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露鋒)과 장봉(藏鋒)
서예 공모전에 나오는 글씨들을 운필 유형에 따라 분류해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한석봉체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통 필법에 의한 글씨, 중국 법첩으로 공부한
글씨, 그리고 중국 법첩에 의거하되 운필은 우리나라 전통 필법을 따르는 유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체적인 것은 세 번째라고 할 수 있다.
서예는 露鋒에서 藏鋒으로 발전해 온 역사다.
노봉과 장봉의 궁극적인 차이는 붓을 다루는 기술에 있다.
중국 은나라 때는 100%가 노봉이다. 說文篆文 이전까지이며 西周 이전까지도
글씨는 軟美와는 거리가 먼 사나운 특징을 보이다가
東周시대 古文, 籒文으로 발전하면서 장봉의 시원(엄밀하게는 逆筆法)이 등장하고 東漢隸의 逆入平出을 거쳐서 왕희지에 이르러 완전한 藏鋒法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 전통 서예는 노봉법이며 노장 혼용이 현재까지 대세이다.
때문에 한석봉체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통 글씨의 운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글자 체형에서 右上 개념이 아닌 左右 수평이다. 체형은 正方에서 偏方체형을
이룬다. 획은 굵어서 비육미가 있고 근골이 약하다.(이는 노봉법의 가장 큰
약점이다.) 획과 획 사이의 간격이 좁아 답답하다. 가로획이 굵고 세로획이
가늘거나 가로 세로의 굵기 변화가 없다.(때문에 추사체를 독특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붓이 뉘는 각도가 심하다. 붓은 자동적으로 방향을 견제해서 나아가야지
억지로 반대로 뉘어서 나아가면 안 된다. 그럴 경우 붓끝이 갈라진다. 장봉법은 붓
을 뉠 필요가 없다. 붓을 뉘면 頓筆이 약해지고 偏筆이 나오기 쉽다. 돈필은 방향을 틀어 중봉 잡는 역할을 한다. 운필 과정에서 붓털이 살짝 꼬이는듯하다가 풀어지는 연속 동작에서 붓이 엎어지고 젖혀진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 글씨가 노봉 성향을 탈피하지 못한 배경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축약해 볼 수 있다.
중국 서예를 처음 수용한 것이 노봉법이고, 이것이 한글 궁체로 이어져서 조선의
유교적인 선비사상에 沈着한 과정으로 이해하면 맞을 것이다.
BC108년 한사군으로 들어온 민족이 漢族이었다면 우리나라 장봉 유입은
바로 이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 때 들어온 민족은 변방족인 만주족이다.
당시 중국에는 채옹에 의해 정립된 팔분서가 이미 등장하였고,
한사군과 채옹 시대는 약 110년의 시간 차이가 난다.
이것이 중앙정부와 변방의 차이 내지는 漢族과 移民族의 격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중엽의 주자학 수용은 사실상 우리 서예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유교적인 선비사상은 재주나 기술을 천시하여 서예를 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기 보다는 한학 내지는 한자를 익히기 위한 글씨 쓰기였으며,
글공부한 사람들은 과거급제로 먹고살만한 처지인지라 안일한 현실 만족은
굳이 환경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추사 등 중국 문물을 수용한 학자들은 당쟁, 사화를 겪으면서 귀양으로 세월을
보내니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 어려운 여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누적은 해방 후 지금에 이른 것이다.
왜 장봉이어야 하는가?
운필 효과 면에서 볼 때 장봉일 때만이 붓을 入筆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이는 의도적으로 붓을 다듬지 않고도 글씨나 획을 이어서 쓸 수 있다는 뜻이며
꾸밈없는 순수 자연미라는 서예 대원칙에 부합하고 문자의 역할인
신속한 의사전달이라는 가치에도 합당하다.
중국 書家의 장봉 개념을 살펴보면,
董其昌은 그의 <畵禪室隨筆>에서 “장봉을 귀히 여기는데 유사한, 애매모호한
장봉으로 대체하려 한다. 太阿劍을 자를 수 있는 뜻, 의지가 없으면 장봉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올바른 장봉을 표현하는 예가 많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태아검이란 크게 보호한다는 의미의 장봉 개념이다. 칼로 자를 때
마지막 단계에서 삐치지 않고 끊는 듯이 하는 동작을 표현한 말이다.
노봉과 장봉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를 떠나서
노봉법으로 전서에서 초서까지 다 써보자. 또 장봉법으로 전서에서 초서까지
다 써보자.
노봉법으로는 예서, 전서가 절대로 나올 수 없다. 入收三折에서 收筆 三折을 빼면
예서의 역입평출이 가능한데 우리나라 일반적인 필법은 入筆 장봉 收筆 노봉이다.
일반적으로 추사체를 이야기할 때 중국 명필 글씨를 두루 섭렵하고
거기에 추사의 풍격이 더해져서 완성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얘기는 중국 名書家의 글씨를 제대로 쓸 줄 알면 추사체가 가능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사체는 중국 남방서체의 藏折鋒法이다. 붓을 밀었다가 당길 때 엎어서 나간다.
이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회봉법은 마무리 단계에서 엎지 않고 끌어서
마무리한다. 때문에 추사 글씨를 흉내 내고 위작도 만들어보지만
거칠고 힘이 빠지는 글씨가 연출되는 것이다.
장봉법의 생명은 입수삼절이다. 折이 되지 않으면 장봉이 아니다.
붓을 엎고 젖히는 반복 과정에서 붓끝이 서지 않으면 장봉이 안 된 것이다.
頓이 되지 않으면 붓끝이 곧추서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서예계 일각에서는 거친 글씨, 葛筆이 많이 가미된 글씨가 좋고 힘 있는 글씨인 것처럼 여기는 이상한 풍토가 만연해있다.
그러면서 왕희지 글씨는 색시처럼 곱게 화장한 꾸민 글씨라고 폄하한다.
이는 청나라 때 극히 일부 서예가의 인식을 답습하는 데에 따른 반응이리라.
하지만 名書家들 글씨는 거칠지 않다. 사실 노련한 운필로 거칠게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TV 강연 프로그램에서 유 홍준 선생은 추사의 書品을 논하면서
중국 5대 명필에 포함시켰다. 추사체를 그저 怪하고 독특하게만 여겨오던
우리 서예계에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림 보듯 겉모양만 보고 서체를 특징지을 것이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운필의 원리까지 들여다본 후에 서예로서 추사체의 특징 내지는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서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은 아직도 서예공모전에서 추사체는
별종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당히 서예 분과 내에서 전, 예, 해, 행,
초서 부문으로 동등하게 대우받고 동등하게 평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추사체 부문이라 하여 별도로 독립시키거나 아니면 서예와는 무관한
전통미술공예 공모 분야에 서예로서는 유일하게 끼어 있는 추사체를 볼 때
이러고도 과연 ‘우리나라 최고 명필 추사 김 정희’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이는 결코 추사와 추사체를 예우하는 것이 아니며 추사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 서학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