下 尹淳에 의해 정립되고 円嶠 李匡師에 의해 융성 발전하였다.
추사의 祖父 金頤柱는 물론 正祖大王도 동국진체를 썼으며 추사 역시 이들의
영향 아래 10살 때까지의 글씨에서 동국진체 풍을 보인다.
동국진체는 왜 왕희지 글씨에서 벗어났을까?
이광사가 王書로 알고 학습한 것은 왕서가 아닌 중국 五代 때 南唐 李煜(後主)이
소장한 왕서 模本이었던 것으로 이광사는 이욱의 筆陣圖의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때문에 동국진체는 왕희지 글씨와는 달리 筆意가 끊어진 현상을 보이게 되고
이 같은 필의 끊김 현상은 한석봉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광사에 이르러 조선의 필의가 완전히 끊기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석봉체가 근골이 약하고 肥肉美가 있는데 비해
동국진체는 살이 없고 멋이 많이 들어간 모양만 다듬은 글씨라는 평을 듣는다.
곧 王書를 본뜬 것이 중국에서는 蜀體라 일컫는 松雪體요 송설체가 조선에
와서는 干祿體라 평하는 한석봉체와 이광사의 동국진체인 것이다.
干祿體는 사무용 문서기록용 행정글씨라는 점에서 그 서품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같은 조선의 현실에서 24세에 중국에 들어가 王書를 비롯한 중국 글씨의
진면목을 목도한 추사는 돌아와 호기(?)어린 발언을 서슴지 않는데,
“王書 僞作으로 공부한 원교의 글씨가 품격이 떨어짐은 통탄할 일이다”
“波는 五停인데 波가 五停하는 것을 원교가 모른다고 하면 일반인이 알겠는가?”
“東國晋體가 나옴으로 해서 우리 글씨를 망쳤다”
“董其昌의 글씨를 큰 산에 비유한다면 석봉의 글씨는 한 마리 날아가는
새의 깃털에 비견할 만하다.” 라고 개탄했던 것이다.
조선조 글씨 학습의 보편적인 교본은 중국과 우리나라 모두 왕희지 글씨였던
것이고, 동국진체는 원교 이광사가 우리 고유의 서체를 창안하고자 노력해서
나온 글씨라기 보다는 왕서의 위작으로 학습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