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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폭력

그럼 왜 하느님은 인간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창조하셨나

작성자jamesha|작성시간26.06.20|조회수10 목록 댓글 0

이 질문은 성경과 신학이 처음부터 씨름해 온 가장 깊은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만일 인간이 이렇게 쉽게 질투하고, 미워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면, 왜 하느님은 처음부터 그런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의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하느님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폭력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꼴"(창세 1,26-27)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그것은 이성과 양심, 관계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프로그램된 로봇은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사랑하지는 못한다. 사랑이 진짜가 되려면 거부할 가능성도 함께 있어야 한다. 선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악을 선택할 자유도 존재한다. 따라서 폭력의 가능성은 창조의 결함이라기보다 자유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4장에서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창세기 6장에서는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고 말한다. 바벨탑 사건, 전쟁, 배신, 살인, 탐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성경은 인간이 본래부터 완성된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받았지만, 동시에 흙으로 빚어진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본다. 인간 안에는 사랑의 가능성과 폭력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왜 하느님은 자유를 거두어 가지 않으셨을까?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이 나온다. "인간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라면, 왜 하느님은 자유를 없애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자유를 없애는 순간 인간도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선하게 프로그램된 기계가 아니다. 하느님은 순종하는 자동인형이 아니라,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악 자체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실 만큼 선하시다."

 

흥미롭게도 예수는 인간의 폭력성을 기적처럼 제거하지 않으셨다. 배신한 베드로도 그대로였고, 의심 많은 토마스도 그대로였다.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역시 즉시 변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폭력을 또 다른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용서와 사랑, 화해를 통해 폭력의 방향을 바꾸셨다.

 

하느님은 폭력을 가진 인간을 없애는 대신, 폭력적인 인간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길을 선택하셨다. 어쩌면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성경은 창조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는다. 인간은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완성을 향해 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피조물은 모두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로마 8,22) 인간은 이미 하느님의 형상을 받았지만, 아직 그 형상을 완전히 살아내지는 못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왜 하느님은 인간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은 아마 이런 말에 가까울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폭력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랑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했고, 자유에는 폭력의 가능성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위험 때문에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그 폭력을 치유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결국 성경의 마지막 희망은 폭력적인 인간이 사라지는 데 있지 않다. 폭력을 품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는 데 있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요한묵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는 성경 전체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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